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182화 (182/225)

너의 코드가 보여 (182)

헬 난이도였던 게임에 시간 제한까지 생겼다.

딱 좋은 패널티다.

나는 산보하는 기분으로 숲 중심부 더 깊숙이 들어갔다.

대물림의 숲 2단계 ‘고난의 대물림’은 예전의 내게 패배를 안겨 주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너무도 쉬웠다.

온몸의 힘을 갈취해 가는 느낌?

간에 기별도 안 간다. 굳이 비하자면 숙취가 남은 기분이라 해야 하나. 온몸이 뒤틀리고 오공에서 피를 뿜고 하는 무협지에서나 경험할 험악한 일은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그렇게 아무 문제없이 통과하고, 곧이어 3단계 ‘비난의 대물림’.

이곳은 이제까지와 달리 사람의 정신을 읽고, 그것을 공격한다.

경계를 통과하자마자 텅 빈 허공에 신관 복장의 사내 하나가 나타나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너만 아니었으면 우린 전부 살았잖아. 안 그래?”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춰 서서 그자를 바라봤다.

분명 이번 패러사이트 사건으로 죽은 사람이다. 분향소에서 얼굴과 이름도 익혀 두었다.

애봇 휴버트, 존경스러웠던 아버지.

“너만 아니었으면 패러사이트가 나타날 일도 없었고, 그랬다면 내 자식들도…….”

“웃기는 연극이네.”

대체 뭐라고 하나 잠시 들어 볼까 하다가, 코웃음을 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별로 대단한 건 없어 보였다.

만약 내 속에서 정리가 되기 전의 일이었다면 저 정도에도 좀 충격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리나와 대화한 이후 죄책감은 거의 떨쳐 버렸으니까.

애봇 휴버트의 탈을 쓴 녀석은 계속해서 나를 뒤따라오며 말했다.

“연극? 너는 이 세상을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는 거야? 바로 이곳이 너를 위해 펼쳐진 무대고, 네가 그 안의 주인공이라고? 그래서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을 거 같아?”

“그게 아니라 네 대화 꼬라지를 보고 얘기한 거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해 줬다.

“내 죄책감을 건드려 볼 생각이었으면 적어도 현실성은 갖췄어야지. 애봇 휴버트가 패러사이트니 뭐니 지껄이는 게 맞다고 생각해? 나 말곤 교황이나 겨우 알고 있던 이름인데?”

“…….”

“다음부턴 디테일 좀 신경 쓰자. 몰입이 안 되잖아.”

애봇 휴버트의 형상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다가 금방 사라졌다. 먹히지 않는단 걸 인정하고 포기한 거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끊임없이 다른 형상들이 나타나 나를 욕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지구에 계실 부모님까지 등장했다.

갑자기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어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아들, 그거 아니?”

“……또 뭐야?”

“사실 우리는 너를 끔찍하게 싫어했단다.”

“…….”

이, 시X, 새끼가.

“솔직히 네가 사라져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냥 돌아오지 말고 거기서 살면 안 되겠니? 너도 알잖아, 네가 지구에 돌아와 봤자 좋아할 사람은 없다는 거.”

“……야.”

“왜 그러니? 혹시 내가 한 말이 전부 거짓말 같니?”

“그만 됐으니까 아가리 닥치고 있어.”

통했다고 생각한 건지 형상이 씨익 미소 짓는다.

“이거 봐라. 낳아 준 부모님한테 지껄이는 게 그런 소린데 너 같으면 정이 들겠니?”

“난 분명 경고했다.”

“경고를 했으면 뭘 어쩌겠다는…… 어?”

형상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조차 어머니의 얼굴이라 기분 나쁘다.

나는 그쪽에서 시선을 돌린 채 그대로 들고 있던 바위를 바닥에 세게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순식간에 사방의 바닥이 움푹 파였다. 동시에 형상 역시 그 흉터가 번지듯 몸이 점점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제 한 몸 겨누기도 힘들어하는 장소에서 이렇게 날뛰는 놈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녀석은 이런저런 모습들로 변해 가며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자, 잠깐! 대화로 풀어 보자!”

“…….”

“제발 바위 좀 그만 던져! 원래부터 이런 시련인 건 너도 알고 들어온 거잖아!”

그렇게까지 선을 넘을 줄은 몰랐지.

나는 한마디 대꾸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묵묵하게 작업하는 목수처럼.

콰아앙! 콰아아앙!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져 있었다. 목소리를 바꿔 가며 떠들던 형상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는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고 고개를 돌려 봤다.

움푹움푹 패인 구멍. 근처에 지진이라도 난 거 같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한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었다.

“……뭐지?”

내게 압박을 주고 있던 대물림의 숲 압력이, 어느덧 사라져 있었다.

* * *

우투레 옆에 앉아 있던 콘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경악한 눈으로 리안이 사라진 곳을 쳐다봤다.

―……설마 진짜 통과한 거야? 그것도 이렇게 빨리?

요정은 관념체다.

물질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 덕분에 어떠한 공격도 통하지 않는단 장점이 있지만, 그에 만만찮은 단점도 있다. 바로 일정 구역에 묶여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제약이라도 없었다면 이미 이 세상은 요정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테니까.

일방적으로 공방을 주도할 수 있는 존재가 누굴 상대하든 싸움에서 졌을 리 없지 않은가.

어쨌든 구속된다는 건 요정의 종족적 특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특이하고 강력한 힘에도 불구하고 대륙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기도 했고.

―…….

그런데 콘시는 방금 전부터 수백 년 동안 달고 살았던 이동의 제약이 느껴지지 않았다. 깔끔하게 사라졌다는 얘기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해방감.

보통 이렇게 된다면 그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바로 자신을 감싸고 있던 지역에서 통과자가 나온 경우.

평생 느껴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 꿈에서도 상상 못 한 상황이다.

―……뭔가 좀 이상한데.

하지만 콘시는 무턱대고 기쁨의 환호를 지르는 대신, 찜찜한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왜 숲의 시련까지 덩달아 사라진 기분이 들지……?

관념체인 콘시는 대물림의 숲이 주는 시련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힘을 정통으로 맞고 있던 존재가 눈앞에 떡하니 있지 않나.

콘시가 제약이 풀림을 느낌과 동시에, 기절해서 신음을 흘리고 있던 우투레 역시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타이밍이 너무 기가 막히다.

―아마 누군가 통과하더라도 시련은 계속 남아 있을 텐데……?

콘시도 평생 처음 겪어 보는 일이라 딱 잘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결국 콘시가 할 수 있는 건 이번에도 하나. 떠났던 리안이 돌아와 설명해 주는 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안을 그냥 뭉개 버렸다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지금은 제정신 맞는데, 그때는 제정신 아니었지.”

순간 열이 확 뻗치는 걸 어떻게 하나. 겨우 그 정도 했다고 시련까지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지.

하지만 여전히 후회는 없다. 만약 돌아간다 쳐도 똑같이 다시 할 거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번 일로 생겨날 변수인데…….

나는 쓰러진 우투레를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일단 당장 떠오르는 변화는 두 가지다.

첫째는 거인족의 성장.

매달 성인식이라는 이름으로 대물림의 숲에 와서 죽는 놈들이 한 무더기다. 이제 그런 짓은 하지 못할 테니 자연히 전력도 상승하겠지.

어차피 겔리안 연합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지금, 절대로 나쁜 결과는 아니다.

문제는 두 번째. 갑자기 생겨난 땅이다.

대물림의 숲은 이때까지 금지의 하나로, 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상 주인 없는 영토란 소리다.

이게 쓸모라도 없으면 또 모르겠는데, 가해지는 힘 때문에 식물이 존재하지 않을 뿐 토양 자체는 완벽했다.

과장 좀 보태 밀 하나 심으면 수백 개가 자라날 토지다. 크기도 웬만한 도시 이상이고.

아르곤, 칼페온, 겔리안 세 왕국 전부 침을 질질 흘리고 쳐다볼 거다.

이거 때문에 전쟁까지 가진 않겠지만, 꽤 커다란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다. 그 과정에서 서로 감정 상할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럼 다 같이 으쌰으쌰 해 보자는 내 계획에도 차질이 간다.

“…….”

역시 내가 먹는 수밖에 없나?

힘들긴 하겠지만, 이리저리 타협하다 보면 가능할 것도 같기는 하다.

원래 내 땅값이 올라서 기쁜 것보다 사촌이 땅을 산 게 먼저 배 아픈 법이라지 않나.

세 왕국 모두 본인들이 이 땅을 갖는 것보다 상대가 가지지 못하게 하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할 거다. 비슷한 덩치의 경쟁자가 더 커지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하니까.

아는 놈보다 모르는 놈한테 넘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내 경우가 되면 그 가능성이 확 올라간다.

아르곤, 겔리안에는 이미 연줄이 있는 데다, 그중 한곳에는 아예 귀족 작위까지 들고 있을 정도니까. 그것도 후작으로.

뭐, 주인은 단테로 되어 있긴 하지만, 대리인이라고 나서면 사실상 별 차이도 없다. 어차피 지금껏 대놓고 스바를 끌고 다니며 연이 있다 어필하기도 했고.

어쩌면 진짜 될지도 모르겠는데……?

진지하게 한번 검토해 봐야겠다. 약간의 계획 변경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만큼 탐나는 땅이기도 하니까.

일단 이건 돌아간 뒤 상회 영감님이랑 상의하기로 하고, 지금은 옆에서 계속해서 재잘거리는 콘시부터 상대해 줘야겠다.

허둥지둥하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 거냐는 질문에 대충 갈겼더니 되더란 식으로 대답하다 보니 어느새 숲의 입구가 보였다.

“리안 님!”

나를 발견한 아리나가 곧장 달려와 반겨 줬다. 그러더니 시선을 내 손바닥 위로 돌린다.

“이건 또 뭐예요?”

“음…… 날개가 달린 걸 보면 정령은 아닌데. 인간이랑 꼭 닮은 것이 페어리도 아니고…….”

릴리아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어? 생각해 보니 어디서 비슷한 종족에 대해서 들어 봤던 듯한 기억이…….”

“요정이야.”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릴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예전 카시아 때와 같은 반응이다.

대충 취급은 여전한 모양이네.

“요, 요정이라니. 제, 제가 생각하는 그 요정은 아니죠?”

“네가 생각하는 요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맞을걸.”

타다닥,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릴리아가 저 멀리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맹수라도 대하는 태도다.

그보다 쟤가 언제부터 저렇게 빨랐지.

아리나 역시 그 모습을 보더니 살짝 놀란 듯 내게 물어왔다.

“대체 요정이 뭐길래 저러는 건데요?”

“그런 게 있어. 생각보다 순하니 안심해도 괜찮아.”

“생각보다……?”

그렇게 쳐다봐도 내가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조금 우습긴 하지만, 겔리안 연합에서 요정에 관한 건 극비 사항으로 다루고 있으니까. 본인들 쪽팔려서 그런 거다.

대충 장난기가 좀 있다든가 능력이 특이하다든가 하는 얘기만 해 주고 스바에 올라탔다.

한동안 미뤄 뒀던 대물림의 숲 클리어도 끝냈으니, 이제야말로 진짜 레이튼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