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80)
“얼마 전에 배운 하이 힐링이 하나 남아 있긴 한데…… 그거라도 한번 써 볼까요?”
“아니, 됐어. 하이 힐링이라 해 봤자 어차피 힐링에다 신성력 더 부은 것뿐이잖아.”
아리나와 이런저런 실험을 한 뒤 30분 후. 나는 내 권능이 녀석과 궁합이 맞지 않는단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힐링부터 보호막, 거기다 몇 안 되는 신성 공격 마법까지 다 써 봤는데 반응하는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녀석이 아직 배우지 못한 상위 기술 중엔 맞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지금 실험이 불가능한 이야기고.
대체 뭐지? 짐작도 안 간다. 솔직히 전투까지 갈 것 없이 여기서 판가름 날 줄 알았는데.
살짝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릴리아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보며 말했다.
“결국 네가 좀 도와줘야 할 거 같은데, 괜찮겠어?”
“네! 이제 오해 안 하니까요!”
릴리아가 씩씩하게 일어서 다가왔다.
저렇게 의욕 만만하면 나야 고맙지. 결투의 의미가 다르다는 거 진작 설명할 걸 그랬다.
“아까 말했듯이 내 마력은 너한테 맞춰 줄 거야. 5성급 마법사니까…… 대충 4급 기사 수준이면 되겠지?”
“저, 정령술도 익혔는데…….”
“그건 예외로 치자. 아, 사용은 마음대로 해도 좋아.”
솔직히 하급이면 내가 아무 대비 안 해도 내 몸에 해를 끼칠 수 없는 수준이다. 조건으로 넣기도 애매하지.
그래도 권능을 자극시키는 게 목적인 만큼, 경우의 수는 많은 쪽이 유리하긴 할 거다.
그보다…….
나는 앞쪽에서 몸을 풀고 있는 릴리아를 바라봤다.
사실 5성급 마법사면 4급 기사와 동급이긴 한데, 진짜 그 수준으로 맞추면 싸움 자체가 성립을 안 할 거다.
애초부터 둘의 대인전 차이가 큰 데다, 특히 나 같은 경우엔 코드나 등급보다 센 힘을 이용해서 2단계 위 마법사도 이길 자신이 있을 정도니까.
코드는 그냥 내가 안 보면 된다 쳐도 신체 능력까지 고의로 떨어뜨릴 순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마력 수준은…… 일단 5급…… 아니, 견습 기사를 조금 웃도는 내외로 맞춰 볼까. 그 언저리면 얼추 상대가 되겠지. 저 녀석 자존심도 있을 테니 얘기는 하지 말고.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들었다. 그러자 몸풀기가 끝난 릴리아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까는 목숨 걸고 하는 결투를 생각해서 긴장했지만, 이런 거라면 얘기가 달라요. 스승님도 각오하시는 게 좋을걸요?”
“꽤 자신 있나 보지?”
“그럼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마을에서 한 장난하기로 유명했거든요.”
진짜 자랑이 아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검을 어깨에 걸쳤다.
“그럼 선수 양보할 테니까 한번 들어와 봐.”
“후회하실 텐데.”
그러면서도 사양할 생각은 없는지 릴리아가 곧장 마법을 시전했다. 고의로 코드는 배제하였기에 무슨 기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원래 볼 수 있던 게 안 보이니 생각보다 답답하긴 하다.
어쨌든 당연히 공격 마법이겠거니 하고 기다리는데, 날아오는 게 없다. 뭐지?
“다 끝났어?”
“네. 선공 양보해 주셔서 감사해요.”
공격받은 적이 없는데 선공은 무슨.
하지만 나는 황당해하는 대신 오히려 더 주의를 기울였다.
아마 함정이나 반격 기술을 발동해 둔 거겠지.
솔직히 곧바로 공격 마법부터 사용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 장난인지 뭔지가 생각보다 실전성이 있나 보다. 아니면 천부적으로 타고난 센스가 괜찮은 편이라든가.
마법사가 기사 상대로 싸우려면 저게 기본이긴 하지. 공격 한 번으로 끝내지 못하면 그 즉시 패배로 이어질 테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이렇게 정보 없는 상태로 겪는 대마법전이 흥미진진하기도 했고, 녀석이 어떤 기술을 준비해 놨는지 궁금하기도 해서다.
탁, 곧장 발을 박찼다. 속도는 굼벵이 기어가듯 느렸다. 어디까지나 기운은 견습 기사 정도 수준으로 제한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건 내 입장에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었나 보다.
“자, 잠깐! 왜 그리 빠른 건데요!”
다음 마법을 준비하던 릴리아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이 정도면 원래 속도의 10분의 1 근처에도 못 가는 수준인데…….
잠시 멈출까 하다가, 그냥 그대로 달려들었다. 아까 그 의기양양하던 얼굴이 생각나서.
만약 자만심이 있다면 여기서 좀 죽여 놓는 것도 좋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릴리아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그때, 갑자기 녀석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도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무턱대고 달려들면 안 되죠! 이제 곧…….”
“곧, 뭐?”
태연하게 묻자, 릴리아가 당황했다.
“……곧, 5성급 마비 주문이 발동돼야 하는데……왜 안 되지?”
역시 방금 잠깐 저항감 느껴졌던 게 녀석이 준비해 둔 마법이었나. 혹시 잠깐 몸이 결린 것과 착각했나 했다.
아무래도 내 몸의 마법 저항력 자체가 말도 안 되게 높아진 모양이다. 기운을 제한해도 5성급 마비 주문이 안 통하는 걸 보면.
나는 피식 웃으며 검 자루로 릴리아의 이마를 살짝 때렸다.
“아!”
“엄살 그만 부리고 다시 마법 시전해 봐.”
다시 거리를 벌린 다음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기운 더 낮춰서 가 줄 테니까.”
* * *
23전 23승. 총 소요 시간 15분. 이게 나와 릴리아의 대전 기록이다.
한 판당 1분도 안 걸린 꼴인가?
솔직히 조금 놀랐다. 녀석의 실력에도, 나의 힘에도.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쪽으로.
릴리아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우수했다. 예상보다 감각이나 마력량이 훨씬 뛰어나다 해야 하나.
원래 짐작대로라면 견습 기사 수준으로 마력을 제한했을 경우 이길 수 없었을 거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겼다는 거지. 그것도 매우 손쉽게.
이건 릴리아가 약했다기보다는 역시 나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진 탓이다.
나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신체 능력이 예전보다 두 배는 더 상승한 느낌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꾸준한 단련의 결과일 수도 있고, 아이언과의 수련이 미친 영향일 수도 있겠지.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 내 신체가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라는 거다.
“괴물…….”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릴리아가 나를 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저게 받아 주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스승, 스승 할 땐 언제고, 이젠 뭐, 괴물?
이쯤하고 그만둘까 했는데, 한 판 더 할까.
살짝 고민하고 있자, 릴리아 곁에서 회복 마법을 사용하고 있던 아리나가 찌릿 째려봤다.
“이제 진짜 그만해요. 그러다 애 잡을라.”
“걔가 너보다 두 배 넘게 나이 많은 건 알지?”
“그러는 리안 님도 다른 나이 많은 사람들한텐 꼬박꼬박 존댓말 하면서 릴리아한테는 항상 반말하잖아요.”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속 나이야 어쨌든, 겉 나이가 끽해야 중딩인 애한테 내가 존댓말 할 수는 없잖아.
그렇게 말해 봤자 곧장 합당한 반박이 돌아올 게 뻔한 일인지라, 그냥 그만뒀다.
어차피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으니까.
“…….”
결국 받은 권능이 뭔지에 대해선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성녀인 아리나와 합이 맞는 것도 아니고, 전투와 관련해서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면…… 대체 뭐지?
가끔 하위 신격 사도들 중에 구겨진 종이를 빳빳하게 만들어 준다든가 식은 음식을 따끈히 데워 준다든가 하는 능력이 있기는 한데, 설마 주신인 녀석이 주는 게 그런 건 아닐 테고.
……진짜 그런 거 아니겠지? 갑자기 조금 불안해진다.
잠시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혼자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수준의 권능이었다면 키탄이 짬 내서라도 미리 설명해 줬겠지. 그러진 않았으니 결국 그렇진 않다는 거다.
뭐, 오늘 알아낸다는 목표는 실패했지만, 내 힘에 대해서 정확히 깨닫기도 했으니 별로 손해도 아니었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
* * *
키탄을 만난 지도 어느새 세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원랜 이렇게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는데, 떠나려 할 때마다 파괴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네가 파괴해 놓고 어딜 가?’ 하는 기분이었달까.
어차피 아리나도 상위 신성 마법 배워야 하기도 하고, 겸사겸사 일 벌인 거 책임도 지다 보니 이렇게 됐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
도시 복구도 완료했고, 아리나가 이론을 익히는 것도 얼추 마쳤다. 나머진 자습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했다.
사실 그것보단 솔직히 얘네가 수백 년 만에 처음 탄생한 성녀를 순순히 놓아주는 것 자체가 놀랍긴 하다. 원래는 본청에 붙잡아 놓고 절대 안 놔줄 줄 알았는데.
만약 놔준다 해도 호위 수십 명은 기본으로 붙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2급 성기사 둘이 끝이라니.
그동안 교단이 녀석을 금지옥엽 대하듯 했던 걸 생각해 보면 영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성녀님 본인의 의지셨습니다.”
“아리나의 의지요?”
“네.”
호위로 따라붙은 두 명 중 하나, 회장에서 같이 싸우기도 했던 프란시스가 스바의 난간에 기대 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절대로 여기가 아니라 레이튼에 머물 것이라 주장하시더군요. 호위도 거추장스럽다며 거절하셨습니다.”
“교단이 그걸 받아들였단 말입니까?”
아무리 권위 높은 성녀의 명령이라도 녀석의 안위와 관련된 문제인 만큼 교단도 순순히 물러날 순 없었을 거다.
대관절 무슨 깽판을 벌였기에 그걸 가능하게 한 거지?
궁금증에 고개를 돌리자, 아래의 환호하는 시민들을 향해 해맑게 손을 흔들고 있는 아리나가 보였다.
팔자도 좋다. 부담감으로 죽겠다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적응한 건가?
황당하게 서 있자니, 옆에 있던 프란시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저희가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안 그럼 성녀 때려치운다는데.”
“……진짜로 본인이 그렇게 말한 겁니까?”
“리안 님이 한번 말씀해 보시죠. 성녀 님은 원래부터 그런 성격이셨습니까?”
그렇긴 하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때만이기는 한데…….
그래도 고향이라고 정이라도 들었나? 설정엔 오히려 레이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썼었지만, 이것도 바뀐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리나의 권위 부스러기 같은 거라도 지켜주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녀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백만 신도들을 위해서.
프란시스도 내가 대답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는지 다시 아리나의 곁으로 달라붙었다.
그제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래를 바라봤다.
“리안 님! 그냥 여기 사세요! 저희 집이라도 드릴게요!”
“구원자님! 제발 저희를 떠나지 마세요!”
“레이튼. 나도 레이튼으로 갈 거야! 성녀님과 사도님이 거기 사는데, 이제 그곳을 본청이라 불러야 하지 않겠어?”
……어째 엘프 마을에서 봤던 광경의 재현인 거 같은데. 그보다 내가 사도라는 소문은 대체 언제쯤 사라질지 모르겠다.
설마 영원히 가는 것은 아니겠지.
불안감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리나와 마찬가지로 살짝 손을 흔들어 줬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환호를 일별한 뒤 스바를 향해 말했다.
“스바.”
―네.
“레이튼에 가기 전에 잠깐 어디 좀 들르자.”
―예. 알겠습니다.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나는 떠오르는 스바의 난간 위에 기대 앉아, 똑바로 말을 이었다.
“대물림의 숲.”
이제 그만 콘시의 봉인을 풀어 줄 때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