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87)
리안이 루시에라 프리우스의 공격을 10회 막았을 때, 구경하던 단원들은 탄성을 질렀다. 저 정도면 3급 최상위 수준은 되겠다고 여겼던 거다. 예상을 훨씬 초월한 실력이었다.
그리고 리안이 루시에라 프리우스의 공격을 20회 막았을 때, 단원들의 탄성은 경탄이 되었다. 저게 도저히 3급의 경지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던 거다. 그즈음 그들은 윗등급을 이겼다는 단테의 소문을 사실로 여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이어지던 둘의 공방이 50회를 넘어갔을 때.
“…….”
장내엔 오직 침묵만이 가득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단원 중 한 명이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나?”
동료의 중얼거림에 한스가 피식 웃었다.
“못 믿겠으면 꼬집어 줄 수도 있다만.”
“……아니, 그건 됐어. 아까 단장님 눈초리 받으니까 정신이 바로 확 들더라고. 그러니까 이건 꿈이 아니겠지. 꿈이었으면 좋겠지만.”
단원이 고개를 털며 물었다.
“지금 공방이 몇 회째지?”
“100번은 넘은 거 같군.”
“100번이라…….”
그 정도면 이미 1기사단 내에서도 중위권 이상 가는 실력이다. 루시에라 프리우스와 100번씩 검을 맞댈 수 있는 것은 단원들 중 절반이 안 되니까.
“아까 10번을 버티니 뭐니 했던 게 부끄럽군. 한스, 너는 알고 있었나?”
“뭘 말이지?”
“저분이 저렇게 강하다는 거.”
녀석, 녀석 하던 말투가 공손하게 바뀌었다. 한스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뛰어난 분이라 생각은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제일 먼저 주군을 막으려 했던 게 나였던 것은 너도 봤을 텐데?”
“하지만 저분이 루시에라를 이기면 생각이 바뀔 거냐고 묻기도 했잖아.”
“그것도 진심으로 생각하고 한 물음은 아니었다. 네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꺼낸 질문이었지.”
“그렇단 말이지…….”
단원의 시선이 다시 대련장으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흥분과 경탄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나도 설마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해 봐서 이제야 떠올린 건데……아무래도 내가 저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지금 정한 것 같다.”
단원은 의아하게 쳐다보는 한스의 시선을 무시하고 씨익 웃었다. 뒤에 이어질 말은 속으로만 남겨 둔 채로.
* * *
서로 검이 얼마나 오갔을까.
일단 백 번까지는 세어 봤는데, 그 이후로는 감도 안 온다. 그럴 만한 여유가 전혀 나지 않았으니까.
콰앙!
“큭!”
정면으로 부딪혀 온 공격에 거친 숨을 내어 쉬면서 저 멀리 거리를 벌렸다.
상대의 추적을 허용하는 악수(惡手)였는데, 다행히 프리우스 역시 그럴 여력이 없었는지 그러지는 않았다. 다만 나보다 조금 더 여유 있어 보이기는 한다.
역시 당장의 실력은 내 위라는 거겠지.
“……솔직히 말해서 예상은커녕 제 망상까지 뛰어넘으시는군요.”
프리우스가 가쁜 숨을 내몰아 쉬며 힘겹게 말했다. 나는 호흡을 고르고 그에게 되물었다.
“망상?”
“예. 단장님께서 잘 알지도 못하는 자를 제 2명령권자로 올렸다기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가령 단장님의 숨겨 둔 자식이었다든가…….”
“…….”
그냥 지금 베어 버릴까? 패러사이트 죽일 때 썼던 검법이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프리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금방 폐기했습니다. 항상 저희와 붙어 다니신 분인데, 그동안 혼외자식까지 만들 만한 여유는 없으셨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상상한 게 두 번째입니다. 단장님께서 새로 뽑은 2명령권자가 사실 저희 예상보다 훨씬 잠재력이 높다는 거죠.”
프리우스는 그새 피로를 회복하였는지 평안한 안색이었다.
“이번에 돌아온 경을 보고 이 생각이 맞았다고 확신했습니다. 분명 4급이었던 자가 3급, 그것도 그냥 3급이 아니라 상위가 되어서 나타났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조차 훨씬 초월했을 줄은…….”
“내가 좀 대단하기는 하지.”
나는 프리우스의 말에 대충 대꾸해 주면서 몸을 한 번 살펴봤다.
나 역시 피로는 물론, 자잘하게 났던 상처들까지 전부 회복했다. 용의 피 덕분이다.
회복력 하나는 내가 압도적인 만큼 장기전으로 가면 내가 이길 수 있을 거다. 뼈를 주고 살을 취하는 전략으로 했을 때 말이다.
하지만 이게 뭐 목숨을 건 생사결도 아니고, 그렇게 추잡하게 이기는 것보단 그냥 쿨한 모습 한 번 보여 주는 게 인심 얻기는 더 낫겠지.
하나하나 실력이 대륙에서 통할 정도라 해도 결국 기사도에 심취한 것은 얘네도 똑같으니까.
마음을 정하고 검을 들어 올렸다.
“그보다 대련이 너무 끌리는 거 같은데, 그냥 한 번에 끝내는 건 어때?”
“……한 번에, 말입니까?”
“전력으로 맞붙잔 거지. 기교 같은 거 없이.”
프리우스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요. 황녀님도 기다리고 계시니.”
……황녀? 설마 타냐를 말하는 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아리송하다. 아무리 싸우느라 코드를 보지 않았다고 해도 기감은 제대로 펼쳐 놓고 있었는데……. 만약 걔가 들어왔다면 놓쳤을 리가 없다.
혹시 집에서 기다리고 있단 걸 돌려 말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내 뒤의 입구 쪽에 서 있는 타냐를 발견했다. 뭐에 그리 동요했는지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다.
“…….”
뭐지? 대체 언제 온 거지? 옆의 리카르도는 그렇다 치고, 저 녀석 기운을 내가 못 느꼈을 리 없는데? 드디어 푸른 혈맥의 재능이라도 깨우친 건가?
속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보다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되돌렸다.
일단 이쪽부터 해결하고 봐야지 하는 심정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거지?”
“예.”
“좋아. 그럼 1분만 기다려.”
“예?”
나는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눈을 감은 채 검에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실전이 아닌 곳에서 전력이라 하면 쓸 만한 것이 한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터널 블레이드.
예전 단테의 모습으로 나갔던 경기에서 상대가 썼던 필살기(必殺技)다.
웃기는 이름인 데다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해도, 위력 하나는 인정할 만한 기술이었다. 써 보라고 했던 나도 당황해서 제지할 정도였으니까.
아직 아이언에게 배운 검술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지금 쓸 수 있는 최선이다.
그렇게 1분이 지나고. 검에 충분한 양의 혼원력이 모였을 때.
나는 그때 보았던 상대의 동작을 떠올리며, 들고 있던 흑철검을 그대로 내질렀다.
* * *
길었던 승부의 승자는 단 한순간에 결정이 났다. 폐허처럼 변한 대련장 위에 남은 건 리안, 단 한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대체 저건 또 무슨…….’
리카르도는 공격의 여파를 막은 검을 다시 허리춤에 집어넣으며 쯧쯧 혀를 찼다.
‘저렇게 실전성 없으면서 위력적인 기술은 또 처음 보는군.’
검사보다는 마법사에게 어울리는 기술이다.
일단 준비 시간이 너무 길고, 동작 또한 빈틈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들어가는 기운 대비 효과까지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대련, 그것도 서로 일합을 겨루는 시합에서는 저만한 기술이 없다는 것은 인정을 해야겠다. 실제로 방금 그 효용성을 입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만약 다른 걸 쓸 수 있었다 해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
리카르도는 아직 1년 전 리안을 보았을 때를 기억했다.
그때도 리안은 지금처럼 밖에서 돌아다니다 막 귀환한 참이었는데, 그전과 보이는 기세가 차원을 달리했다.
뭉툭한 검이 다듬어져 성검으로 바뀌었다 해도 믿을 만한 변화. 굉장히 고차원의 검술을 전수받은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 그걸 쓰지 않은 것은…… 역시 상대를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아직 완벽히 다룰 자신이 없었을 테니까.
‘봐준 건 루시에라 쪽이 아니라 저 녀석 쪽이었다는 건가.’
갑자기 든 생각에 리카르도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다.
고작 4급에 불과하던 꼬마가 어느새 1기사단 내에서 세 번째로 강한 단원을 상대로 승리하다니…….
리안의 장래성을 높게 쳤던 그조차 염두에 두지 못한 속도의 성장이었다.
한참을 피식거리던 리카르도가 이내 시선을 관중석으로 돌렸다. 단원들 역시 설마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경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눈동자에 담겨 있는 감정도 여러 가지다. 부정, 경악, 허탈 등등. 하지만 공통적으로 포함된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존경이었다.
수십 년간 황실과 단장인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인정하지 않던 저 대륙 최강의 자존심 덩어리들이, 겨우 스무 살 남짓 된 청년 대하기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 * *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강한데…… 혹시 죽은 건 아니겠지?
나는 왼팔에 크게 난 상처를 복구시키면서 리카르도를 째려봤다.
만약 내가 도를 지나쳐도 저 인간이 알아서 해결해 주겠지 하고 막지른 건데, 설마 근처 방어만 할 줄은 몰랐다.
이제 와 한탄해 봐야 뭐 하겠나. 다 내 죄인 것을.
나는 그만 검을 집어넣고 관객석 근처의 구멍으로 향했다. 이터널 블레이드에 맞고 날아간 프리우스가 처박힌 곳이다.
그 안에 손을 뻗으며 물었다.
“……괜찮나?”
“쿨럭.”
어떡하지? 괜찮지 않아 보인다.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다.
나는 재빨리 근처의 기사에게 다가가 포션을 하나 건네받았다. 그리고 곧장 프리우스에게 돌아와 입안에 쑤셔 박았다. 꿀꺽꿀꺽, 목젖이 몇 번 울렁거리더니 이내 눈을 뜬다.
다행이다. 살아서.
“……제가 진 겁니까?”
“그래.”
“대체 그 기술 이름이…….”
“그런 거 없어. 그보다 얼른 이거나 마셔.”
추가로 받아 왔던 포션을 따서 다시 녀석의 입안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 기술 이름을 물어보려 할 때마다 같은 짓을 몇 번 더 반복했다.
계속해서 쿨럭거리던 녀석이 진저리 내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 됐습니다. 물어보지 않을 테니 그만 좀 먹이십시오. 이러다 상처가 아니라 배가 터져서 죽을 거 같습니다.”
프리우스가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옷을 터는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혹시 인정 못 하겠으면 나중에 다시 붙어 줄 수도 있어. 정상적인 끝마침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받아주는 건 내가 확실히 이길 거란 판단이 선 이후겠지만.
프리우스는 그런 내 제안에 피식 웃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어차피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으로 갔어도 제가 졌을 테니까요.”
“……봤나?”
“방금 베인 상처가 곧바로 회복되는데 어떻게 안 보겠습니까? 게다가 저는 검술과 마력만이 실력이라 인정하는 멍청이는 아닌지라.”
프리우스는 그대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변의 제 1기사단원들 모두가 프리우스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사전에 짜기라도 한 듯이 절도 넘치는 동작이었다.
“인정하겠습니다. 당신은 저희의 제 2명령권자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