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85)
한스는 저 질문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일견 단순한 문제 같으나, 그만큼 간단한 상황은 아니었던 탓이다.
‘잡는 분위기나 말하는 투는 분명 기강 잡으려는 지휘관의 폼이기는 한데…….’
세상 어느 무력 단체든 흔하게 있는 일이다. 말 안 듣는 대원 중 가장 강한 녀석을 이겨 쓰러뜨리는 것. 세상에 이만큼 상대의 인정을 받는 편하고 좋은 방법이 없으니까.
1기사단 시절에 자주 겪었던 연례행사이기도 했다.
‘……문제는 주군이 겨우 3급이라는 거지.’
‘겨우’라고 하기엔 많이 무례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면 대륙 어딜 가도 무시당할 수준이 아닐뿐더러, 리안은 이제 겨우 스물 남짓한 청년일 뿐이었으니까. 그건 세계 최고 기재들만 모였다는 1기사단에서도 유례없는 속도였다.
‘허나 결국 전도유망하다는 소리에 불과하기도 하다.’
1기사단은 오직 그들만으로 제국 절반을 지탱한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괴랄한 실력의 전투 집단이었다. 가장 낮은 평단원조차 2급에 이른 괴물들이란 말이다.
다른 왕국이었다면 최소 부단장 직은 맡고 있었을 기사들.
아무리 잠재력이 거대하다 한들, 그들 중 3급에게 지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내가 말려야겠군. 안 그러면 주군께서 괜히 망신살만 뻗치리라.’
한스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여기서 제일 강한 자라면…… 역시 서기관입니다.”
“……서기관?”
“예. 펜보다 강한 검은 없는 법이니까요. 하하……하.”
농담으로 스리슬쩍 넘어가려고 하던 한스가 떨떠름하게 웃음을 흐렸다. 리안의 표정이 오히려 아까보다 더 구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1기사단에 서기관이란 직책은 없을 텐데?”
“아, 그것이…… 자경단에서 파견 보낸 사람입니다.”
“그래도 일단 자경단 취급을 받고는 있나 보지?”
리안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장난은 이만 됐으니 그만 여기서 제일 강한 게 누군지나 불어 봐.”
한스가 꿀꺽, 침을 삼켰다.
‘진심이시구나…….’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물러설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더한 참견은 과언(過言)이 될 뿐.
결국, 한스가 한숨을 내쉬며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누가 봐도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다 광고하는 사내 하나가 꼿꼿이 서서 리안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루시에라 프리우스.
1기사단 내에서 단장과 부단장을 제외했을 때 가장 강한 단원의 이름이었다.
* * *
나는 한스가 힐끗거리는 인형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새빨간 머리카락에 미간과 인중 사이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 거기다 위아래 입술을 거칠게 종단하는 상처까지.
굳이 코드를 볼 것도 없이 저놈이 저기서 제일 강해 보이긴 한다. 흉터를 내버려 두고 있는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저 정도라면 신관이 바로 지워 줄 텐데, 혹시 저게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튼, 저 녀석이 분명 1기사단 3인자인 루시에라 프리우스겠지. 게임에서도 나름 큰 비중을 차지하는 네임드 보스다.
거의 1급에 가까운 2급 최상위 실력자.
솔직히 겨우 지금 시점에서 상대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 봤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놈이 인상을 확 구긴 채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뭐지?”
“뭐지는 반말이고. 그동안 신경 써 주지 못한 것도 있으니 이번만은 넘어가 주지. 다시 한 번 말해 봐.”
나는 저들의 명령권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황녀인 타냐에 이은 2순위권으로. 이건 기사단 단장인 리카르도보다도 높은 거다.
저쪽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소리지.
이를 깨달았는지 프리우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정정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좋아.”
막나가기는 해도 아직 이성까지 잃은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그쯤에서 걱정스레 눈짓하고 있는 자이어를 본부로 돌려보냈다.
잠시 거기에 맡겨 둔 동료들이 걱정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추 정리가 끝난 뒤, 프리우스를 향해 물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도 못 할 만큼 멍청하진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불만이 뭔지부터 먼저 얘기해 봐.”
“……첫째는 외부인입니다.”
“외부인?”
“예.”
그 뒤로 이어질 설명을 기다리는데, 프리우스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이러는 이유를 생략했듯 본인들의 불만도 알아서 생각해 보라는 무언의 항의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왜 저러는지 짐작 못 할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그 장단에 맞춰 줄 이유는 없다. 똑같은 상황이어도 나는 어디까지나 상대의 상관과 비슷한 포지션이었으니까.
뭐, 저쪽은 인정 안 하겠지만.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지금 내 말이 권유처럼 들렸나?”
“……제가 당신을 뭐라 불러야 합니까?”
“그냥 리안이라고 해. 님 자는 붙여서.”
“좋습니다, 리안 님. 리안 님도 저희 상황은 대충 아실 거라 믿습니다.”
세 왕국에 나라와 가족을 빼앗긴 걸 얘기하는 거다.
“그래서?”
“저흰 그 세 왕국에서 흘러들어온 잡놈들을 지금 당장이라도 죄다 처죽이고 싶은 심정입니다.”
“…….”
짐작한 그대로의 이유였다.
“외부인을 전부 죽여 버리고 싶다?”
“그렇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그 전쟁과 직접 관계가 없는 상인들일 텐데?”
“머리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감정의 문제지요.”
프리우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전 대륙으로 이름 떨치던 저희에게 고작 도시 경비를 맡긴 것은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일단 이 도시가 마지막으로 남은 제국의 흔적이기는 하니까요. 하지만 그 안의 외부인들까지 저희가 지켜야 할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외부인을 지키라는 게 아니야. 치안을 유지하라는 거지.”
“머지않아 그 둘의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 않게 될 겁니다. 그만큼 많은 숫자가 도시로 들어오고 있으니까요.”
그 정도로 유입 속도가 빠른 건가? 그렇게 되기까지 최소한 몇 년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일단 좋은 소식이기는 하다. 그만큼 레이튼이 빠르게 발전하고, 제국에 대한 반감도 많이 줄어들었다는 소리니까.
1기사단은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지만, 사실 손쉽게 해결이 가능한 문제기도 하고.
말이 외부인들이지, 대부분은 제국 출신 생존자들일 거다. 제국의 도시가 레이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나. 잠깐 세 왕국에 흡수되었을 뿐, 본질은 제국인에 가깝다는 소리다.
임시조치에 불과하긴 하지만, 황족인 타냐가 그들을 제국민으로 인정한다 하면 지들이 뭐 어쩌겠나. 아랫놈이 까라면 까야지.
이 부분은 나중에 타냐와 상의하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일단 그 문제는 그렇다 치지. 어쨌든 그게 첫째라 했는데, 그럼 두 번째 불만도 있나?”
“두 번째는 저희의 명령권자 때문입니다.”
“……명령권자?”
“예. 그중에서도 제2 명령권자 말입니다.”
제2 명령권자라면 나를 뜻하는 거다.
프리우스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 감정도 없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단장님의 명이라고는 하나, 혈통도, 실력도 딸리는 꼬맹이 하나가 저희 위에 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혈통이야 그렇다 치고, 실력이 딸린다는 소리는 대륙 어딜 가서도 들어 본 적 없는데.”
“앞에 조건이 붙었겠지요. 나이치고는, 배경치고는 같은 거 말입니다.”
프리우스가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그런 조건이 붙는다면 저도 이해할 만하나, 아쉽게도 저흰 절대적인 실력만 보는지라.”
“그래서 나를 인정하기 힘들다?”
“그렇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나도 모르게 입에 프리우스와 비슷한 미소가 걸렸다.
결국 프리우스와 내가 원하는 건 이름만 다르지, 본질적으론 같았다. 내 입장에선 기강 잡기, 녀석 입장에선 실력 증명.
서로 같은 걸 생각하는데 더 이상 질질 끌 이유가 없다.
“시간은 30분 후, 장소는 여기서. 불만 있나?”
“방식은 폐쇄형입니까?”
폐쇄형. 단둘이서만 대련을 공유할 거냐는 거다. 망신살 뻗칠 게 뻔하니까 꼬리 마는 것 정돈 이해해 주겠단 거지.
나는 어깨에 걸친 검을 허리춤에 돌리며 녀석을 향해 말했다.
“당연히 개방형이다.”
* * *
하늘에서 대뜸 떨어진 2명령권자와 차기 부단장이라는 루시에라 프리우스의 대결에 관한 소식은 순식간에 널리 퍼졌다.
대련장 주변 좌석엔 어느새 건물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외부에 있던 단원들까지 자리 잡아서 비어 있는 곳이 없었다.
결국 몇몇은 일어서서 대결을 구경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그들 중 하나가 앉아 있는 한스를 향해 물었다.
“자네 주군이 창피를 당하는 모습을 그냥 앉아서 두고 봐도 되나?”
그 말에 한스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조언이나 걱정해 주는 소리 같았지만, 사실 비꼼에 가깝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를 제외한 다른 단원들은 예전부터 리안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꼭 주군께서 창피를 본다는 보장은 없지. 실제로 아르곤에서는 한 단계 위 상대를 이긴 자가 나오기도 하지 않았던가.”
“아…… 그 단테라는 녀석을 말하는 거군. 미친개 아이언의 제자라는.”
처음 말을 걸었던 단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마 4급인 상태로 3급을 이겼다지? 대단한 일이기는 해. 하지만 그건 고작해야 일반 3급이 상대 아니었나?”
“국가기사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이였다.”
“후보라는 말은 결국 국가기사가 아니었다는 소리지.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어중이떠중이까지 취급해 줬나?”
본인들에게 비견될 만한 것은 최소한 아르곤의 국가기사 이상. 그건 그저 근거 없는 자부심 같은 게 아닌,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우리 가운데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게 저기 저 루시에라 프리우스야. 난 솔직히 저 녀석이 제정신인가 싶군. 외출이 길다 싶더니, 어디서 머리라도 다친 거 아닌가?”
“말조심해라. 네가 충성 맹세를 하지 않았다 쳐도, 명백한 우리 상관이다.”
한스가 검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하자, 단원이 뜨끔한 표정으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어이쿠, 뜨거라. 알겠어, 알겠다고. 자네 정말 진심으로 충성 맹세를 한 모양이지?”
“충성 맹세를 장난으로 하는 자도 있나?”
“대체 저 녀석의 뭘 보고? 아, 도시에 선행 많이 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얘기할 필요 없어. 착한 아이 뽑자는 거 아니잖아?”
“당장의 실력은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저 나이에 저 경지다.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진 너도 잘 알 텐데?”
“잠재력을 볼 거면 유망주로 넣었어야지. 지휘권자가 아니라.”
장난스럽게 얘기하던 단원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바뀌었다.
“단장님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파격을 저지르신 건진 잘 모르겠지만, 너무 과했어. 본인이 직접 자격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녀석에게도 우리에게도 악수가 될 거다.”
단순히 내뱉는 말이 아니다. 한 귀로 흘렸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분명 리안에 대한 걱정도 들어가 있다.
한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넨 주군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별로 싫어하진 않아. 오히려 호감이지. 애초에 싫어하기 힘든 타입이기도 하고. 아마 다른 단원들도 대부분 나와 비슷한 심정일걸? 저기 루시에라를 포함해서 말이야.”
“……그래도 2명령권자는 아니란 소리군.”
“지금은, 그래. 한 10년쯤 지나면 모를까, 아까도 말했듯이 당장은 실력이 부족하잖아?”
단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련장 내부를 바라봤다. 한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불쑥 물었다.
“만약 지금 당장 실력을 증명한다면 어쩔 거지?”
“지금 당장?”
“주군이 저 경기에서 루시에라를 이긴다면 말이다.”
한스도 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묻는 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 그저 상대가 가진 호감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다.
단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글쎄…… 굳이 이기는 게 아니더라도, 루시에라의 공격을 10번 정도만 막을 수 있다면 생각이 좀 바뀔지도 모르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