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79)
신관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당황으로 침묵하고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좋은 방향이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
“사, 사도님이 탄생하셨다!”
“거봐! 내가 분명 저분이 사도가 될 거라 했지?”
“그보다 뭐 해? 얼른 예를 표하지 않고!”
웅성웅성 떠들던 그들은 이내 내 쪽을 향해 무릎 꿇으며 부복하기 시작했다. 교황, 성녀, 사도급 최정상들에게만 향할 법한 예의다.
그 부담스런 대우를 받으며, 나는 그저 멍해져 있었다.
뭐지? 분명 사도 안 된다고 했고, 녀석도 순순히 받아들였을 텐데?
하지만 흑철검에서 나오는 새하얀 빛과 내재하고 있는 엄청난 양의 신성력은 어딜 봐도 진짜였다.
그렇게 온 세상에 ‘나 사도요’ 표현하고 있으니 저들이 저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는 법.
잠시 심호흡하고 양쪽의 손등부터 살폈다. 보통 사도는 그곳에 종교 고유의 문장이 문신 형태로 드러난다. 외부에서 본인을 증명할 방법 정도는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내가 살펴본 결과, 내 손등에는 그런 표식이 없었다. 이건 사도가 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조금 안심이다. 키탄이 내 의견을 무시한 건 아니었구나.
“모두 그만 일어나시지요.”
“하지만 사도님이…….”
“저는 사도가 아닙니다.”
부복하고 있던 이들이 당황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신성력이나 순수한 빛이나 어딜 봐도 사도가 아니라면 낼 수 없는…….”
“저도 따로 전해 들은 말이 없어 그냥 추측일 뿐입니다만.”
나는 상대의 말을 끊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키탄께서 직위는 없이 권능의 일부만 저에게 내리신 듯합니다.”
* * *
키탄 교 본청이 있는 중립도시, 뤼빈하이켄. 이곳은 최근 대륙을 강타한 사건 사고들의 근원지가 되어 있었다.
그중엔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있었는데, 근래엔 왠지 그냥 단순히 이상한 소식 하나도 들려왔다.
“그거 들으셨습니까? 이번에 우리 교단에서 성녀님에 이어 사도님까지 탄생했다 하더군요. 키탄 교 역사상 처음으로 말입니다!”
뤼빈하이켄 근방의 어느 작은 마을. 이번에 신참으로 들어온 경비병 하나가 신난 목소리로 열심히 떠들어댔다.
하지만 그걸 들은 선임은 뭔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했다.
“뭐? 자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아직 교단에 사도는 탄생하지 않았어.”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제가 분명 교단의 신관에게 직접 들은 소식입니다.”
“쯧쯧, 아무래도 견습 신관들 사이에서 소문이 잘못 돌고 있는 모양이군.”
“…….”
신참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견습 신관에게 들은 소식이 맞기 때문이다.
“그럼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래. 임명된 건 성녀님뿐. 사도는 여전히 공석이야.”
“쳇, 괜히 설렜네. 저는 또 그 구원자라는 분이 사도가 됐니 뭐니 구체적으로 얘기하길래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선임이 신참의 퉁명스런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럼 절반…… 아니, 4분의 3 정도는 맞췄다고 볼 수 있겠네.”
“예? 그게 무슨…….”
“그 구원자님께서 사도의 권능을 받은 건 맞거든.”
신참의 표정이 퉁명스러운 쪽에서 황당한 쪽으로 바뀌었다.
구원자가 사도의 권능을 받았는데, 사도는 탄생하지 않았다는 건 대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그런 의문을 짐작한 듯, 선임이 다시 한 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했듯, 사도의 권능을 받았다고 했지 직위를 받았다고는 하지 않았잖아.”
잠시 후 선임이 한 말의 의미를 해석해 낸 신참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설마…… 키탄께 힘만 받고 소속은 자유라 이 말입니까?”
“그렇지.”
“그게 무슨 책임 없는 쾌락도 아니고…….”
적어도 신참은 그런 경우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보통 주어지는 것만큼 뱉어 내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니까.
하물며 고위직으로 갈수록 이 현상은 더 뚜렷해진다. 그런데 대부분 종교에서 최정상 취급받는 사도가 먹튀라니!
“……교단에선 그래도 상관없답니까?”
“키탄께서 그러라고 하시는데 뭐 어쩌겠어?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구원자님이시잖아. 다들 처음에는 조금 놀란 듯한 분위기다가, 요즘은 그냥 그런갑다 하는 것 같더라.”
……그렇게 대충대충으로 되는 건가?
신참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납득했다.
어차피 일개 신도인 그가 참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도 하고, 뭣보다 구원자의 이름값이 그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상단의 재산을 풀어서 도시 재건에도 한몫했다던가.’
교단의 사람도 아닌데 목숨 걸고 그들을 지킨 걸로 모자라, 완벽한 후속 조치까지.
구원자 리안은 지금 수백 년 만에 처음 탄생한 성녀만큼이나 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아마 신전의 사람들도 비슷한 심정이었겠지. 다른 사람이 대상이었으면 아무리 키탄 님의 의지였어도 분명 불만이 나왔을 거야.’
고개를 끄덕인 신참이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 다시 선임을 바라보았다.
“그럼 혹시 받은 권능이 무엇인지도 아세요?”
“……권능?”
여태 자신만만하던 선임의 얼굴에 난처함이 깃들었다. 허나 신참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예! 사도라면 무조건 받는다는 그 능력이요! 예를 들어 저기 하늘의 신 닉스의 사도는 날씨를 조종할 수 있고, 수확의 신 플레라의 사도는 작물의 성장 속도를 10배는 높일 수 있다던데, 구원자님도 뭔가 있을 거 아니에요.”
“몰라.”
“……예?”
“모른다고.”
선임은 갑자기 실망스럽게 변한 신참의 눈을 회피하며 말했다.
“다른 사도들이야 500년 전부터 계속 존재했으니 권능이 뭔지 다 알려져 있지. 하지만 키탄께서는 이번에 사도의 권능을 처음 내리시는 거잖아.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아냐?”
“혹시 소문이라도…….”
“있지도 않지만, 만약 있더라도 말 못 하는 건 마찬가지야. 너는 그런 특급 기밀이 퍼지는 걸 신전에서 용납할 거 같냐? 이단 심문관 만나고 싶어?”
신참이 창백해진 얼굴로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이단 심문관의 고문 방법은 유명하다. 그리고 슬쩍슬쩍 퍼진 소문보다 실제가 훨씬 가혹할 거란 것도.
“알겠으면 그 얘기에는 그만 관심 꺼라. 추측이라도 하다가 걸리는 날에는 바로 잡혀가는 수가 있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관심 꺼야지요.”
선임은 입에 지퍼 잠그는 행동을 하는 신참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만큼이나 얘기했으니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어지는 다른 주제의 대화에서도, 신참은 계속해서 떠오르는 궁금증을 떨쳐 내지 못했다.
대륙의 주신이자 인간의 신인 키탄이 내린 권능은 대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 말이다.
* * *
“대체 권능이 뭔지 모르겠어.”
“……그걸 리안 님이 모르면 어떡해요?”
아리나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해는 한다. 검 못 드는 검사, 마법 모르는 법사 같은 느낌일 테니까.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다.
“키탄이 아무 설명도 안 해 줬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뭘 어떻게 알겠어?”
게다가 이건 설정으로 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원작에서도 키탄은 절대 사도를 임명한 적이 없으니까.
뭐 짐작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소리다.
아리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 한 눈초리였다.
“일주일이나 시간이 있었으면서 그런 건 얘기 안 하고 뭐 했대요?”
“여기서나 일주일이지, 거기선 끽해야 두 시간 정도였어. 게다가 다른 거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대체 키탄 님이랑 무슨 대화할 것이 그렇게 많으셨기에…….”
그러더니 녀석이 슬쩍 내 눈치를 살핀다. 간접적으로 궁금하단 걸 어필하고 있는 거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해 줄 생각 없으니 포기해. 어차피 대부분 개인 문제야.”
“요즘은 신한테 개인 문제 상담도 하나.”
아리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그래서 지금 저한테 그게 뭔지 알아내는 것 좀 도와 달라는 거죠?”
“응. 너도 요즘 신성마법 배우느라 바쁜 건 아는데, 아무래도 이런 쪽은 네가 그나마 가깝지 않나 싶어서.”
“제가 가진 신성력이 키탄 님의 힘과 가장 비슷하니까요?”
“그렇지.”
보통 교단에서 무력을 책임지는 것은 성녀와 사도다. 요컨대 둘이 힘의 궁합이 잘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거다.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역시 가장 먼저 실험해 본다면 이쪽이 맞다는 판단이다.
하긴, 힘은 빼고 권능만 받은 꼴이라 이것도 어디까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한쪽 구석에 있던 릴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는 왜…….”
“너는 결투.”
“……넹?”
저건 또 무슨 말투지.
신경 끄고 말했다.
“아리나랑 실험한다고 내 권능이 뭔지 알아낼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잖아. 혹시 싸움과 관련된 걸지도 모르니까 조금 도와 달란 거야.”
저래 봬도 릴리아는 5성급 마법사인 동시에 하급 정령사다. 듣기로는 연금술에도 꽤 조예가 있는 모양이고.
사실상 검만 빼고 전부 사용할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실험 상대로 딱 적당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녀석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제가 어떻게 스승님이랑……. 저, 저 같은 건 3초면 끝날 거예요.”
“진짜 싸우잔 거 아니니 걱정 마라. 그냥 권능이 뭔지나 좀 알아보려는 거니까 기운도 네 수준에 맞출 거야.”
“……그래도 버틸 자신 없는데, 그냥 근처에 한가한 성기사 하나 알아보시는 게…….”
“그런 사람 없어.”
본청뿐 아니라 도시 역시 지하 금지에서 나온 존재들에게 당한 상처로 지금 난리도 아니었다.
무슨 저주 걸린 마검에 먹힌 사람이 이리저리 설치고, 착용자 없는 갑옷이 여기저기 날아다녔었다나?
1급 성기사 듀크가 나선 덕분에 인명 피해는 거의 없었다고 하지만, 아직 사람 손이 닿아야 할 곳이 많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걔네한테 부탁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사도직 받은 적도 없건만 대우는 사도 대하듯이 하려고 해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적당하면 모르겠는데, 녀석들은 좀 과하단 말이지.
그 모습을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그걸 본인 탓이라 생각했는지 릴리아가 울상을 지었다.
“하, 하면 되잖아요……. 할게요, 결투……. 치료는 제대로 해 주시는 거죠?”
“……아니, 다치게 할 생각 자체가 없는데. 그냥 가볍게 실험만 하는 거라니까?”
그렇게 안심시켜 줘도 녀석은 계속해서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얘가 왜 이러지 싶다가, 엘프 마을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엘프들에게 결투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걸고 하는, 거의 목숨을 건 싸움이었지?
나부터가 그대로 써먹어 놓고 잊어 먹을 줄은 몰랐다.
일단 빠르게 릴리아에게 사과하고, 인간들에게 결투는 생각보다 흔하게 하는 장난 같은 거라고 말해 줬다. 그제야 녀석이 조금 안정된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레이튼 도착하고 나면 얘한테 관습 선생 같은 거라도 붙여 놔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아리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먼저 기본 신성마법인 힐링부터 실험해 보자.”
최소한 오늘 안에는 받은 권능의 실마리라도 잡아 볼 계획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