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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89화 (189/225)

너의 코드가 보여 (189)

처음부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설정상 거인족에게 본인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습관 같은 건 없었으니까. 그냥 특이한 말버릇이니 하고 넘어갔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멀뚱멀뚱 서 있는 우투레를 바라봤다.

그래. 선천적으로 머리가 나쁜 게 죄는 아니지. 신체의 재능을 받고 지능을 재물로 줬다 하면 일견 공평해 보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대로 두는 건 확실히 문제다.

사람 얼굴은 익히는 거 같으니 이름 못 외우는 거야 그렇다 쳐도, 인간족 관습이나 예절 같은 건 분명히 익혀야 하는 부분이니까.

조금 고민하다가 물었다.

“우투레, 너는 사람 이름을 외우는 것만 어려운 거냐, 아니면 모든 단어 익히는 게 똑같이 어려운 거냐?”

“우투레, 똑같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럼 지금 쓰는 단어들은 전부 어떻게 익힌 거지?”

정말 5시간 동안 ‘한스’ 하나 못 외울 정도면 애초에 대화도 못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지금 우투레는 어수룩하게나마 말을 하고 있지 않나. 분명 뭔가 방법이 있었겠지.

우투레는 갑자기 몸을 떨더니 눈을 아래로 깔았다.

“우투레 말하는 거 족장이 가르쳐 줬다.”

“족장이? 교육 방법은 어떤 식이었지?”

“익히지 못할 때마다 우투레를 때렸다.”

“…….”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거인족은 몸으로 하는 대화가 일상적인 놈들이다. 다른 종족 입장에서 보면 과격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런 종족의 입에서 ‘때렸다.’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면 인간 기준의 훈육 차원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 자명했다. 아마 애 잡는 수준으로 줘 팼겠지.

그렇게라도 해서 얘가 사람 구실하게 만든 걸 칭찬해야 하나, 학대라고 비난해야 하나?

어느 쪽인지는 나도 확언하지 못하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적어도 내 스타일은 아니라는 거.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마자 곧바로 근처의 상회 직원을 불렀다.

“예. 성자…… 상회주님. 뭐 지시할 거라도 있으십니까?”

“근처 제 집무실에 가면 밀린 일거리들이 좀 있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그것들 좀 제 집까지 옮겨 주실 수 있겠습니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그런데 업무를 집에서 보시려고요?”

“네. 지금 처리하기 힘들 거 같아서 자는 시간을 좀 쪼개야겠습니다.”

내 말에 직원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회주님이라면 보통 사람이 열흘 걸릴 일을 하루에 끝낸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밀린 일거리가 그렇게나 많은가 보죠?”

“많은 것도 많은 건데, 그것보다 시급한 문제가 생겨서 그렇습니다.”

“시급한 문제요?”

“네.”

나는 주눅들어 있는 우투레를 일별하고 말했다.

“제가 책임져야 할 게 조금 있어서요.”

* * *

우투레를 끌고 도착한 곳은 근처의 식당이었다. 부수적으로 주점도 겸하는 곳이었는데, 요즘 좀 살맛이 났는지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자리를 절반쯤 채우고 있다.

나는 가게 밖 창문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머리를 툭툭 쳤다. ‘타른헬름’이 있는 부분이다.

단테로 활동할 땐 하루 종일 끼고 살던 건데, 오랜만에 착용해서 그런가. 영 어색하다. 감촉도 무게도 형체도 없는 녀석이 뭔가 있다는 느낌은 들게 만들어서 이상하다고 할까.

원래는 이런 느낌이 크게 들지 않았다는데…… 어쩌면 그때보다 내 기감이 훨씬 발달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또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결국 내가 성장한 덕에 이런다는 거 아니겠나.

나 좋을 대로 확정 짓고 피식 웃는데, 잠시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타냐한테 내 감각을 어떻게 피한 건지 안 물어봤네. 분명 푸른 혈맥 각성해서 생긴 능력 같은데.

혹시 우투레와 비슷한 은신인가?

그때 일만 놓고 보면 이게 가장 가능성 높기는 하다.

조금 수수하기는 하지만, 원래 푸른 혈맥의 능력이 항상 강력한 쪽으로 발현하는 건 아니다. 사실 사람의 정신에까지 영향을 주는 능력을 각성한 바이론이 특이한 편이지.

“음…….”

조금 고민하다가, 그만 고개를 털어 버렸다.

그냥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뭐. 보통 기밀에 해당하는 사항이기는 하지만, 나한테 그 정도는 알려 줄 거다. 애초에 나는 그보다 훨씬 극비인 황녀의 생존이나 1기사단 잔존 여부까지 알고 있으니까.

서로 한배를 탔다고 하긴 뭐해도 그 옆에 붙어 있는 동행자는 될 거다.

어쨌든 잠시 딴 길로 샜던 궁금증은 나중에 처리하도록 하고, 지금은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나는 우투레를 이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우지끈.

우투레의 어깨에 걸린 문짝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부서졌다. 그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입구가 세 배는 넓어졌다.

이젠 입구라기보다는 그냥 구멍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는 하겠지만.

우투레는 팔을 슥 빼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투레 잘못이 아니다. 문이 너무 작은 것뿐이다. 이곳은 난쟁이들의 나라인가?”

“……변명은 됐다. 내 잘못이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게 주인에게 사과했다. 수리비에 덤까지 얹어 두둑이 쥐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얘 능력이 존재감을 없애는 거라 그런가, 덩치가 산만 하다는 걸 자꾸 까먹는다.

이 녀석이 들어갈 만한 식당이라고 해 봐야 내 저택 정도인데, 앞으로 외식은 꿈도 못 꾸겠네.

아무튼, 이래서야 내 두 번째 목표는 날아갔다고 생각하는 게 이롭겠다.

만약 내가 옆에 안 붙어 있으면 주민들이 이종족을 어떻게 대하나 좀 보고 싶었는데, 이런 민폐면 이종족이 아니어도 차별하지 않겠나.

그리 생각하며 내부를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보는 눈들이 곱지는 않다.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가 앉았다. 일단 온 거 무라도 썰어야지 하는 심정이었다.

그때, 홀을 돌아다니던 종업원이 매우 싫은 기색으로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주, 주문은 어떻게…….”

팔이 떨리는 정도를 보아하니 21세기 진동벨이 여기까지 전파됐나 싶다. 이러다 실신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제일 빨리 되는 거로 20인분을 주문하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정면으로 고개를 향했다.

“우투레. 식사를 할 때는 의자에 앉아야 한다. 그게 인간들의 예의지.”

“의자에 앉은 거다. 우투레 앉자마자 깔려서 부셔졌다.”

“그런가. 다음부턴 그냥 바닥에 앉아라.”

안 되는 건 빠르게 포기했다.

“내가 왜 여기까지 데려왔는지는 아나?”

“우투레에게 밥을 사 주기 위해서 아닌가?”

“그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더 크다. 한번 생각해 봐라. 여기 오기 전에 있던 일을 떠올려 보면 한결 쉬울 거다.”

“음…….”

우투레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아, 하며 손바닥을 쳤다.

“생각났다!”

“좋아. 이유가 뭐지?”

“우투레에게 술도 사 주기 위해서다!”

나는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거지?”

“우투레 여기 오기 전에 우울해했다. 그러니 위로해 주려고 부른 거 아닌가?”

“흠…….”

생각보다는 희망적이다. 기억력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앞뒤 상황 판단 능력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니까. 일단 본인이 시무룩해서 술을 사 줘 위로해 주려 했다는 것까지는 추론하지 않았나.

뭐, 정작 내 목적이 그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할 거다.

“우투레, 내가 너를 여기 데려온 건 경험시키기 위해서다.”

“경험 말이냐?”

“그래. 너한테는 이론으로 학습시키는 것보다 직접 상황을 겪게 해 주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군.”

우투레가 전혀 알아듣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침 종업원이 다가와 접시 네 개를 놓고 잽싸게 사라졌다.

좋은 기회다.

나는 곧장 거기로 손을 가져다 대는 우투레를 제지했다.

“우투레, 인간은 식사할 때 수저를 쓴다. 너도 앞으로는 그러는 편이 좋을 거다.”

“하지만 수저는 내게 너무 작다. 손가락으로도 집을 수가 없다.”

“조금만 기다려라.”

주방에서 국자와 집게를 빌려와 녀석에게 건넸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다.”

“이것도 불편…….”

“참아라.”

우투레는 우울한 표정을 했다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우투레 참겠다. 인간의 방식 배워야 하는 거, 공감한다.”

“다음에 잊어버리진 않겠나?”

“우투레, 당연히 기억할 수 있다.”

“흠……. 그래?”

자신만만해 보이긴 하는데, 딱히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아까 한스보고 행크라 할 때도 저런 표정이었어서 그런가.

어쨌든 지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이론을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현장을 겪게 하는 거. 원래 그런 게 더 기억에 잘 남는 법 아니던가. 적어도 때려서 가르치는 것보단 효과적일 거라 믿고 싶다.

나는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계속 주변을 가리키며 우투레에게 이런저런 걸 알려 줬다. 녀석이 필수적으로 익혀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인간들은 거인족과 달리 술 한 잔 마실 때마다 상대의 팔을 치지 않는다든지, 식사 내기로 상대에게 상해를 입히는 종류는 고르면 안 된다든지 하는 거.

사실 인간들끼린 그렇게까지 문제 될 행위는 아니지만, 얘가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상대가 다음 날 보게 될 건 본인의 관짝일 테고, 얘가 아침에 일어나게 될 장소는 감방이 되겠지.

어쨌든 그렇게 한참 인간들이 얼마나 작고 소중한지를 주지시키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데에…….”

입구의 문…… 구멍에서 금발 머리 소년 하나가 뒷짐을 진 채 가게로 들어왔다.

겉으로 보기엔 대충 10살 전후에 불과한데, 옷차림이 고급스럽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노블레스라고 하기에는 복장 형식이 많이 다르다.

굳이 따지자면…… 그래, 신관. 내가 키탄 본청에서 받았던 신관용 양복과 비슷해 보인다. 저건 그와 반대로 새하얗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타지의 신전에서 파견한 꼬맹인가? 요즘 레이튼이 발전하면서 추가로 인원 투입하는 신전이 많으니 이상한 건 아닌데……. 그렇게 넘기기엔 조금 찜찜하다. 대체 왜지?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이유를 생각했다. 그리고 금방 그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눈동자.

분명 나이에 걸맞게 천진난만한 눈동자인데, 어딘지 모르게 잔혹해 보인다. 어린아이가 웃으면서 벌레를 죽이는 것과 같은 순수함이라 해야 하나.

잠시 코드를 열어 누군지 확인해 보려는데, 녀석이 종업원을 무시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 여기구나! 이상한 느낌.”

“……이상한 느낌?”

“응! 정확히는 네 머리 쪽에.”

……내 머리 쪽?

설마 이 꼬맹이가 ‘타른헬름’의 기척을 눈치챘다는 건가? 나도 오늘에야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걸?

그럴 리가 없다고 넘기기에는 짚은 곳이 너무 정확하다.

나는 살짝 긴장한 채 물었다.

“너는 누구지?”

“응? 나? 음…… 어떡하지? 장로님이 알려 주면 안 된다 했는데에…….”

“그럼 됐다. 어른 말은 잘 들어야지.”

10살의 금발 남자 꼬맹이, 말끝을 흐리는 습관, 새하얗고 화려한 신관식 복장.

코드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슬슬 짐작 가는 녀석이 있었다. 엮여서 좋을 놈은 아니다.

대충 대꾸해 주고 자리를 뜨려는데, 꼬맹이가 갑자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에이, 그래도 누가 뭐 물어보면 성실히 대답해 줘야 한다는 말도 같이 했었으니 괜찮을 거야. 뭐, 아니다 싶으면 그냥 나중에 여기 있는 거 다 죽이면 되고.”

아무렇지 않게 잔인한 말을 내뱉은 녀석이 씨익 웃었다.

“안녕? 나는 방문객들의 신, 아몬의 사도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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