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90)
꼬맹이의 말에 우투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문객들의 신 아몬드? 그게 뭐지? 혹시 먹는 건가?”
“우투레, 넌 잠시 조용히 있어라.”
“알았다.”
말은 잘 들어서 좋다. 잘 알아듣진 못하는 게 문제지만.
어쨌든 나는 우투레를 얌전하게 만든 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몬이라는 신은 처음 들어 보지만, 사도쯤 되는 게 이 도시에는 대체 무슨 볼일이지?”
“응? 내가 사도라는 거 바로 믿는 거야? 보통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호통부터 치는데. 물론 그런 놈들은 다 손수 죽여 줬지만.”
……젠장, 실수했다.
저 녀석이 아몬의 사도가 맞다는 걸 전제 조건으로 알고 있어서인가? 보통 저런 꼬맹이가 본인이 사도니 뭐니 하면 의심부터 하는 게 정상일 텐데.
나는 서둘러 심드렁한 표정을 꾸며 냈다. 그냥 귀찮은 꼬맹이 허풍에 맞춰 준다는 듯이.
“본인이 그렇다는데 그런 거겠지 뭐.”
“흐음…… 너 안 믿는구나? 영 건방지지만…… 마침 기분이 좋으니까 한 번은 봐줄게!”
녀석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리를 흔들었다.
“그보다 나는 여기 리안이라는 녀석을 찾으러 왔어. 혹시 알아?”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누군지 아는 거냐고 묻는 거라면, 알아. 아마 여기 있는 누구에게 묻더라도 똑같은 대답이 나올 거다.”
“아, 유명인이라는 건 알고 있어. 특히 여기 레이튼에서는. 내가 묻는 건 어디 있는지 아냐 이거야.”
“글쎄. 며칠 전에 돌아왔다고 들은 것도 같기는 한데…… 그 뒤는 잘 모르겠군. 소식이 안 들리는 걸 보면 또 밖으로 나간 거 아닌가? 원래 그분은 방랑벽이 심해서 도시보다 외부에 있는 경우가 더 많아.”
“흐응…… 그래? 그런데…….”
꼬맹이가 갑자기 흔들던 다리를 멈추고 피식거렸다.
“본인에 대해서 본인이 직접 설명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 쪽팔리진 않아?”
이 빌어먹을 자식이…….
떠보는 게 아니다. 분명 내가 리안이 맞다 확신하고 있는 눈이다. 처음부터 알면서 날 가지고 놀았다는 뜻이다.
나는 혀를 차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사실 상회 건물에서 나올 때 슬쩍 봤거든. 저기 덩치 큰 놈이랑 붙어 있는 거. 갑자기 골목길로 들어가나 싶더니 외모가 완전히 달라져서 나오길래 조금 헷갈리긴 했지만.”
“……상회부터 따라붙었었다고?”
“응. 아, 너무 자괴감 느끼진 마. 내가 원래 기척 감추는 건 꽤 자신 있거든. 그래도 아닌 척 연기하는 건 좀 웃겼어.”
나는 녀석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코드를 띄웠다.
눈도 피곤한 데다 기척 감지 훈련도 할 겸해서 없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 벌어질 줄 알았으면 그냥 켜고 다닐 걸 그랬다.
“그래서, 아몬의 사도가 나를 찾은 이유는 뭐지? 암살 의뢰라도 받았나?”
“아니. 의뢰 같은 건 없었어.”
녀석이 씨익 웃더니,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그냥 내가 너를 죽이고 싶어서 찾아온 거거든.”
* * *
아몬은 어느 순간부터 방문객들의 신이 아니라 암살자들의 신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된 녀석이다. 30년 전 새로운 교황이 즉위한 이후로 내부가 교리를 악용하려는 녀석들에게 먹혀 버렸기 때문이다.
예전에 바이론이 녀석들을 이용해서 나를 해치려 들기도 했었는데, 그때 나는 그걸 역이용해 그들 내부에 분란의 씨앗을 심어 두었다.
바로 내게 찾아온 암살자 나비드한테 현재 교황은 아몬을 믿지 않는다고 속삭인 거다.
그런데 거기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정상적인 스토리대로라면 이 녀석은 지금 여기 등장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나를 죽이고 싶어 찾아왔다라……. 이유는? 딱히 그쪽이랑 척질 만한 일은 한 기억 없는데.”
내 말에 꼬맹이가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지? 나비드 장로한테 헛바람 집어넣은 게 너잖아?”
역시 그쪽인가.
연관될 곳이 그쪽밖에 없긴 했다만, 조금 입맛이 쓰다. 잘하면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사도가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내분은 이미 다 정리했나 보지?”
“역시 노리고 한 짓이었구나. 하긴, 신전 내부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런 짓거리는 할 수 없는 법이니까.”
어깨를 으쓱인 녀석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맞아. 얼마 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겠다며 반란을 일으킨 장로 나비드를 진압, 숙청까지 완료했지. 덕분에 우리 교단의 인원이 거의 절반은 줄어 버렸어. 아, 참고로 그 대부분은 내가 직접 죽였다? 나비드도 포함해서.”
“사도라면 아몬이 직접 임명한 존재일 텐데, 어째서 교황의 편을 드는 거지? 지금 녀석이 아몬을 믿지 않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유는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확인 차 물었다.
사실 이 녀석이 교황 쪽에 붙을지 나비드 쪽에 붙을지는 딱 절반의 확률이라 봤으니까. 어디를 선택해도 이상하지 않을 놈이었다.
“그야, 교황 쪽에 붙는 게 더 재밌어 보였거든.”
꼬맹이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30년 전까지의 아몬교는 너무 지루했어. 재밌긴 지금이 더 재밌지. 어차피 사도직은 줬다가 뺏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 멋대로 하면 그만이잖아?”
“30년 전? 인간, 이 인간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우투레 눈에 이 인간은 고작 10살 남짓으로밖에 안 보인다.”
궁금증을 참지 못했는지 조용히 있던 우투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꼬맹이가 그쪽을 슬쩍 보더니, 갑자기 손을 뻗었다.
“인간은 맞는데, 10살은 아니야. 암살하기엔 이것만큼 편한 모습이 없어서 유지하고 있을 뿐이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야.”
나는 녀석의 말이 끝나는 즉시 우투레의 팔을 끌어 근처로 던져 버렸다. 그러길 얼마 지나지 않아, 우지끈. 우투레가 앉아 있던 근처의 책상과 바닥이 괴상한 모양으로 꼬여 버렸다.
아몬의 사도가 되면 가질 수 있는 ‘붕괴’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일정 공간을 일그러뜨릴 수 있는 능력.
“꺄아악!”
“저, 저게 무슨 일이야!”
가게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처음엔 날아간 우투레만 신경 쓰던 사람들이 뒤이어 터진 원인 모를 현상에 경악성을 터뜨린 거다.
나는 그 모습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놀라는 것도 좋지만, 대응이 늦다.
벨리아 대륙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건 인지를 초월한 상황이란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리베라를 소환해 그들을 전부 내보내려는 순간,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재빨리 손을 뺐다.
우지직.
“와, 그걸 피해? 대단한걸. 듣기로는 겨우 나비드 상대로도 아무것도 못 하는 실력이라 했었는데에.”
고개를 돌렸다. 빌어먹을 꼬맹이가 한 손을 뻗은 채 감탄하고 있었다.
“정보가 잘못된 건지, 그 믿지 못할 소문 이상으로 성장이 빠른 건지……. 아무튼 저 인간들 대피시킬 생각이면 포기하는 게 좋아. 나는 싸울 때 관객이 있는 편을 선호하거든.”
“그렇다고 본인이 처참하게 처발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진 않을 텐데?”
“오, 난 그런 자신감 넘치는 모습도 좋아해. 뭔가 생동감 있거든.”
그러더니 녀석이 반대쪽 손을 뻗어 왔다.
“역시 상대가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나야 죽이는 맛이 좀 있지 않겠어?”
우직. 우지직.
곧바로 내 양옆의 공간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나는 재빨리 몸을 앞으로 박찼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녀석을 상대로 거리를 벌리는 건 하책. 가능할 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야 한다.
하지만 그때,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설마 내가 사도 능력밖에 못 쓸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
순간, 녀석의 주위에 숫자들이 떠올랐다. 6성급 공격 마법 두 가지다. 결국 나는 좁힌 거리 이상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내가 있던 자리의 가구들이 파편으로 변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빠르게 리베라를 소환해 바람을 생성했다.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을 노리던 파편들이 그들의 바로 코앞에서 멈췄다.
다친 건 아무도 없나?
살짝 확인해 보려는데, 앞에서 짝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뭐야, 들은 것보다 훨씬 대단하잖아! 거의 내가 마법사라는 걸 미리 알고 있는 듯한 반응속도였어! 이 콤보를 피한 건 50년 동안 열이 채 안 됐는데…… 거기다 그 와중에 관객들을 지키는 여유까지!”
“아가리 좀 그만 놀려라. 50 넘게 처먹은 노인네가 꼬마 흉내 내는 거 역겨우니까.”
나는 차갑게 내뱉으며 생각했다.
거리를 좁히면 메모라이즈한 마법이 날아올 거란 건 이미 예상했다. 원래 사도가 되기 전에는 꽤 이름난 마법사였던 녀석이니까.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마법은 사용할 수 없을 거다. 사도가 된 이후론 자만심에 가득 차 마법을 두 개밖에 저장해 두지 않는단 설정이 있으니까.
즉, 이제 놈에게 남은 건 사도로서의 능력뿐이란 소리다. 그리고 녀석이 가진 ‘붕괴’는 조금 까다롭긴 해도 충분히 피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즉발인 것 같지만, 완전히 발현되기 전에 전조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주위 공간의 울렁거림.
이것만 주의하면 된다.
그런데 그때,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녀석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이거 심한데.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상처받는 말은 있는 법이라구.”
“……너, 무슨 속셈이지?”
“하! 그것까지 눈치챈 거야? 진짜로 대단한데!”
녀석은 또 한 번 웃더니, 양손을 뻗었다. 내가 아니라, 우투레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암살자란 건 이미 알고 있지? 그동안 이 짓 하면서 너 같은 놈 많이 봤거든. 위선자라고 해야 하나?”
“…….”
“아, 그걸로 뭐라 비난하는 건 아니야. 오히려 존경하지. 어쨌든 일단 나의 패배를 인정할게. 솔직히 네가 이렇게나 강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그런데 내가 너는 몰라도 저 녀석들 정도는 죽일 자신 있거든? 어때? 그만 얌전히 갈 테니까 그냥 보내 주는 건?”
내가 무조건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지 안색이 태연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람을 조종해 주변의 소리를 차단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여.”
“……뭐?”
설마 내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지 녀석이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을 했다.
“허세 부리지 마! 전투 와중에도 사람들 보호해 줄 정도로 착한 척하던 녀석이 이렇게 쉽게 사람들을 버린다고?”
“너를 이번에 죽이지 못하면 나중에 더 큰 희생을 치를 거라 판단했다. 만약 다시 부딪히면 또 똑같은 수법으로 나올 게 확실하기도 하고. 그러니 널 절대 보내 줄 생각은 없어.”
“내가 죽이려는 놈 중에는 네 동료도 있어!”
“우투레라면 비교적 내 근처에 있지. 둘 다는 무리여도 저 녀석 하나 정도는 구할 자신 있어.”
나는 그쪽과의 거리를 가늠한 뒤, 얼굴을 굳힌 녀석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그만 포기해라.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여기서 죽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