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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83화 (183/225)

너의 코드가 보여 (183)

목적지를 정하고 발진했을 때쯤, 팔 한쪽에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흔한 일은 아니다. 검을 잡기 시작한 순간부터 항상 신경 쓰고 있는 부위니까.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엄청난 체구의 거인족 하나를 발견했다. 고난의 대물림 안에 쓰러져 있던 우투레다.

“…….”

대체 이 덩치를 어떻게 잊어 먹고 있었던 거지?

단순한 해프닝 중 하나라 여기기엔 많이 이상하다. 생각해 보니 아까 다른 일행들이 콘시에 대해서만 물은 것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고.

대륙에서 제일 작은 종과 제일 큰 종이 같이 있는데 전자 쪽을 먼저 발견하는 게 웃기지 않나. 얘는 덩치가 존재감을 대신하는 녀석인데.

잠시 고민하다가, 우투레의 팔을 흔들어 깨웠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보면 된다.

“우투레. 일어나라, 우투레.”

“우, 우투레 기절한 거 아니다! 잠깐 잠든 것뿐이다!”

우투레가 크게 소리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귀청 떨어지겠네.

“그건 됐고, 물어볼 게 있다.”

“그게 뭐지?”

“혹시 ‘선조의 영혼’을 부여받았나?”

이 세상에서 거인족은 조금 특이한 편이다. 마력을 최고로 치는 대륙에서 이 녀석들이 가진 건 거의 튼튼한 신체 능력이 전부니까. 사실 진작 도태되었어야 하는 종족이라 할 수 있지.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저 ‘선조의 영혼’ 덕분이다.

굳이 따지자면 사도의 권능과 비슷한 건데, 차이점은 모시는 신의 특성을 받느냐, 예전에 살던 조상의 특성을 받느냐 하는 정도다.

힘을 주는 주체만 빼면 거의 똑같단 소리다.

우투레가 기죽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우투레는 선조의 영혼을 받지 못했다. 우투레, 재능 없다.”

“재능이 없다라…….”

말도 안 되는 소리.

겨우 성인식 치르는 놈이 대물림의 숲 2단계까지 진입하지 않았나. 거기다 본인도 아직 모르는 거 같지만 선조의 영혼을 받은 게 확실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면 방금처럼 마법 같은 상황이 일어났을 리 없다.

영혼의 특성은…… 존재감을 지운다든가 하는 그런 쪽인가?

확실히 눈에 띄지 않는 능력이라 눈치채지 못 했을 만도 하다. 저 덩치에 은신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하겠나?

하지만 오히려 그 고정관념 덕분에 써먹기 좋을 거 같은데…….

생각이 바뀌었다. 우연한 만남이기는 했지만, 얘는 내 걸로 해야지.

“그런데 여긴 어디인가? 저기 옆에 있는 건 내가 하늘을 볼 때 발견했던 구름과 닮았다. 마치 솜사탕 같은 게…….”

“우투레.”

“뭐지?”

“너는 이대로 부족까지 돌아갈 생각인가?”

우투레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투레는 이제 상급 전사다. 족장에게 가서 자랑해야 한다.”

“틀렸어. 너는 상급 전사가 아니다.”

내 말에 곧바로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일단 이유부터 듣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저것도 가산점 요소 중 하나다. 주먹부터 나오지 않았단 것은 거인족 치곤 인내심이 깊다는 증거니까.

“어째서 상급 전사가 아니란 거지? 우투레는 분명 고난까지 갔다. 혹시 너도 내가 선조의 영혼을 받지 못했다고 무시하는 건가?”

“그런 게 아니다. 우투레, 상급 전사의 조건이 대물림의 숲 2단계에 다녀오는 거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들어가는 건 네 발로 들어갔지. 하지만 나오는 건 어떻게 했지?”

우투레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맞아. 네 발이 아니라, 내가 널 부축해서 나왔지.”

“그, 그건…….”

“부탁한 게 아니라고 따지기라도 할 셈인가?”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물었다.

원래 겉으로 말하는 것과 속으로 생각한 것은 다른 법.

안에선 여유롭다 주장했던 우투레도, 내가 돕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죽을 운명이었단 건 충분히 알고 있을 거다.

요컨대 나는 생명의 은인이란 소리지.

그런데 여기서 되려 내게 화를 내면 좀 곤란해진다. 인내심과 별개로 인성 자체가 글러 먹었다는 뜻이니까.

능력이 탐나긴 하지만, 믿을 수 없는 놈이라면 필요가 없다.

차분히 우투레의 대답을 기다렸다. 녀석은 뭐가 그리 억울한지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우투레,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감사한다.”

“그런데 왜 울지?”

“우투레 울지 않는다. 이건 그냥 땀이다.”

언제부터 눈이 땀을 배출하는 기관이 된 거지.

“뭐, 좋아. 그럼 지금 땀을 흘리는 이유가 뭐지? 날씨도 선선한데.”

“……분해서다.”

“분해?”

우투레는 팔로 얼굴을 슥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투레, 선조의 영혼 받지 못했다. 있는 건 늠름하고 멋있게 발달된 근육과 넘치는 힘뿐이다.”

“…….”

“그래서 그것만이라도 인정받으려 했다. 하지만 우투레, 그것도 못 했다. 우투레, 쓸모없는 거인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부족해서 화난다는 거지……. 성격도 괜찮은데?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누워 있는 녀석을 내려다봤다.

“우투레. 나를 봐라. 내가 어떻게 보이지?”

“허약하고 빈약해 보인다. 밥을 굶었나?”

“그래. 네 기준에선 허약하고 빈약해 보인다 이 말이지.”

“내 기준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그럴 거다.”

손이 나갈 뻔한 걸 꾹 참았다.

“어쨌든, 네 기준에서 허약하고 빈약한 내가 네가 있던 대물림의 숲 2단계까지 갔다. 이상하지 않나?”

“그러고 보니…….”

그제야 깨달은 듯 우투레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 빈약한 몸을 가지고 어떻게 거기까지 왔던 건가?”

“그 정도가 아니야. 나는 숲을 완전히 통과했다.”

사실 통과한 건 아니지만, 원래 부수는 게 더 힘든 법이니 별 상관없겠지. 능력만 보이면 되는 것 아닌가.

우투레가 고개를 마구 저으며 소리쳤다.

“말도 안 된다! 그곳은 우리 족장도 통과 못 한다 했다!”

“그건 사실일 거다. 하지만 나는 족장이 아니지.”

“족장이 아니라서 통과할 수 있었단 건가?”

“아니. 나라서 통과할 수 있었단 거다. 정 못 믿겠으면 나중에 다시 숲으로 가 봐. 이젠 시련이 없어져 있을 거다.”

“네가 통과하면 숲의 시련이 없어지는 건가?”

“그렇다.”

―그런 거 아니거든!

살짝 떨어져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콘시가 어처구니없어하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나와 우투레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우투레, 궁금하다. 그렇게 허약한 몸을 가지고도 강해질 수 있는 비결. 혹시 가르쳐 줄 수 있나?”

“물론이지.”

나는 씨익 웃으며 품속에 항상 구비하고 다니는 종이 한 장을 꺼내면서 말했다.

“이 서류에 사인만 하면 된다.”

* * *

우투레는 글자를 읽지 못했다. 일자무식이라고 등쳐 먹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계약서 내용을 하나하나 말로 설명해 줬다.

어렵다며 진저리치는 녀석을 붙잡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레이튼이 보였다.

“하…….”

이런 도시에 정들면 안 되는데, 왜 볼 때마다 반갑지? 이것도 스톡홀름 증후군 비슷한 건가?

어쩌면 항상 오랜만에 돌아와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어째선지 나갔다 오면 항상 예정을 훌쩍 초과해 버리니…….

하긴, 이젠 ‘이런 도시’라고 하기도 뭐하긴 하다.

내가 이것저것 벌인 덕분에 지금의 레이튼은 제국의 수도 시절만큼이나 활기를 띠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어떤 부분에선 그때보다 오히려 더 나아진 점도 있었다. 위생이라든가, 위생이라든가.

어쨌든 감상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스바를 착륙시켰다. 이대로 들어가면 지나치게 눈에 띌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린 장소에서 30분 정도 더 걷자, 겨우 레이튼의 입구에 도달했다.

“정지.”

가장 앞서가던 아리나의 호위 프란시스가 갑옷 입은 남자의 제지에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외부인들인 거 같은데…… 레이튼에는 무슨 볼일이오? 물건이 없는 걸 보니 장사치도 아닐 테고.”

프란시스 뒤에 있던 아리나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눈동자 속에는 의아함이 가득하다. 아마 내 눈도 쟤랑 똑같을 거다.

대체 언제부터 레이튼에 경비가 있었지?

모르는 사람들이 나서는 것보단 내가 나을 거 같아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자경단원입니까?”

“오, 아무래도 도시에 아주 문외한은 아닌 모양이군. 하지만 그건 옛날 이름이오. 얼마 전에 조직 이름을 바꿨거든.”

굳이?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도시 입구에 경비까지 깔아 둘 정도면 규모가 꽤나 성장했을 텐데, 언제까지고 자경단이라고 부르자니 너무 허접해 보였을 테니까.

시골 마을 청년회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그럼 바뀐 이름은 뭡니까?”

내 물음에 경비가 어깨를 쫙 펴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제국의 망령’이오.”

“…….”

진짜 제정신으로 지은 이름인가?

내가 그놈의 제국 꼬리표 안 붙으려고 얼마나 조심하는 중인데. 그건 둘째 치고서라도 네이밍이 너무 오그라든다. 원작의 라이놀 용병대와 칭호가 판박이기도 하고.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혹시 그거 자이어 테르베로츠의 아이디어입니까?”

“오, 우리 단장님 이름까지 아시는 줄은 몰랐군. 맞소. 바로 단장님이 지은 이름이지.”

얘가 뒤늦게 중2병이 왔나?

“바뀐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요.”

“얼마 안 되었소. 삼 일쯤 됐나?”

다행이다. 그 정도면 아직 그냥 물려 버려도 문제없겠다.

알려 줘서 고맙단 인사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남자가 다시 한 번 우리를 제지했다.

“잠깐! 잘 모르는 모양인데, 얼마 전부터 외부인은 모두 검사를 받은 후에야 들어갈 수 있는 식으로 시스템이 바뀌었소. 아, 그리고 무기도 반입 금지요. 맡겨 두면 나갈 때 돌려드리지.”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검사야 그렇다 쳐도, 내 무기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이젠 평범한 검도 아니니까.

“그런 거라면 일단 저나 저기 신관은 별문제 없을 거 같습니다. 외부인이 아니거든요.”

아리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경비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봤다.

“외부인이 아니라……. 하지만 최근 일주일 안에 나갔던 주민 중엔 그대들과 비슷한 얼굴조차 없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겠죠. 며칠 전이 아니라 몇 달 전에 나갔다 돌아온 거니.”

“몇 달……?”

어쩌면 일 년일 수도 있고. 최근 시간 감각이 좀 둔해져서 확신은 못 하겠다. 내가 워낙 바빠서.

아무튼 내가 아는 한 사실대로 말한 건데, 경비의 경계심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이 주변엔 아직 몬스터 천지요. 다른 세 왕국에서 레이튼 출신을 받아 주지도 않을 거고. 한데 대체 몇 달 동안 어디 있었단 소리요?”

“…….”

대답할 수 없었다. 기밀이라서가 아니라, 어차피 안 믿을 게 뻔해서.

엘프 마을 갔다 왔다는 것 하나만 해도 미친놈처럼 볼 일인데, 나는 거기에 더해 뤼빈하이켄까지 들렀다 오지 않았나.

그 경로를 직선으로 쭉 그어도 개월이 아니라 년 단위로 세어야 할 여정이다.

중간중간 몬스터나 산맥 같은 자연적 요소부터, 국경이나 도시 같은 인위적 요소까지 온갖 문제점들이 상주해 있을 테니까. 그걸 나는 스바 덕분에 죄다 무시해서 온 거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눈에 띄더라도 스바를 타고 올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꺼내면 어떨까 고민하는 그때.

“……리안?”

입구 안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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