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84)
내가 아는 사람인가?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당황한 채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녀석을 확인한 내 눈과 뇌가 곧장 입으로 명령을 내렸다. 한숨이라도 내쉬라고.
지금 가장 시급하게 만나고 싶었던 동시에 제일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다.
“……자이어 테르베로츠 단장님?”
경계하는 눈으로 우릴 훑고 있던 경비의 표정이 한순간에 환하게 바뀌었다.
“여긴 어떻게…… 아니, 마침 잘됐군요. 혹시 흑기사님들 좀 잠시 불러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이자들 포스를 보니 제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거 같아서…….”
흑기사는 또 뭐야? 별 지랄을 다 한다.
속으로 황당해하는데, 불현듯 자경단에 떠넘기듯 내버려 두고 갔던 집단 하나가 떠올랐다.
제국 1기사단의 단원들.
분명 우리 상회에서 나온 흑철석 갑옷으로 꼼꼼히 무장시켜 두긴 했다. 워낙 유명했던 놈들이다 보니 누가 알아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솔직히 나도 그거 보고 내심 흑기사 같다 생각하기는 했는데…… 그걸 진짜 이름으로 짓는 놈이 있을 줄이야.
한심한 눈으로 작명자를 쳐다보자, 녀석이 뜨끔해서 빠르게 이쪽까지 다가왔다.
“너, 너 대체 언제 돌아온 거야?”
“꼴 보면 모르겠냐? 지금 막 들어오는 길이시다.”
“아니, 올 거면 연락이라도 하고 오든가!”
삐삐도 없는 세상에 연락은 무슨 연락?
잠깐 한 소리 하려는 순간, 나와 자이어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부터 떨떠름히 서 있던 경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단장님과 아는 사이였습니까?”
그 말에 흥분해 있던 자이어가 무안한 얼굴로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무게 잡는 말투로 말했다.
“알지. 그보다 나는 자네가 저 녀석을 모르는 게 더 신기하군. 직접 본 사람은 별로 없어도 소문은 많이 나 있을 텐데.”
“소문……말입니까?”
경비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힐끗거렸다.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나 보다.
어느새 내 존재감이 그렇게까지 희미해진 건가?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예전엔 ‘소문’ 한마디면 곧바로 내 이름부터 나오곤 했는데. 어차피 도시에 도는 소문이라 해 봤자 나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었으니까.
하긴, 지금과 그때의 레이튼은 거의 천지가 개벽한 수준이니 그럴 수밖에 없긴 하려나.
슬쩍 내부를 확인해 보니 외곽임에도 불구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한가득이다. 그만큼 돌아다니는 소문도 한가득이겠지. 원래 활기에 비례해 늘어나는 게 바로 이야기라는 녀석이니까.
생각해 보면 수년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내가 거기 등장하는 게 더 웃기긴 한다. 나쁘지 않은 현상이기도 하고.
그렇게 납득하고 받아들이는데,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자이어가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자네, 1년 전에 온 이주민이었지?”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딱히 소문에 어둡지는 않습니다.”
“소문에 밝느냐 어둡냐 하는 문제가 아니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지.”
“네? 그게 무슨…….”
경비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자이어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쯧, 찼다.
“이 녀석이 바로 자네들이 헛소문 취급하는 그놈이라는 소리다.”
“……네? 설마…….”
“그래. 맞아.”
자이어가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경비의 시선이 그를 따라 나에게 닿았다. 눈동자 안에 경악의 감정이 선명하다. 그걸 본 자이어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놈이 도시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레이튼의 성자’, 리안이다.”
* * *
경비는 우리를 곧장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물론 무기 압수 없이. 설마 그 전설처럼 내려오는 소문들이 진짜일 줄은 절대 몰랐다 덧붙이는 것은 덤이었다.
나는 왜인지 뿌듯한 얼굴로 웃고 있는 자이어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일단 내일 당장 작명부터 바꿔라. 차라리 그냥 자경단으로 해.”
“네가 대체 무슨 권리로…….”
“상회에서 주는 지원금 끊어져도 상관없어?”
“새로 바뀌는 이름은 뭐가 좋을까?”
자이어가 곧바로 태세 전환해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얘도 성격이 많이 변했다. 말투도 그렇고. 귀족 놀이하던 습관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해야 하나?
부하 앞에선 아직 폼 잡는 거 같긴 하지만, 그거야 사실 저 나이대 남자라면 당연한 일이다. 갑질만 안 하면 됐지 뭐.
“바뀌는 이름은 네가…… 아니, 부하들 시켜서 아무렇게나 정해. 단, ‘제국’이라는 단어는 빼고.”
“제국은 왜 빼야 하는데?”
“왜긴 왜야. 세 왕국에서 토벌대 결성하는 거라도 보고 싶냐?”
“겨우 이 정도 가지고 토벌대는 좀 오버…….”
“빼라면 빼.”
사실 자이어의 말도 일리는 있다. ‘흑기사’들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세 왕국 입장에서 자경단은 진짜 애들 소꿉놀이 수준이니까. 주목할 규모도 안 된다는 소리다.
하지만 동시에, 경계해서 나쁠 것도 없다. ‘제국’이란 단어는 대륙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으니까.
굳이 이쪽에서 먼저 명분을 줄 필요는 없지. 원래 전쟁이란 건 사소한 것 하나에 터지는 법 아니겠나.
어쨌든 이름 문제는 대충 해결한 거 같은데……. 아까부터 옆이 조용하다. 살짝 고개 돌려 자이어의 표정을 확인해 봤다.
“…….”
설마 진짜 그 이름이 좋다고 생각한 건가?
시무룩해진 게 겉으로 표시 날 정도로 얼굴이 그늘져 있다.
나름 성장했다 생각했는데, 아직 애구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뭐냐. 흑기산지 뭔지 하는 건 그대로 써도 되니까 너무 실망하진 마라.”
“……정말이냐?”
“그렇다니까. 그보다 아까 일이나 설명해 봐.”
“아까 일?”
자이어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입구 지키는 경비가 생긴 거나, 외부에서 온 이주민 문제라거나…….”
“네 소문이 전설 취급된다는 거나 하는 그런 거?”
“……그건 빼고.”
“어려울 것 없지. 일단 경계가 심해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레이튼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대충 예상하고 있던 이유기는 하다.
“원래는 궁핍한 도시민들이 대부분의 범죄를 저질렀는데, 다들 먹고살 만해지니 그런 쪽으로 눈 돌리는 경우가 적어지더라고.”
“그 반대급부로 궁핍한 외부인들이 풍족한 도시의 부를 노리고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 그 덕분에 요즘 레이튼은 외부인에 대한 배척이 조금씩 심해지고 있지.”
그건 좋지 않은데.
지금 레이튼이 발전한 것은 오직 상업에 의존한 결과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공식 인정받은 중립도시인 덕에 세 왕국의 상인들이 모여 거래하기 딱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즉 외부에서 온 물건과 돈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건데, 그런 와중에 외부인 배척이 심해지면 말짱 도루묵이다.
일단 지금 정도 경계심이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수준이지만,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아예 우리끼리 살겠다며 관문을 닫아 버릴지도.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외부인들 패악질이 그렇게 심각한 수준이야? 자경단 선에서는 처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대부분은 우리가 해결할 정도는 되지. 예전에 비하면 규모도 꽤 커졌으니까. 문제는…….”
“문제는?”
자이어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문제는 가끔씩 나타나는 기사급 실력자들이야.”
4급이나 5급을 얘기하는 걸 거다. 3급 이상은 대부분 마음대로 국경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이해는 안 간다.
“그게 뭐? 걔네들이 뭐 해도 문제 될 거 없을 텐데? 그…….”
“흑기사들 말이냐?”
“……그래, 그거. 내가 걔네 쓰라고 맡기고 갔잖아. 설마 녀석들이 그런 쭉정이들조차 상대 못 했다는 건 아니지?”
대륙에서 제일 강했던 제국에서 가장 실력 있는 기사들만 모아 둔 것이 바로 1기사단이다.
심지어 바이론은 그들만 동대륙에 안 보냈어도 제국이 세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할 리가 없었다 평가할 정도였고.
그런 집단에서 겨우 4, 5급 상대로 쩔쩔맬 리가 있나.
의문스레 자이어를 바라보자, 녀석은 아무 말 못 하고 계속해서 주위 눈치만 봤다.
……아. 뭐가 문젠지 알겠다.
“그쪽에서 이제 말을 안 듣는 모양이지?”
“……그래.”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확신했는지 자이어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직 대놓고 내 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점점 더 나를 무시하는 게 보이더라고. 겨우 그런 일에 본인들을 쓴다고 불평한다든지…….”
“흐음. 그래?”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자존감도 많이 무너졌나 보다. 본인의 리더십 같은 걸 탓하나?
하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서 보면 생각보다 오래도 버텼지 싶다.
애초에 나이부터 실력까지 월등히 차이 나는 단장에게 충성을 맹세할 만큼 1기사단이 호락호락할 리가 없지 않은가.
녀석들이 참았든가, 자이어의 통솔력이 의외로 뛰어났다는 건데…… 아마 후자겠지. 가족 잃고 나라 잃은 인간들이 몇 년 가까이 아무것도 없이 꾹 참고 있었을 수는 없었을 테니.
어쨌든 이건 내 문제이기도 하다. 1기사단을 명령권으로 자경단에 넣은 것은 바로 나니까. 그때는 그것 외에 해결할 방법이 없기는 했지만.
나는 낙담한 듯한 자이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이 형이 왔으니 걱정 마라. 그런 문제라면 내가 대충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네가 왜 내 형이냐?”
자이어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얼굴로 내 팔을 털어 냈다.
“그보다 해결을 어떻게 한다는 건데? 그 사람들 자존심 보면 네 말이라고 순순히 따를 거 같지는 않아.”
“그건 네가 걱정할 거 없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녀석도 안심한 듯 표정을 폈다.
내가 연설로 그놈들을 진정시켰던 게 기억났나 보다.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겠지.
아무튼,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집에 가기 전 미리 해결해 놓고 가야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거다.
나는 그 즉시 자이어가 이끄는 대로 1기사단…… 흑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자경단 사무실이 아니네?”
“응…….”
“혹시 네가 독립시킨 거야?”
“…….”
자이어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대답이 되었다.
지들끼리 따로 건물을 파서 나오다니. 들었던 것보다 사태가 훨씬 심각한데. 같은 조직이 따로 논다는 건 명백한 월권행위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곧바로 수십 개의 시선들이 이쪽으로 날아와 꽂혔다. 그냥 노려보는 정도가 아니라 안에 기세까지 담겨 있다. 기운을 버티지 못한 자이어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거 진짜 막 나가는구만.
기가 찬 내가 그 앞을 막아서고 나서야 견제가 끝났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내게 달려왔다.
“주군!”
“한스.”
내가 떠나기 전 1기사단 중 유일하게 나한테 충성 맹세를 했던 단원이다. 그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저한테 먼저 연락 주셨으면…….”
“그 얘긴 나중에 하지. 일단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까.”
“해결해야 할 문제…… 말입니까?”
“그래.”
나는 검을 꺼내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한스, 여기서 제일 강한 놈이 누구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