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193화 (193/225)

너의 코드가 보여 (193)

그렇게 시작된 수업은 정말 명강의라 할 만했다. 정령술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인 카일조차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 내용이 머릿속에 콱 박혀 드는 거다.

원래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던가. 카일은 리안의 방대한 지식에도 놀랐지만, 그 깊이에도 탄복했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금 실망했다.

‘정말 2년 동안 정령술 하나만 팠나 보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막말로 한 십 년은 넘게 연구만 한 사람 같지 않은가. 저래서는 검술이 퇴보라도 하지 않았으면 다행이리라.

“가, 감사합니다! 저희 마을 장로님들도 이 정도로 알지는 못할 거예요!”

“오바 그만하고 내려가. 정 고마우면 나중에 밥값이나 하고.”

“네, 네!”

처음부터 끝까지 반짝이는 눈으로 강의를 필기하던 릴리아가 황급히 훈련장 아래로 내려갔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도중에 발까지 한 번 꼬인다. 무슨 계시라도 받은 사람 같다.

‘이해 못 할 건 아니지.’

만약 검술 강의가 저 수준의 절반만 되면 자신도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문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지만.

카일은 잠시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리안의 올라오라는 소리에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오래 기다렸다. 그런데 왜 그렇게 뭐 씹은 것 같은 표정이냐?”

“별로 그렇진 않을 건데요.”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도 예전처럼 무표정하게 있던 것보다는 훨씬 낫다 야. 그땐 얘가 애가 맞나 싶었다니까.”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라 해 놓고 하는 말은 완전히 딴판이다. 살짝 자존심 상한 카일이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그보다 리안이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그보다 그동안 라이놀한테 검술 수련은 제대로 익혔어?”

“네. 그런데 한 1년 전부터는 거의 저 혼자 자습하고 있어요. 가끔씩 1기사단장님이 봐주기는 하지만요.”

“오, 라이놀한테 배울 건 다 배웠다 이거냐?”

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네 재능이면 내심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 너한테 부족한 건 머리에 떠오르는 완벽한 동작을 재현하지 못하는 몸뚱어리 하나뿐이었으니까. 실제로 나 검술 배울 초기에 옆에서 훈수 둔 것도 전부 너였고.”

“그렇긴 하죠.”

카일이 다소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지난 2년 동안 콧대가 그야말로 끝 모르고 높아졌기 때문이다.

카일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남들보다 뛰어났던 재능은, 겨우 그 정도 수준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수백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괴물.’

대륙에서 제일 강한 이 중 하나라는 제국 1기사단장 리카르도가 카일을 평가한 말이다.

카일은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한 검술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고, 처음 본 마법의 술식을 배운 즉시 발동할 수 있었다.

남들이 걸을 때 날고, 남들이 날 때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를 항해하는 격이다.

덕분에 최근 카일은 약한 매너리즘마저 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 본인이 배울 만한 것은 없다는 상상까지 들고는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웠다. 실제로 대륙에 퍼져 있는 검술과 술식은 이미 전부 머릿속에 박아 두었으니 말이다.

부족한 건 마력의 양과 신체 능력뿐.

그 조건만 충족한다면 카일은 지금 당장이라도 9성급 마법을 발동할 자신이 있었다.

그때, 리안이 카일의 눈을 보고는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지금쯤이면 분명 그러고 있을 줄 알았다. 원래 스토리에서도 한 번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고치는 병이니까.”

“원래…… 뭐요?”

워낙 조그맣게 말해서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솔직히 나도 너한테 딱히 알려 줄 수 있는 검술은 없다. 웬만한 건 오히려 나보다 더 잘할 테다가, 가르쳐 줘도 금방 익히고 말 테니까.”

“그럼 저는 왜 부른 건데요?”

“검술이 아닌 검술을 가르쳐 주려고.”

“네?”

검술이 아닌 검술이라니. 무슨 선문답 같은 건가?

카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 리안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검을 천천히 내렸다.

“일단 한번 봐. 나도 말로 설명 불가능하고, 아직 완벽하게 익히지도 못한 거니까.”

그렇게 말하더니 리안은 카일이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베기 동작이다.

‘설마 진짜 그냥 베기를 보여 주려는 건 아닐 테고.’

그리 허무하게 끝내기엔 눈빛이나 행동이 너무 진지하다. 그에 카일 역시 침을 꿀꺽 삼키고 리안의 검과 자세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저 정도로 폼을 잡은 이상 뭐라도 있긴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이어진 리안의 검격을 본 카일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 찼다.

“뭐예요. 그냥 베기잖아요. 뭐, 전보다 동작이 훨씬 깔끔해지긴 했지만요.”

진짜 겨우 이걸 보여 주려고 그렇게 시간을 끌었던 건가? 카일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정작 리안의 표정은 덤덤했다. 아니, 오히려 기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행이네. 역시 아무리 네 눈이라 해도 한 번 보고 깨달을 정도로 수준 낮은 기술은 아니었구나.”

“네? 그게 무슨…….”

“한 번만 더 보여 줄 테니 제대로 봐. 나도 세 번까진 자신 없으니까.”

그리고는 다시 아까와 같은 동작을 취하기 시작한다. 역시 단순한 베기 자세다.

카일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가르쳐 줄 만한 게 없어서 허풍이라도 떠는 건가? 별로 안 그래도 되는데…….’

카일은 기술의 대단함만큼 순수한 힘의 중요성도 인정하고 있었다. 후자에서 정점을 찍은 리안을 무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로 판을 깔아 줬으면 반응은 해 줘야지.’

아까보다 의욕이 떨어지긴 하지만, 카일은 다시금 리안의 동작에 시선을 집중했다. 나름대로 존중의 표현이었다.

그런 카일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안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그저 무심하게 검 끝을 바라봤고, 부드럽게 팔을 내 뻗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후 시연이 끝난 순간.

“…….”

카일은 멍한 얼굴로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그냥 베기와 뭔가 다르다는 걸 눈치챘나? 일단 표정은 그런 거 같기는 한데…….

나는 멍한 얼굴의 카일에게 다가가 눈앞에 손을 흔들어 봤다. 하지만 녀석의 눈은 댕글댕글해 가지고 깜빡이지도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식물인간인 줄 알겠다.

“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릴리아가 황당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고 있다.

“글쎄. 아무래도 제대로 봐서 이러는 거 같긴 한데…….”

“뭘 제대로 봐요? 베기?”

“검사들만 통하는 그런 게 있어. 넌 몰라도 된다.”

“꼭 조금만 귀찮을 것 같으면 대충 얼버무리시고…….”

“꼬우면 네가 스승하든가. 설마 아까 가르쳐 준 게 정령술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내 말에 릴리아가 흠칫하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그냥 한 번 투덜거려 본 거 가지고 과민 반응하시긴! 전 이제 스승님이 해 보고 달이라 해도 믿을 자신 있어요. 스승님이 뭔가 봤다고 하면 뭐 본 거겠죠 뭐.”

“거 오바는 하지 말라니까…….”

나는 잠시 아직도 멍한 얼굴의 카일을 힐끗거렸다가 허리춤에 검을 수납했다.

“그보다 얘 좀 정신 차릴 때까지 보고 있을 수 있어? 나 잠깐 어디 갔다 오려고 하는데.”

“원래 엘프는 그런 거 잘해요. 시간을 세월아 네월아 보내는 거. 한 일주일 뒤에 눈뜬다 해도 버티고 있을 수 있어요!”

“그쯤 되면 네가 아니라 쟤가 못 버틸걸.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얘기 좀 해라.”

“그럼 그럴게요. 전 원래 말 잘 들으니까!”

싱글거리며 대꾸한 릴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어디 가시려고요? 오늘 할 일은 거의 다 끝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원래 예정은 없었는데, 시간도 남은 참에 까먹고 있던 것 좀 해결하려고.”

“까먹고 있던 거요?”

“그런 게 있어.”

나는 재차 얼버무리고 곧바로 훈련장을 나섰다. 딱히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다.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릴리아의 얼굴이 안 봐도 훤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으니까.

“후…….”

아니, 아무리 2부 주인공이라고 해도 저래도 되는 건가?

나는 거의 몇 개월을 아이언에게 맞아 가면서 간신히 배운 걸 겨우 두 번 본 것만으로 깨닫다니.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물론, 저런다고 바로 이 무영검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쓸 때 엄청난 양의 마력이 소모될 뿐더러, 아직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에너지도 같이 사라져 버리곤 하니까.

아마 지금의 카일로선 혼신의 힘을 다해도 한 번 정도가 최대겠지. 그것도 영 애매한 위력으로.

하지만 그럼에도 녀석의 재능이라면 뭔가 더 얻는 것이 있을 거다.

예를 들어 공간에 대한 개념이라든지 더 근본적인 검술에 대해서라든지. 정작 나는 쓰기만 할 줄 알고 정체도 모르는 그런 것들 말이다.

하여튼 재능충들 하고는. 꼭 사람을 이리 추하게 만든다니까.

잠시 그렇게 한숨 쉬다가, 짝짝, 양쪽 뺨을 쳤다.

그래. 방향이 조금 다를 뿐이지, 나도 딱히 꿀리는 건 없다. 애초부터 내가 기술로 승부 보는 타입은 아니지 않았나.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신체 능력과 세상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혼원력.

이게 나의 장점이란 걸 절대 잊어버려선 안 된다. 모로 가도 세기만 하면 되는 거지.

게다가 그 엄청난 재능을 가진 카일에 비해 내가 압도적으로 우월한 조건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계약서.

카일이 손수 체결한 계약서가 내 수중에 존재하는 한, 녀석은 절대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

뭔가 이러니까 미성년자 부려 먹는 악덕 사장이라도 된 기분인데. 생각해 보면 저 실력에 받을 수 있는 월급의 10분의 1조차 주지 않고 있으니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내가 처음부터 재능만 본다며 계약한 데다, 성장한 것도 거의 나의 지원 덕이다. 즉, 고용 개념보다는 투자 개념이 더 강했기 때문에 딱히 불공정 거래는 아니란 거지.

하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리 마음대로 되던가. 저것도 머리에 피 좀 마르고 나면 내심 속으로 불만이 생길지도 모른다.

역시 그러기 전에 월급을 올려 주는 게 최고겠지? 마침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자금 사정이 넉넉해서 그래도 별로 상관은 없었다.

나는 속으로 대체 얼마나 올려 줘야 하나 계산해 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원래 쉽게 얻은 건 쉽게 잊는 법.

선물도 절대 이유 없이 줘서는 안 되는 거다. 하물며 계약금까지 와서야…….

인상 타이밍은 내가 가르쳐 준 무영검을 완벽히 펼칠 수 있게 되었을 때로 하자. 그럼 나도 겸사겸사 옆에서 보며 기술에 더 능숙해질 수도 있을 테니까.

나는 좋은 교본 하나 얻어서 좋고, 카일은 월급이 올라서 좋고. 이런 게 상부상조 아니겠나. 정말 완벽한 방안이다.

만족스럽게 웃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가 보였다. 나는 곧바로 문에다 노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타냐, 방에 있어?”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