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86)
멀리서 들려온 한스와 이름 모를 단원의 대화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겨우 열 대만 버텨도 인정해 줄 수 있다니.
누가 누굴 인정하느냐는 둘째 치고, 난이도가 너무 쉽지 않나. 나는 일단 이기는 거 목표로 시작한 건데.
어쨌든 마음은 좀 편안하다.
절대적인 실력이니 뭐니 하길래 싸워서 지면 안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았으니까.
솔직히 프리우스를 상대로 내가 무조건 이길 거란 보장은 없었다.
인간 한정해서는 최소한 앞에서 20위권 내에는 들어갈 녀석이다. 달리 말하자면 쟤보다 강한 사람이 세상에 스물이 채 안 된단 소리다. 아마 이종족 포함해도 큰 차이는 없을 거고.
말로만 꺼드럭거리는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진짜 대륙 급 강자란 거다.
즉, 내가 이기면 나도 그와 같은 위치에 오른단 거지.
기분 좋은 긴장감과 함께 검을 꺼낸 순간, 프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갑자기 왜 웃으십니까? 긴장 때문에 그런 거라면 지금이라도 폐쇄형으로 바꿔 줄 수도 있습니다만.”
“그럴 필요 없어.”
“후회하실 텐데…….”
후회는 무슨.
나는 피식 웃으며 아까처럼 손가락만 다시 한 번 까딱여 줬다. 그러자 프리우스가 쯧, 혀를 차고는 발을 박찼다.
“본인 재능에 눈이 먼 모양인데, 오늘 그 자만심을 전부 빼드리죠!”
콰아아앙!
순식간에 프리우스의 검이 내게 뻗어져 왔다.
하지만 기세에 비하면 정작 공격은 그리 강하지 않다. 속 빈 강정이라고 할까. 내가 일반적인 3급이었어도 한 번은 막았을 수준이다.
최소한의 체면은 차릴 수 있도록 해 주겠단 거겠지. 아까 들었던 단원의 말처럼 진짜로 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다가오는 칼날에 내 흑철검을 맞대었다.
콰아아앙!
“……큭!”
검과 검 사이에서 굉음이 터짐과 동시에 프리우스가 세 발자국 뒤로 밀려났다. 곧바로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반응 나쁘지 않은데.
피식 웃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자, 뒤로 밀려났던 프리우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자만심에 가득 찰 만도 하군요. 제가 너무 우습게 봤다는 걸 인정하겠습니다.”
“계속 우습게 봐도 되는데.”
“그럴 수는 없지요. 이제부턴 절대 봐주지 않을 겁니다.”
프리우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검을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아까완 달리 속에 힘이 가득 실린 공격이었다.
* * *
프리우스와 리안의 첫 공세가 성립한 순간, 장내의 1기사단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루시에라가 힘에서 밀렸어……?”
“아니, 봐준 거야. 너도 봤잖아? 원래 낼 수 있는 힘의 반의반도 안 낸 거.”
“하지만 그렇다고 3급이 저렇게 쉽게 막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잖아?”
“그건 그렇지.”
“무턱대고 경지만 올린 얼간이는 아니란 건가…….”
믿기 힘든, 아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우 저 나이에 3급까지 오른 것도 놀라운데, 그 안의 알맹이까지 건실하다니.
대륙 제일의 기재들만 모였다는 1기사단에서도 저만큼 두각을 드러낸 자는 여태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것도 그들이 저보다 나이를 훨씬 많이 먹었을 때를 기준으로 해도 말이다.
“……어쩌면 진짜로 10대 정도는 버틸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아니지. 대단하긴 하지만, 결국 봐준 걸 버텨 낸 것뿐이잖아.”
동료가 생각보다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경탄하던 단원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안 봤는데, 자네 언제부터 그 정도로 눈이 높았지?”
“비교적 강하든 약하든 결국 3급은 3급이야. 난 적어도 우리랑 동급 정도 되지 않으면 인정할 생각 없다.”
“거, 사람 참 기준하고는. 그래도 레이튼과 황녀님을 살려 준 자인데…….”
“그래서? 너도 한스처럼 3급 밑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그건 아니고…….”
슬쩍 끝을 흐리는 단원의 말에 줄곧 심드렁한 태도를 유지하던 동료가 피식 웃었다.
“뭐, 나도 저 녀석의 공로는 알지. 앞으로 분명 크게 될 거란 것도 알고. 그러니 일단 이렇게 보기라도 하고 있는 거야. 얼마나 가능성이 보이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거기에 따라서 내 선택도 달라질 거다.”
“선택?”
“그래, 선택. 앞으로 5년 정도는 황녀님과 단장님의 얼굴을 봐서 참을 수 있어. 하지만 만약 그 기간 안에 저 녀석이 2급에 오르지 못할 것 같다면…….”
그는 덤덤한 눈으로 대련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 길로 곧장 뜻을 같이하는 단원들과 함께 세 왕국을 공격할 거다.”
* * *
콰아앙! 콰아아앙!
어느덧 벌써 세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루시에라 프리우스는 속으로 깜짝 놀라고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은 봐준 것도 아닌데 수월히 버텨 냈다.’
물론 전력이라고 하기는 뭐하다. 결국은 일반적인 견제의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그조차 3급의 상대가 버텨 낼 것은 아니었다. 보통이었으면 세 번째에 이미 저 멀리 튕겨져 나갔겠지.
‘……그 단테라는 녀석과 비슷한 경우인가?’
대륙 역사상 처음으로 윗등급을 이겼다 알려진 인간.
아무리 4급에 불과하다곤 해도 그자에 대해선 단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히 갈렸다.
헛소문이나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부터, 그저 등급을 숨기는 새로운 방법이 나왔단 말까지.
어찌 됐든 진짜로 소문이 사실일 거라 믿는 사람은 내부에서도 다섯이 채 안 됐다.
‘그런데 그게 진짜였을지도 모르겠군.’
프리우스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그전보다 특히 더 힘을 많이 담아서. 쌓아 온 세월이 생각나 갑자기 억울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안은 그 역시 수월히 막아 냈다.
콰아앙!
‘이번 건 왠지 감정이 실린 거 같은데?’
순간 팔이 조금 저릿해졌다. 분명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공격이다.
‘거, 나이도 자실 만큼 자신 양반이 쩨쩨하기는.’
모은 마력 덕분에 노화가 늦춰졌는지 겉으론 거의 30대 수준으로 보이지만, 설정에 따르면 내용물은 최소한 60은 넘겼을 거다.
사실 리안이 할아버지라고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란 소리다.
그럼 그냥 손주 재롱잔치 본다 생각하고 좀 봐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해 보니 그래 봤자 릴리아랑 나이가 비슷하네.’
리안은 속으로 프리우스와 릴리아의 모습을 매칭시켜 보다가, 금방 고개를 털어 버렸다. 별로 좋은 그림이 나오진 않았다.
‘차라리 카일이 낫지.’
적어도 겉으론 범죄 같아 보이진 않으니까.
다른 생각에 한눈파는 건 거기까지였다.
쉬이이익,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프리우스의 검이 옆구리를 노리고 솟구쳐 왔다.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베기 공격. 동작은 단순했지만, 위력은 그렇지 않았다. 리안은 재빨리 검을 수직으로 세워 그걸 막아 냈다.
콰아아앙!
‘위험해라.’
아무리 그래도 너무 여유 부렸나? 본인이 상대보다 더 강한 것도 아닌데.
프리우스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비웃음을 날렸다.
“재주도 좋으시군요. 저와 싸우면서 다른 생각할 여력도 있으시고.”
“생각보다 할 만해서 말이야. 이대로면 열 번 정도는 충분히 버티지 않겠어?”
그 말에 프리우스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단원들이 하는 말을 들으신 모양인데, 저는 겨우 그 정도로 인정할 생각 없습니다.”
“네가 인정할 생각 없으면 뭐 어쩌겠어? 다른 단원들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데.”
“제가 부정하면 바뀔 겁니다.”
“글쎄. 갑자기 기준 높인다 해도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이길 거 같은데.”
“……진짜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헛웃음을 내뱉은 프리우스가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더 입을 열지는 않았다. 실제로 건방 떨 만한 실력은 된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다시금 공격에 들어갔다.
그렇게 서로 아무 말 없이 이어진 공방이 여섯 회, 일곱 회, 여덟 회. 어느새 열 번을 훌쩍 넘어갈 즈음, 장내로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했다.
“……저 녀석은 대체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녔던 거지? 가능성은 봤지만, 저 정도로 빠르게 강해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갑자기 입구 쪽에서 들려온 중얼거림에 앉아 있던 단원들이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정체 모를 상대가 지척까지 올 때까지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대련에 정신이 팔렸다지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들어온 면면들을 확인한 단원들이 뽑은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다, 단장님을 뵙습니다!”
“나보다 먼저 인사해야 할 상대가 있을 텐데.”
1기사단 단장 리카르도가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리자, 단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제야 단장 옆에 있던 황녀를 발견한 것이다.
‘대체 어째서 눈치채지 못한 거지?’
단장이야 그렇다 칠 수 있다. 자신들의 실력을 훨씬 초월한 상대니까. 지척은커녕 바로 옆까지 다가와 목을 날려 버려도 인식하지 못했을 거다. 이는 별로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황녀에 이르러선 변명거리가 없다. 그저 동방의 부적술 조금 배운 게 다인 분 아닌가. 천 걸음 떨어져서도 알아챘어야 했다.
그들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무릎 꿇으려는 순간, 타냐가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됐으니까 조용히. 대련에 방해되면 안 되잖아.”
그 말에 단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엉거주춤 설 수밖에 없었다.
순순히 앉자니 지은 죄가 걸리고, 아무 일 없던 듯 넘어가자니 민망스러워서다.
결국 그들은 리카르도의 못마땅해하는 눈길을 받고 나서야 다시금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리카르도는 그 꼴을 보다가 이내 혀를 차며 옆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내일 당장 단원들 교육을 다시 시키겠습니다.”
“됐어. 아무렇지 않게 알아챘으면 내가 더 실망했을 거야.”
“황녀님께서 그러시다면야…….”
말과는 달리 리카르도의 시선은 계속해서 단원들을 향했다. 당장이라도 뭐라 하고 싶은 걸 참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타냐의 관심은 이미 거기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대련장을 바라보았다.
‘리안…….’
레이튼의 성자가 돌아왔다는 말에 곧장 뛰어왔건만, 벌써부터 이런 일을 벌였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허나 그것까진 별문제도 아니다. 어차피 진짜 목숨 걸고 하는 결투도 아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언제 저렇게 변했지?’
성격을 말하는 게 아니다. 돌아오자마자 하고 있는 짓 보면 예전과 비슷할 거다. 하지만 그 외엔 전부가 바뀌었다.
확연히 성숙해진 외모부터 그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싸움 실력까지.
아무리 몇 년씩이나 떨어져 있었다 해도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큰 변화였다.
왠지 그 변화만큼이나 리안과의 거리가 벌어진 거 같아서, 타냐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