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194화 (194/225)

너의 코드가 보여 (194)

대답이 바로 들려오지는 않았다. 안에 있는 건 확실하다. 코드를 보고 온 거니까.

혹시 자고 있나?

아직 밤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린이라면 충분히 숙면에 들었을 수도 있는 애매한 시간이긴 하다.

안 그래도 이쪽 세계는 지구에 비해 밤이 빠른 편이니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고.

급한 용건도 아니었으니 나중에 다시 와야겠네.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리는데, 뒤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다시 뒤돌아보니 타냐가 문틈으로 빼꼼 몸을 내밀고 있다. 얼굴이 퀭하다. 진짜 자다 나온 건가.

“혹시 내가 자던 거 깨운 거야?”

“아냐. 나 원래 대부분 새벽까지 깨어 있어.”

그건 그거대로 문제 아닌가.

아침 식사에도 꼬박꼬박 자리 채우는 거 보면 늦잠을 자는 것도 아닐 텐데. 어쩌면 살짝 퀭해 보이는 게 부족한 수면 탓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뭐 다 큰 애한테 엄마라도 된 양 잔소리하긴 좀 그렇고, 나중에 보약이나 좀 챙겨 줘야지.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아,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말하고 나서 조금 고민했다. 여기서 대화하는 게 나을지 방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지. 나름 기밀이라면 기밀인 내용일 테니까.

하지만 주변을 슬쩍 보니, 물리적으로 엿들을 수 있는 위치에 사람은 없었다.

조금 떨어진 데 있는 사람들도 있긴 한데, 어차피 대부분은 안에서 대화해도 옆에 붙은 것처럼 들을 수 있는 녀석들이다. 아마 소리를 차단해도 금방 뚫어 버리겠지.

결국 대충 근처 창가에 앉아 대화를 이어 갔다.

“너 혹시 푸른 혈맥 능력 각성했어?”

살짝 내밀어져 있던 발이 흠칫한다.

“……응. 그런데 겨우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어. 무슨 능력인지 조금 궁금해서. 대답해 주기 곤란하면 그냥 그만 돌아가고.”

“아니, 별로 그런 건 아닌데…….”

타냐가 잠시 한숨을 쉬더니 복도로 나왔다.

“정확히 뭐가 궁금한 건데? 작동 방식?”

“그것도 그거지만…… 역시 뭔지가 제일 궁금하지. 대련할 때 기척이 느껴지지 않던데, 은신계열 능력이야?”

“아…… 그것 때문에 착각한 거였구나. 난 리카르도한테 들은 건 줄 알았는데.”

기척을 지웠던 건 푸른 혈맥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처럼 들린다.

“……설마 그거 부적술이었어?”

“응. 은둔인지 뭔지 얼마 전에 배웠거든.”

은둔술.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는데…….

“그거 최상급 부적술이잖아.”

“익히느라 조금 고생하긴 했어. 기운도 많이 먹고, 유지하기도 힘들더라고.”

“…….”

최상급 부적술이 저리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건가 싶다. 지금 동대륙에서 최상급 부적술 사용할 수 있는 건 다섯이 채 안 될 텐데.

그만큼 어려운 거라 나도 처음부터 그 가능성은 제외한 거다. 겨우 몇 년 깔짝댄 걸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니까.

쟤는 대체 그동안 무슨 길을 걸어온 거지…….

새삼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이 실감 난다. 당연한 얘기긴 하지만, 나 혼자 발전하고 있던 건 아니구나.

솔직히 어느 정도 성장을 짐작하고 있던 카일과 달리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상대라 더 놀라운 건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내가 생각하는 시나리오는 결국 원작에 한정되었을 뿐이구나 하는 반성도 들고.

어쨌든 애초에 내가 감지를 못한 건 푸른 혈맥의 능력조차 아니었다는 소리다.

나는 창가에서 내려오며 물었다.

“그럼 푸른 혈맥의 능력은 뭔데? 혹시 그것도 부적 관련된 거야?”

“아니. 그쪽이랑은 크게 관련 없어. 사실 나도 아직 완전히 확신은 못 하고 있지만…….”

타냐가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각성한 건 생명체의 영혼을 조종하는 능력인 거 같아.”

……뭘 조종해?

나는 잠시 말문이 막힌 채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쟤가 한 말이 그만큼 황당했기 때문이다.

바이론이 썼던 정신 조종도 충분히 규격 외의 기술이었는데, 이번엔 심지어 영혼이라니. 나도 대강의 설정으로만 알고 있는 개념 아닌가. 나를 이 세계까지 끌고 온 게 바로 그거기도 하고.

그럼 설마 얘가 나를 원래 있던 지구로 보내 줄 수도 있는 건가?

키탄은 내가 자살하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 했지만, 그 녀석도 분명 확신하고 말한 건 아니었다. 그냥 반쯤 추측한 발언이었지.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 주면 영혼도 포기하겠지’는 누가 봐도 무책임하게 지껄이는 소리지 않나.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이 세계로 온 게 영혼 때문이라는 가정이 맞다면…… 타냐는 보다 안전하고 가능성 높은 대안이 될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절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영혼을 조종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왜, 왜 그래 갑자기?”

“나한테 중요한 문제라서 그래. 설명 좀 해 줄 수 있어?”

타냐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중요한 문제라는 내 말에 금방 정신을 차린 듯했다. 녀석이 살짝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 진짜 나도 확신하는 건 아니야. 애초에 영혼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하는 건지 아닌지도 잘 모르고…….”

“그럼 뭐 때문에 영혼을 조종하는 거라고 생각한 건데?”

“능력을 발동하면 사람들 위에 희미한 형태의 연기 같은 게 떠올라. 그냥 그게 영혼 아닐까 생각한 건데…….”

말이 이어질수록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다. 본인이 말해 놓고도 근거가 빈약하다는 느낌이 든 거겠지.

어쩌면 내 안색이 영향을 준 걸 수도 있고. 모르긴 몰라도 분명 심각하게 굳어 있을 테니까.

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희미한 형태의 연기.

써먹은 적은 한 번도 없는 설정이긴 하지만, 분명 영혼의 모양이 그렇다는 문장을 넣은 적 있기는 하다.

타냐가 조종하는 게 영혼이라는 가능성이 더 높아진 셈이다.

“그럼 조종이라는 건 뭐야? 그 영혼이란 걸 마음대로 움직이고 그럴 수 있는 건가?”

“비슷하기는 한데…… 나 진짜 잘 몰라. 혹시 뭐 잘못될까 봐 몇 번 써 보지도 않았단 말이야.”

타냐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끝에 가선 거의 독백처럼 들릴 정도가 되었다.

왜 저러지? 내가 왜 미리 연습해 두지 않았냐고 호통이라도 칠 줄 알았나?

하지만 정작 나는 녀석을 칭찬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알지 못하는 건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게 옳은 대처니까.

예전에 아무 재능도 없다고 자책할 때는 저만한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했을 거다. 당장 여기저기 실험부터 하고 다녔겠지.

어쨌든 기특한 건 둘째치더라도 결국 누구한테 테스트를 해 보긴 해야 하는데.

“타냐, 지금 시간 괜찮아?”

“어? 어 뭐 괜찮기는 한데…….”

잘됐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녀석을 바라보며 똑바로 말했다.

“그럼 내가 실험대상 돼 줄 테니까 그 영혼 조종술인지 뭔지 좀 가서 같이 연습 좀 해 보자.”

* * *

“아, 이제 깼어?”

눈을 비비며 일어나던 카일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순간 움찔했다. 근처에 누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당황해서 돌아보니, 태평한 안색의 릴리아가 턱을 괸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리안 형은요?”

“스승님이라면 꽤 오래 전에 자리 떴어. 너는 나한테 떠넘긴 채로.”

릴리아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리저리 몸을 풀다가 의아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봤다.

“그 뭐냐…… 나는 검사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그치들이 말하는 깨달음? 뭐 그런 거였던 거야? 한참을 멍하니 있던데.”

“……깨달음……. 네. 아마 그런 것 같아요.”

카일이 멍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답했다. 아직 아까 전 보았던 검격이 뇌리 속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베기 같지만, 단순하지 않은 베기.

일반적인 동작 같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동작.

카일은 그 애매모호함 속에 있는 진리를 보았다. 그건 분명 검이 극한에 달해야 도달할 수 있는 정점에 가까우리라.

‘내가 그걸 사용할 수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원래 보고 느끼는 것과 그걸 실제로 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법이니까.

‘……아니, 이번에 드디어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는 게 맞나?’

카일은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보고 느끼는 것과 그걸 실제로 행하는 건 큰 차이점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카일에게 기술이란 보는 즉시 따라 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었으니까. 여태까지 연습이나 익숙해지기 위한 과정을 전부 생략할 수 있었다는 소리다.

그 둘이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이 든 건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따라 하지 못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술이 될지도 모르고.’

카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만큼 자신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자만이나 오만이 순식간에 사라질 정도로.

‘대체 리안 형은 이걸 어떻게 익힌 거지?’

분명 기술을 익히는 재능 하나만은 자신이 위라고 여겼는데, 어쩌면 그조차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보통 용병만도 못하던 검술 실력을 지녔던 사람이 겨우 수년 만에 저런 걸 배웠다면 판단을 달리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나는 결국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건가…….’

다시 한 번 씁쓸하게 웃은 카일이 이내 바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주저앉아 전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이만한 기술을 보여 준 리안 형에게도 예의가 아니리라.

카일이 그렇게 다시 의지를 다잡고 있을 때, 옆에서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릴리아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저 애 늙은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혼자서 침울해졌다 놀랐다 하더니, 이제는 갑자기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릴리아는 저 급작스러운 감정 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인간들은 원래 다 저렇게 감정 기복이 심한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엘프 마을 사람들보다 훨씬 담담해 보이던 것이 저 카일이었으니까.

그동안 붙어 다녔던 스승님이나 성녀님도 딱히 감정 기복이 심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설마 깨달은 게 표정 변화에 대한 깨달음은 아닐 테고…….’

고민을 거듭하던 릴리아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성장통. 열일곱이면 딱 그럴 나이긴 하다. 사춘기가 오기엔 한참 멀었고, 갱년기가 오기엔 조금 이르지 않은가.

인간과 엘프의 기준을 뒤섞어 낸 결론이었지만, 릴리아는 그걸 인식하지 못했다. 아직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그렇게 둘이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사이, 어느새 바깥이 어두워졌다.

릴리아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카일을 바라봤다.

“나는 그만 돌아갈 건데, 넌 어쩔 거야?”

“저는 리안 형이 보여 준 거 연습 좀 하다 갈 거예요.”

“그래? 혹시 아파서 못 걷는 거면 얘기해. 업어다 줄 테니까.”

“……네?”

카일이 황당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갑자기 뭐가 아프냐 묻는 것도 이해가 안 가지만, 뒤에 붙은 말은 이해가 안 가는 수준을 넘어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카일이 뭐라 입을 열어 반박하려던 그 순간.

솨아아아.

저택의 중앙에서, 연유를 알 수 없는 한기가 거세게 휘몰아쳐 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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