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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88화 (188/225)

너의 코드가 보여 (188)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충성 맹세가 끝난 후, 1기사단원들은 곧바로 나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했다. 갑자기 ‘네, 네.’ 하는 예스맨으로 변한 거다.

“프리우스 경.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알겠지만, 일단은 자경단에 철저한 협력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냥 이웃을 돕는다 생각하셔도 되고요.”

“예. 그러겠습니다. 그보다 말투는 그 전처럼 반말로 괜찮습니다만…….”

“저는 이쪽이 더 편합니다.”

여지를 주지 않게 단호히 말했다. 실제로도 존댓말이 더 편했으니까. 오히려 그전에 기사단원들 상대로 반말을 내뱉은 것이 내 성정과 맞지 않았지.

그럼에도 그랬던 것은 딱 봐도 날 무시하는 게 보였기 때문인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않나. 태도만 보면 지금 당장 세 왕국에 쳐들어가라고 해도 바로 따를 거 같구만.

아, 이건 내가 내리는 명령이 아니어도 똑같았으려나?

어쨌든, 굳이 강해 보이려고 허세를 부릴 필요는 없어졌다는 소리다. 겁먹은 개가 더 요란하게 짖는 꼴이랄까.

그때, 프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부단장님과 비슷한 타입이신가 보군요.”

부단장이라면 클라우스를 말하는 거다. 상대가 애든 어른이든 무조건 존댓말 하는 녀석.

난 그쪽과 달리 사람을 가리지만, 굳이 얘기할 건 없겠지.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나는 앞으로의 기사단 지침을 간략하게 추려 지시한 뒤, 프리우스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입구의 두 사람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황녀님과 단장님을 뵙습니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워 죄송합니다.”

“괜찮네. 자네도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지. 그만큼 성장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

“사정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카르도에게 대충 인사치레를 한 뒤 조용히 기다렸다. 이제 타냐가 칭찬이든 질책이든 간단히 발언할 차례이기 때문이다. 황실의 예법 같은 거라고나 할까.

내가 딱히 제국의 신하는 아니지만, 타국의 고위 관료에게 어느 정도 관례를 지켜 주는 거라 보면 된다.

아무튼 그렇게 한참을 고개 숙이고 있는데…… 이게 뭘까.

뭐가 문젠지 간단한 인사말이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는다.

뭔가 잘못된 건가?

분위기가 살며시 어색해질 때쯤 슬쩍 고개를 틀어 타냐의 얼굴을 살폈다. 녀석은 입을 지그시 다문 채 떨리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것만으로 저런 반응은 아닐 테고, 혹시 말하려다가 혀라도 깨문 건 아니겠지.

다시 한 번 입을 열려는 순간, 리카르도가 한숨을 내쉬며 먼저 끼어들었다.

“무례를 용서하게. 황녀님께서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으셔서 말이야.”

“아, 그러시군요. 그럼 일단 포션이라도…….”

“포션이 무슨 자양강장제인 줄 아는가? 괜찮네. 어디 다치신 건 아니니까.”

글쎄. 입안이 다친 걸 숨기고 있는 걸 수도 있지 않나? 방금 희미하게 아랫입술에서 피나는 걸 본 것도 같은데.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문득 다친 것보다 다친 걸 공표하는 게 더 싫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다. 원래 아픈 것보다 쪽팔리는 게 더 싫지 않나.

“그러면 곧 집에 도착해서 다시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새로 생긴 동료들도 소개를 해야 하니까요.”

“새로 생긴 동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부딪힐 일이 꽤 많을 겁니다.”

* * *

“……상당히 개성 강한 동료들을 만들었네.”

오랜만에 돌아온 식당 안. 그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던 라이놀이 황망히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종류의 이종족을 보는 건 처음일 테니까.

아무튼, 아무리 제국이 이종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지만, 같은 대륙인 라이놀이 저렇게 충격 먹을 정도다.

다른 대륙 출신 반응이야 뭐 말할 것도 없겠지.

“……큰 거, 작은 거, 귀 뾰족한 거…… 흡!”

서율이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실례되는 말이란 건 아나 보지.

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각각 우투레, 콘시, 릴리아예요. 종족은 거인, 요정, 엘프고요.”

“요정? 요정이란 종족은 처음 들어 보는데?”

퀭한 눈의 다린이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그쪽은 조금 사정이 있어서……. 그냥 그런 종족이 있다고만 알아 두세요.”

“흐음……. 그래?”

크게 관심은 없었는지 다린이 더 묻지 않고 팔짱을 꼈다. 그 뒤를 이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푼 서율이 물었다.

“어……. 동방엔 인간 말고 다른 지성 종족이 별로 없어서 그런데, 혹시 각각 특성 같은 게 있나요? 아니면 주의해야 할 점이라든가…….”

“음…… 주의라고 할 만큼 크게 대단한 차이는 없는데……. 아, 저기 우투레한테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왜요?”

“주식이 인간이거든요.”

내 말에 서율이 깜짝 놀란 얼굴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노, 농담이시죠?”

“네. 안 잡아먹으니까 그렇게 놀라지 마요.”

조금 더 놀려 줄까 하다가 곧장 바른대로 불었다. 분위기 좀 가볍게 하려고 던진 농담인데, 표정 보니까 진짜로 믿는 거 같아서. 괜한 편견이라도 생기면 곤란해지는 건 나다.

아무래도 이쪽은 제대로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거 같은데. 원래 무지(無知)가 제일 무서운 법 아니겠나.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말하자면 정말로 인간들과 딱히 큰 차이점은 없어요. 사실 세세하게 따지자면 많긴 한데, 그건 서로 어울리다 보면 알아서 깨닫게 될 부분이고.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냥 얘들 식성 정도만 배려해 주면 될 거예요.”

“식성?”

“네. 많이 먹고, 안 먹고, 고기만 먹어요.”

누구 식성이 그렇다고는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었다. 겉모습만 봐도 알 거다.

“그 외에 크게 다른 점은 수명 정도인데…… 이건 뭐 딱히 말할 필요 없죠? 어차피 다 인간보단 오래 사니까.”

“관습이나 행동, 예절 같은 건? 생물 특성뿐만 아니라 그런 쪽 차이도 있을 텐데?”

“아, 그건 제가 따로 그쪽 관련된 선생 붙여서 교육시켜 놓을 거예요.”

간단히 결투 좀 하쟀더니 목숨을 건 사투가 되고, 가볍게 내기 좀 하자니까 무조건 치고받는 맨몸 격투가 되는 상황은 나부터 사양이다.

종족적 특성 때문에 바꾸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인간 사회에 섞여드는 이상 인간에게 맞추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나.

굳이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격언을 떠올리지 않아도 상식과 같다.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할까.

“꼼꼼하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라이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숙박은 역시 이 집에서 하는 거야?”

“남는 방은 있어요?”

이렇게 물어보니 내가 손님이라도 된 기분이다. 일단 여긴 내 집인데 말이지.

하긴, 한 최근 3년 동안 이틀 정도 머물렀던가? 촌구석에 박힌 별장이래도 그것보단 많이 쓰겠다.

무심한 집주인 대신 집사직이라도 맡은 건지 라이놀이 막힘없이 입을 열었다.

“남는 방은 많아. 1기사단 사람들도 나간 지 꽤 됐으니까. 그 뒤로 딱히 새로 들어온 사람도 없고.”

“그럼 결정됐네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다 같은 식구들끼리 잘 지내 보죠.”

* * *

내가 셋을 레이튼으로 끌어들이며 제일 걱정했던 것은 바로 도시민들의 반응이었다.

남아 있는 사람의 90프로 이상이 멸망한 제국민 출신인데, 그쪽은 대륙에서도 유명한 이종족 차별자들 아니겠나.

지금은 내 항의로 없어졌지만, 노블레스 애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법으로 금지된 이종족 노예 거래까지 할 정도였다.

내 계획대로라면 결국 레이튼 사람들도 이종족에 익숙해져야 하기에 일단 강행하긴 했는데, 끝까지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엔 셋의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것까지 염두에 둘 만큼 말이다.

콘시는 크기가 작으니 주머니에 넣고, 릴리아는 뤼빈하이켄에서처럼 귀를 가리는 모자를 씌우면 되겠단 생각이었다. 계획에 없던 우투레는 다행히 능력이 은신이기도 했고.

아무튼,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건데……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여기 웬 귀쟁이가……. 서, 성자님?!”

“귀쟁이가 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제가 감히 성자님의 동료분인지 몰라뵙고…….”

“내 동료가 아니면 차별할 거란 소리처럼 들리는데.”

“그럴 리가요! 사람이 귀가 크든 코가 길든 이빨이 뾰족 튀어나왔든 무슨 상관이랍니까? 뒤에 날개 같은 것만 안 돋아났으면 됐죠, 뭐. 하하하.”

―저거 지금 내 얘기하는 거야?

“히익!”

레이튼 사람들은 생각보다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옆에서 동행한 것만으로 차별의식이 거의 사라져 버린 거다.

셋을 데리고 며칠 정도 도시를 순회하다 보니 어느새 뒷말이 나오는 경우도 없어졌다. 정말 마법 같은 변화라 해야겠지.

하지만 그렇게 한숨 덜었다 싶었던 것도 잠시. 곧바로 새로운 문제가 내 발목을 잡았다. 우투레의 관습, 예절 교육을 맡았던 교사가 난감한 얼굴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혹시 그 녀석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든가…….”

“아니요. 말은 잘 듣습니다. 오히려 덩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하더군요.”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지…….”

겉으론 티 내지 않았지만, 사실 종족 차별자 같은 건가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시간에 1골드나 주는 개꿀 알바를 포기할 리 없었으니까.

그런데 교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상상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머리가 너무 나쁩니다…….”

“그야 거인족이니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것까지 감안하고 수업료를 측정한 겁니다만.”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제 이름을 백 번은 넘게 알려 줬는데 끝까지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제 이름이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제일 흔한 한스입니다. 한스.”

“…….”

“솔직히 그냥 시간만 때우며 돈만 받아 갈까 생각도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성자님 상대로 그러는 건 너무 양심이 찔려서…….”

“……일단 감사합니다.”

교사에게 5골드를 건넨 뒤 곧장 우투레의 방으로 향했다. 녀석이 5시간 동안 한스라는 단어 하나를 외우지 못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우투레. 공부는 잘했나?”

“꽤 만족스러웠다. 우투레, 많은 걸 배웠다.”

“무엇을 배웠지?”

“인간의 이름은 외우기 힘들다는 걸 배웠다. 우투레, 다른 종족의 이름을 외운 건 이번이 처음이다.”

“……혹시 방금 나간 교사의 이름을 기억하나?”

“행크다. 분명하다.”

“…….”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했다.

설마 얘 말할 때마다 우투레, 우투레 하는 게 자기 이름 까먹을 것 같아서 붙인 습관은 아니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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