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92)
며칠 뒤, 나는 내가 얻은 권능에 대해서 대부분 다 파악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있는 ‘붕괴’에 한한 거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하루에 10회. 그리고 출력은 원본과 같음. 그 외에 자잘한 것들도 있지만, 크게 보면 대략 저 정도다.
“이것저것 걸리는 게 있기는 하지만…… 역시 사기는 사기야.”
만족스레 뇌까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다른 사도들의 능력까지 같이 사용할 수 있으면 진짜 그만한 게 없을 텐데.”
그것까진 너무 욕심이겠지. 원하는 능력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제 몫은 하는 셈이니까.
아쉬움에 혀를 차면서 훈련장을 나섰다.
어차피 지금 조건으론 더 이상 실험할 만한 게 딱히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권능’은 딱히 연습한다고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기술들과 연계하려면 익숙해지는 편이 좋긴 하겠지만, 오늘은 이미 횟수를 다 썼다.
그렇게 잡생각을 하다 보니 얼마 걷지 않아 식당에 도착했다. 조금 늦었는지 내 자리를 제외하곤 벌써 가득 차 있다. 조용히 가서 앉으니 곧바로 음식이 서빙됐다.
카일의 어머니이자 저택의 요리사, 릴리가 살포시 웃었다.
“이 시간에 오는 건 처음이시네요. 항상 늦게 오시더니.”
“밀린 일이 워낙 많아서 바빴는데, 얼추 해결이 되어서요. 그동안 계속 같은 일 두 번씩 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아뇨, 별말씀을. 이게 제 일인걸요. 편할 때 오셔서 드셔도 돼요. 저는 그냥 조금 안타까워서…….”
그러고 보니 돌아오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랑 밥 먹는 건 처음이던가.
우투레와 나갔던 건 예외다. 밥 먹는 시간보다 싸우고 정리하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까.
“별로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혼자 먹는 게 익숙하기도 하고.”
“저는 리안 님이 안쓰럽단 게 아니라 다른 분들 얘기한 건데…….”
“다른 사람이요?”
“네.”
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랜만에 돌아오셨는데, 정작 얼굴 보기도 힘드니 다른 분들이 식사할 때마다 얼마나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이게 같은 집에서 사는 사람 맞냐면서.”
이게 무슨 낯간지러운 소린가 했는데, 슬쩍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전부 밥은 안 먹고 나만 바라보고 있다.
내 집 식당에 내가 온 게 어느새 이렇게까지 신기한 일이 된 건가.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수저를 들어 올렸다. 금방 또 나갈 거 같다는 말은 나중에 하는 게 좋겠다.
“앞으로는 더 자주 들르도록 할게요. 그보다 카일 릴리아는 조금 이따 나 좀 보자.”
둘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일인지 짐작도 안 간다는 표정이다.
“뭘 그리 놀래? 그냥 어머님 말 들어 보니 그동안 내가 전체적으로 너무 무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오랜만에 간단하게 훈련이나 좀 시켜 줄게.”
이번에는 둘의 얼굴이 천지 차이다.
릴리아는 당장 화색이 돈 데 반해 카일은 과장 조금 보태 ‘네가?’라는 표정이다.
하긴, 내가 가르침을 주기는커녕 받은 입장이니 저런 반응도 당연하려나.
나는 굳이 뭐라 설명하지 않고 말없이 수프만 떠먹었다.
* * *
‘대체 뭘 가르쳐 준다는 거지?’
순순히 훈련장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카일은 계속해서 드는 그런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리안 형이 강하다는 건 안다. 허접하던 검술 실력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결국 그 원천은 압도적인 힘과 마력의 질이었고, 테크닉은 그리 대단치 못했다. 적어도 카일의 기억에는 말이다.
보법이야 떠나기 전 익히던 무영보가 있기는 하지만, 카일은 그걸 배우고 싶은 생각이 개미 눈곱만큼도 없었다.
‘사람 하나 광인 만들기 딱 좋은 무술이지.’
움직임 하나하나를 전부 계산하고 행해야 한다니. 그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냔 말이다.
‘……물론, 그걸 성공한 당사자가 바로 근처에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혹시 무영보를 가르쳐 주겠다 하는 거면 그냥 거절하고 나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야!”
릴리아가 숨을 헐떡이며 카일의 옆까지 달려왔다. 그녀는 원망스런 눈으로 카일을 노려보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왜 그렇게 먼저 가는데? 스승님이 분명 둘이 같이 오라고 했잖아!”
“나중에 보자고 했지, 같이 오라는 말은 없었어요.”
솔직히 카일은 릴리아가 조금 불편했다.
이종족을 별로 접해 보지 못했기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실제 나이가 몇인지 이미 들어 알고 있어서다. 예순다섯. 볼 때마다 존댓말을 해야 할지 반말을 해야 할지 헷갈린다.
거기에 다른 이유도 하나 더 있었다. 릴리아와 릴리. 어머니와 이름이 너무 비슷하다. 이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또 나이가 걸린다.
‘분명 어머니가 서른둘밖에 안 됐는데…….’
이건 이제 그냥 할머니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릴리아가 조금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치만 나 아직 여기 집 구조 다 못 외웠단 말이야. 그럼 네가 나 좀 같이 데려다줄 수도 있는 거잖아.”
“……그건 제가 죄송해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카일의 사과를 받은 릴리아가 곧바로 표정을 풀었다.
그녀 입장에서 인간의 나이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끽해야 100살까지밖에 못 사는 종족 아니던가. 10살이든 80살이든 겉모습이라도 비슷해 보이는 쪽이 차라리 더 마음 편했다.
“지금이라도 사과했으니 됐어. 그보다 내가 존댓말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 우리 알고 보면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난다니까?”
“전 이제 겨우 열일곱밖에 안 됐는데요.”
“그러니까! 나도 이제 겨우 예순다섯밖에 안 됐어!”
카일은 거기서 대화를 이어 가길 포기했다. 이건 설명한다고 좁힐 수 있는 상식의 간격이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훈련장으로 향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릴리아 님도 검사였어요? 보통 엘프는 마법사나 정령사가 더 많다고 들었는데.”
“님?”
난생 처음 들어 보는 호칭에 릴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카일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니. 나는 검사 아닌데. 대신에 마법이랑 정령 둘 다 쓸 줄 알아. 대단하지?”
“근데 리안 형한테 대체 뭘 배운단 거예요? 리안 형은 그 둘 다 사용하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스승님은 정령술의 달인인데?”
“……네?”
“혹시 몰랐던 거야?”
카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2년 전까지는 리안이 마법은 물론 정령술을 쓸 수 있다는 소문조차 못 들어 봤다.
둘은 서로 과거 이야기를 나누며 인식의 간격을 좁혀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화가 전부 끝났을 때 릴리아는 두 눈을 밝게 빛냈다.
“역시! 스승님은 천재일 줄 알았다니까! 겨우 2년 만에 중, 상급 정령술사라니! 나는 하급 터득하는 데만도 10년은 걸렸는데!”
“그 ‘정령왕의 약속’인지 뭔지 하는 거 때문 아니에요?”
“뭘 모르는 소리! 아무리 정령왕의 약속이래도 보통 2년 만에 그 수준까지 도달하는 건 불가능해. 거기다 정령친화력이 낮은 인간은 더더욱.”
“흐음…… 그래요?”
카일이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어차피 본인이 배울 수 없는 정령술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던 탓이다. 덕분에 신기함보다는 오히려 실망이 컸다.
‘혹시나 그동안 검술에라도 열중했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네.’
이래서야 대체 누가 누굴 가르쳐 준다는 건지.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생각을 반복하며, 카일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 * *
“형, 저희 왔어요.”
“어, 거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오는 거야 한참 전부터 이미 눈치챘는데, 마침 근력 운동을 하고 있던 참이라 중간에 끊기가 애매해서다.
다음에는 시간을 정확하게 지정하든가 해야지 이거 불편해서 원…….
속으로 투덜거리며 들고 있던 흑철석 바벨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후우…….”
이제 물리적인 수련으로는 딱히 변하는 것도 없는데, 이것도 습관인가. 안 하면 뭔가 몸이 쑤신다니까.
나는 바벨을 구석에 슬쩍 굴려 버리고 뒤를 돌았다. 비교적 깔끔한 땅바닥에 둘이 얌전히 쭈그리고 앉아 있다.
“따로 올 줄 알았는데 의외네?”
“여기 카일이 안내해 줬어요. 아직 훈련장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지 않냐면서. 친절하죠?”
카일이 그랬다고? 아닌 것 같아도 은근 낯가리는 녀석이라 그랬을 거 같지는 않은데.
아니나 다를까, 슬쩍 녀석의 얼굴을 보니 당황이 한가득이다. 역시 거짓말이구나.
딱히 무안하게 만들려고 한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카일은 그걸 불편해하는 중이고.
두 쪽의 입장 모두 이해는 갔다.
릴리아는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와서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카일이 편하지만, 정작 카일은 릴리아의 속 나이가 걸리는 거겠지.
나도 비슷한 딜레마에 빠져 봐서 안다.
스승님 호칭이 부담스러워서 다른 거로 부르라 하려고 했더니 짚이는 게 없는 거다.
오빠는 진짜 아니고, 아저씨는 기분 나쁘고, 반대로 녀석이 동생 취급하는 건 내가 열 받을 거 같고.
하여튼 인간 입장에서 장수종을 상대하는 건 상당히 거북한 일이란 소리다. 한 살 차이만 나도 존댓말 해야 하는 동방예의지국 출신이라면 더욱더.
나는 피식 웃으며 그냥 넘겼다. 별로 내가 끼어들 문제도 아니었으니까.
“카일이 원래 좀 친절하긴 하지. 여자에 한해서라 문제기는 하지만.”
“제가 대체 언제…….”
“그보다 이만 훈련이나 시작해 볼까? 누가 먼저 배울래?”
“저요!”
릴리아가 거세게 팔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요, 저 정령술부터 가르쳐 주세요!”
“뭐, 좋아. 카일은 조금 기다려야 할 거 같은데, 괜찮겠어? 솔직히 둘이 따로 올 거라 생각해서 시간 배분은 생각도 못 했거든.”
“……네. 그냥 이대로 돌아가도 상관없을 정도예요.”
“그건 안 되지. 조금만 기다려. 최대한 빨리 끝내 볼 테니까.”
살짝 삐진 듯한 카일을 달래고 릴리아를 중앙으로 불러냈다.
“저번에 정령술은 의지의 기술이란 건 설명해 줬지? 마음먹은 바에 따라서 같은 기술도 완전히 다른 식으로 써먹을 수 있다고.”
“네! 엄청난 명강의였어요!”
얘는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아부가 입에 달라붙은 거지.
“강의야 어쨌든, 그건 결국 요령에 불과한 소리일 뿐이었지. 진짜는 정령의 수준을 어떻게 올리는지, 그에 따른 기술은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 하는지 아니겠어?”
“그것도 그렇긴 하죠.”
“그러니까 오늘은 정령술의 이론에 대해서 전부 가르쳐 줄게.”
나는 리베라를 소환시키며 근처의 칠판을 끌고 왔다.
“꽤 긴 얘기가 될 테니 못 외울 거 같으면 공책이라도 꺼내 두는 게 좋을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