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81)
죽음에는 다양한 이름이 있다.
갑작스레 찾아오기에 두려운 돌연사(突然死), 일순간의 방심이 불러온 사고사(事故死), 건강 약화가 야기한 병사(病死), 가장 긴 시간 동안 느린 고통을 주는 아사(餓死).
그리고 이와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자살과 타살도 죽음의 한 종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냐 타인의 의지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나, 숲의 중간까지 왔다. 나는 이제 상급 전사다.”
거인족 하나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밝은 표정과는 반대로 온몸에서는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대물림의 숲에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는 거인족 정통을 따르다 저렇게 된 것이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죽을 것이 뻔하겠지.
콘시는 그런 죽음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본인의 의지로 오기는 했는데, 죽으러 온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자살이 아니라 넘기자니 죽을 것이 뻔한 곳에 제 발로 온 것은 사실상 같은 의미로 쳐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굳이 이름을 붙여 보자면……멍청사 정도가 어울리지 않을까.
“나는 이제 상급 전사 우투레다. 족장에게 자랑할 수 있다.”
―그건 살아 돌아갈 수 있을 때 이야기고, 이 멍청아.
멀찍이서 몰래 지켜보던 콘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흐뭇한 얼굴로 바닥에 누워 있던 우투레가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인간? 인간이 어떻게 여기 있지?”
―……내가 왜 인간이라 생각한 건데?
콘시는 살면서 저런 오해를 받아 볼 날이 생길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날개도 달려서 날아다니는 데다, 애초에 크기부터 엄청나게 차이 나지 않나.
우투레는 그 자리에 누운 채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너는 작다. 작으면 인간 아닌가?”
―인간은 나보다 몇십 배는 더 커.
“우투레, 그런 거 모른다. 내가 보기엔 비슷비슷하다.”
―…….
아무래도 이번에는 거인족 중에서도 특출 나게 멍청한 녀석이 들어온 것 같다. 아니면 눈을 장식으로 들고 다닌다든가.
콘시는 쯧쯧 혀를 차며 거인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리고 그렇게 자세히 본 뒤에야 뭔가 특이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보통보다 덩치가 좀 크기는 하네.’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컸다. 두 배는 오버고, 그 절반 정도는 더 크지 않을까.
안 그래도 인간을 넷 합쳐야 겨우 필적할 만큼 큰 것이 바로 거인이다. 헌데 그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크기니……. 아마 인간 일곱은 겹쳐야 어떻게 비견이나 해 볼 거다.
‘……저 덩치면 진짜 인간이나 나나 비슷하게 보일지도?’
그런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털어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갔다. 정도가 있지, 정상적인 뇌 구조를 가졌다면 인간과 요정을 착각할 리 없지 않은가. 뒤쪽에 날개도 달려 있는데.
‘인간이라…….’
콘시는 그쯤에서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해서 인간, 인간 했더니 오랜만에 생각나는 인간이 하나 있어서다.
신체가 약한 종족답지 않게 2단계까지 무난하게 통과하는 힘. 어째선지 그녀가 대물림의 숲에 갇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지식. 그리고…… 언젠가 여기를 완전히 통과해서 자신을 풀어 주겠다 약속하는 패기까지.
수백 년 동안 본 생물들 중에 가장 특이한 존재였다. 이름도 분명히 기억한다. 리안. 잊을 수 있을 만큼 하찮은 만남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
그렇게 헤어진 지 어느덧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요정에게는 짧은 기간이다. 눈 깜짝하는 것과 비할 수 있을 만큼.
그렇지만 동시에, 콘시는 알고 있다. 인간 기준으로 2년이란 상당히 긴 세월이라는 것을.
한데 그놈은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이곳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다음에 올 때엔 반드시 나를 풀어 주겠다고?’
그런 건 애초부터 기대도 안 했다. 인간이 대물림의 숲을 통과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아무리 가능성을 보여 줬다 해도 마찬가지다.
저기 저 거인족 중에서도 유난히 강한 녀석조차 2단계 중간까지 오는 게 한계 아니었나.
‘……그냥 가끔 얼굴만 비춰 주면 되는데.’
콘시는 그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웅얼거리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제 우투레의 눈에서까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혹시 일어설 수 없는 거야?
“……우투레, 일어설 수 있다.”
―그럼 얼른 일어나. 그리고 뒤돌아 가.
“우투레, 잠시 쉰다.”
―여긴 쉴 수 있는 곳 아니야, 멍청아.
대물림의 숲의 시련은 움직일 때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가만히 있어도 신체에 가해지는 압력은 계속된다. 회복력이 말도 안 되게 빠르면 모를까, 저렇게 되면 이제 돌아가는 건 무리다.
그녀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며 커다란 머리통 옆 바닥에 살포시 앉았다. 그리고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뭐가 말이냐 인간?”
―내가 널 발견하는 게 늦었어. 보통은 근처 깊숙이 들어오기 전에 겁을 줘서 쫓아내는 편인데…….
“……그렇군.”
우투레가 힘겹게 고개를 돌려 콘시를 바라봤다.
“네가 바로 이 숲의 악귀였던 건가?”
―……악귀?
그런 험악한 명칭은 처음 들어 본다.
“족장이 말했다. 가끔 시련을 받으러 간 녀석들 중 악귀에게 저주를 당해 도망쳐 오는 경우가 있다고. 족장조차 너무 겁나는 저주라 차마 뭐라 하지 못한다고 했다.”
콘시가 한 건 그저 당사자가 제일 겪기 싫은 경험을 꿈으로 꾸게 하는 것뿐이었다. 저주 같은 건 금시초문이다.
―……나는 그런 거 쓴 적 없는데. 대체 그 저주가 뭔데?
“몸집이 인간만큼 작아지는 꿈이라 했다……. 듣기만 해도 매우 두려운 저주지.”
―…….
콘시는 저 말에 사과를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거인들 입장에선 충분히 고통스럽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크기가 작은 본인을 무시하는 것 같은 이중적인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못 하고 속으로 갈 곳 없는 분노만 삭이고 있자, 우투레가 고개를 다시 원상 복귀 시키며 말했다.
“하지만 뭔가 잘못 전해진 모양이다.”
―……그건 또 왜?
“너는 악귀라고 하기엔 너무 착해 보인다.”
―…….
콘시는 그 말에 그냥 조용히 얼굴만 푹 숙여 버렸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한탄하면서.
‘……누군가 여기까지 와 주면 좋을 텐데.’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란 건 안다. 대물림의 숲 2단계에 진입하는 존재는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다.
최근 그 숫자가 조금 늘었지만, 만약 있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까지 챙겨 갈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본인 하나 살아가기도 급급하겠지.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돌아오지 않을 기대에 희망을 걸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옆에서 말동무라도 해 주는 거였지.
그렇게 콘시가 억지로 기운을 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야, 오랜만이다?”
대물림의 숲 2단계 내부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태평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 * *
예전에 여기까지 들어왔을 땐 거의 탈진 상태까지 갔었는데, 정작 지금은 그냥 뒷산에 가볍게 등산이라도 온 것처럼 가뿐하다.
이런 게 바로 성장했다는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콘시에게 이어 물었다.
“왜 말이 없어? 쟤는 또 뭐고?”
―너…….
콘시는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긴 대체 어떻게…….
“어떻게는 뭐 어떻게야. 숲을 걸어오지, 날아왔겠냐?”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왜 그리 멀쩡하냐, 이 넓은 곳에서 본인이 있는 곳으로 정확히 온 방법이 무엇이냐. 이런 소리였겠지.
하지만 콘시는 나와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도 못 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뭔가 웅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까이 다가가 녀석을 손 위에 올렸다.
“생각보다 내가 별로 안 반가운 모양이네. 조금 더 천천히 와도 될 걸 그랬나.”
―아냐! 그런 거!
“그런 것치곤 반응이 좀 뜨뜻미지근한데. 나 다시 돌아가?”
그냥 장난 한번 쳐 본 건데, 녀석이 몹시 당황한 얼굴을 했다. 눈에서는 곧장 눈물이라도 흘러내릴 거 같다.
……수백 년 동안 갇혀 있던 애한테 하기엔 부적절한 말이었나?
재빨리 덧붙였다.
“농담이야. 농담. 설마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겠냐? 그래서 얘는 뭔데?”
화제를 돌리자, 콘시가 킁, 하고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성인식 하러 온 거인족이야. 이름은 우투레래.
“우투레?”
기억에 없는 이름이다. 겨우 성인식 할 나이에 여기까지 올 정도면 내가 알아볼 만도 한데.
잠시 근처에 앉아 녀석을 살피자, 곧바로 그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우투레라는 이 거인은 이곳에서 허무하게 죽었을 거다. 지금은 거의 입도 열기 힘들어하는 수준 같으니 말 다 했지 뭐.
녀석들은 강한 놈만 살아남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그 전통이 오히려 본인들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하긴, 안다 해도 전부 개인의 탓으로 돌릴 거 같기는 하다. 나약해서 죽었다든가 하는 그런 얘기를 대겠지.
속으로 쯧쯧 혀를 차고 있는데, 콘시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혹시 여유 되면 쟤 좀 밖으로 옮겨 줄 수 있어? 지금 아파서 못 일어난대. 저러다가 죽을 거야.
그럼 그냥 자업자득 아닌가도 싶지만……그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가 그리 매정한 놈이 못 되기도 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녀석을 바라봤다.
“우투레, 한 삼십 분 정도 더 버틸 수 있나?”
“……우투레, 버티는 게 아니다.”
“그럼?”
“혼자 일어서서 돌아갈 수도 있다.”
“패기는 좋네.”
피식 웃으며 콘시를 놓아줬다. 그러자 녀석이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날아올랐다.
―대체 뭐 하려고?
“입 놀리는 거 보니 30분 정돈 더 버티겠다 싶어서 원래 하려던 것부터 끝내고 오려고.”
―……원래 하려던 거?
“내가 했던 말 벌써 잊은 거야?”
살짝 몸을 풀며 말을 이었다.
“다음에 다시 만날 땐 여기서 같이 나갈 거라고 했잖아. 오늘 그거 지키러 온 건데, 정작 당사자는 까먹고 있다니. 서운하네.”
―까, 까먹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나를 믿지 못했다는 건가?”
―…….
내 말에 콘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 그대로 정곡을 찔렸기 때문일 거다.
내가 섭섭해 할지 모른다 걱정도 하는 거 같은데, 사실 저럴 거라 예상은 했다.
나에 대한 믿음은 둘째 치고, 인간이 대물림의 숲을 끝까지 통과한다는 자체가 워낙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니까.
보통은 초입 부분만 돼도 비실비실 죽기 직전까지 가는 게 인간이다. 여기 처음 왔을 땐 나도 조금 우습게 보다가 호된 맛을 본 다음 돌아가기도 했었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때보다 신체 능력이 몇 배는 상승하지 않았던가. 이제 대물림의 숲 정도야 쉽다.
나는 곧바로 발걸음을 뒤로 향하며 말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어쩌면 술잔이 식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