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78)
어쨌든 궁금했던 거 대부분이 해결되기는 했는데…….
잠시 망설이고 있자, 키탄이 허공에 시계 하나를 투영했다.
“아직 질문 남아 있으면 빨리 물어보는 게 좋을걸. 이제 시간 별로 안 남았거든.”
그 말에 잠시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돌아갈 방법은 있어?”
“돌아가? 어디, 지구?”
그냥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키탄이 그런 나를 보고 갸우뚱했다.
“뭐, 방법은 있는데…….”
있다고?
솔직히 없을 거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다른 누구의 힘도 아닌, 내 영혼이 이끌려서 온 거라 했으니까. 이 세계 주신인 저 녀석조차 나를 데려올 방법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 방법이 뭔데?”
“그보다 두 개만 묻자.”
“뭘?”
“돌아간다는 건, 지금 당장을 얘기하는 거야?”
“아니. 여기서 해야 할 일을 전부 마친 후에.”
이건 얼마 전에 고민을 끝낸 문제다.
책임감이래도 좋고, 미련이래도 좋다.
아무리 내가 만든 게임과 관련이 없다고 해도, 나는 이 세계와 이미 정이 들어 버렸다. 정확히는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맺은 관계가 그리 의미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돌아간다 해도, 그건 이곳의 멸망을 막은 후. 그렇게 정했다.
키탄은 오묘한 얼굴로 말했다.
“해야 할 일을 전부 마친 후라는 건, 역시 이계 침략을 얘기하는 거지?”
“…….”
“그 정도는 말해 줘도 상관없을 거 같은데. 어차피 달라질 게 없기도 하고.”
“……맞아.”
조금 고민하고 대답하자, 키탄이 황당한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그때쯤 되면 네가 이 세계 왕이 되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점인데, 그 상황에서 돌아간다고? 너 지구에서 어디 대통령쯤 돼?”
“……네가 대통령은 또 어떻게 아냐?”
컴퓨터도 모르던 게.
“지구에 대해 알아보고 살짝 엿보다가 알게 됐어. 그보다 대답은?”
“……대통령도 아니고, 아직 돌아갈 거라 확정 지은 것도 아니야. 두 번째 질문은 뭐야?”
“그건 됐어. 대통령쯤 되냐는 게 두 번째 질문이었거든.”
키탄은 뭐가 웃긴지 한참을 피식거렸다.
“하여간 인간들은 특이하다니까. 권력이나 돈 같은 물질적인 거에 목 매단다 싶다가도 고향이나 추억 같은 정신적인 거에 이끌리기도 하니 말이야.”
“그래서, 꼽냐?”
왠지 기분 나빠져서 한 번 이죽거려 봤다. 키탄이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 떨었다.
“아니. 내가 이래 봬도 여기 주신임과 동시에 인간들의 신이기도 하잖아. 그런 점 좋아해.”
“어쨌든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나 말해 봐.”
“아마 네 생각보다 더 간단할걸?”
키탄은 목에다가 손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그리고 켁, 손날을 긋는 듯한 흉내를 냈다.
“자살해.”
“……뭐?”
“자살하라고.”
“…….”
저게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살짝 얼굴을 보았지만, 농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내가 죽으면 지구로 돌아가기라도 한다는 거야?”
“아니, 죽는 건 진짜 그냥 죽는 거야. 내가 말하는 건 자살뿐이지.”
키탄은 장난스런 동작을 풀어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네 영혼은 이 세계와 궁합이 잘 맞기도 하지만, 차원을 넘어왔는데도 손상이 거의 없을 정도로 강하기도 해. 만약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을 만큼 이곳이 싫다는 의지를 보여 준다면, 네 영혼도 그만 포기하고 지구로 돌아가겠지.”
“…….”
여기 오고 나서 지금이 제일 머리가 복잡했다. 충격적이어서가 아니라, 생각보다 너무 쉬워서.
지구에 있을 때야 스스로 목숨을 끊니 뭐니 하면 곧바로 거부감부터 들었겠지만, 여기 몇 년 살며 생명에 대한 인식은 비교적 희미해진 상태다.
어쩌면 돌아갈 수 없을 거라 반쯤 포기하고 있기까지 했는데, 지금 당장……. 아니, 이 세계 온 당일에도 가능한 방법이었다니.
게다가 죽음은 그다음이 보장되어 있지 않기에 무서운 것이지, 다시 깨어날 수 있다면 두려울 것도 없지 않나. 일종의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키탄이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왜? 생각보다 간단해서 맥 빠져?”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하고.”
“복잡한 기분이란 뜻이구나. 이해해. 고르기 쉽다는 게 만만한 선택이란 뜻은 아니니까.”
녀석은 뭔가 심오한 소리를 지껄이더니, 아까 띄워 놓은 시계를 바라봤다.
“그보다 시간 됐다. 슬슬 다시 인간계로 돌아가야 할 때야.”
“잠깐, 아직 보상에 관한 걸…….”
“그건 돌아가는 순간 알게 될 테니 걱정 말고.”
걱정밖에 안 되는데.
그렇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이미 어떠한 힘이 나를 끌어당기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이어 순식간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조금 억울하다. 이렇게 찜찜하게 만들어 놓고 끝이라고?
나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저항하겠다고 강하게 염원했다. 그러자 나를 당기고 있던 압력이 조금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조금 많이 놀라운데. 아무리 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지만, 법칙에 대항을 해?”
여전히 어두컴컴한 사위로, 키탄의 놀란 듯한 목소리만 들려왔다.
“하지만 딱히 저항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그런다고 이득 될 건 없거든.”
굳이 말 안 해 줘도 나는 이미 저항을 멈췄다. 어느 순간 상상도 못 할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곧바로 허공에 두둥실 뜨는 느낌이 나고, 녀석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희미하게 멀어져 갔다.
“나도 네가 나중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궁금하네. 어느 쪽이든, 너에게 만족스러운 결과가 되기를.”
* * *
“끄아악!”
앞이 보이자마자 비명부터 질렀다.
지금까지 나름 고통에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다.
내 존재 자체가 깎여 나가는 느낌.
살가죽은 물론 뼛속까지 발라 놓고 내 근원 자체를 바늘로 찌르는, 그런 기분이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주위에 있던 신관들이 내게 곧장 달려들어 신성력을 퍼부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직도 여전한 고통이…….
“…….”
뭐지? 없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하던 느낌이 깔끔히 사라져 있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관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이거 왠지 엄청 무안한데.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아…… 근데 왜 비명을 지르셨던 건지…….”
“평소에 지병이 조금 있습니다. 오랫동안 잠잠했는데, 오랜만에 도진 것 같군요.”
“저런…….”
신관들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뭔가 딱한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 같지만, 갑자기 혼자 비명 지르는 미친놈보단 그게 더 낫겠지.
나는 조금 차분을 되찾은 다음, 주위를 둘러봤다. 위치는 접견실 그대로였다. 다만, 수십 명 넘게 있던 신관은 단둘뿐이고 교황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갑자기 머릿속에 옛날에 봤던 영화 내용이 하나 떠올랐다.
다른 행성에 몇 분 정도 있다 돌아왔더니 정작 원래 있던 곳은 몇십 년이 흘렀다는 설정이었던가.
끽해야 몇 시간 정도 차이 난다는 걸 알고 갔던 거기는 하지만, 순간 불안해졌다. 이것 역시 달라지지 않았을 거란 보장이 없으니까.
옆의 신관에게 황급히 물었다.
“혹시 제가 사라진 후 시간이 많이 지난 겁니까?”
“예. 교황님 말씀으론 역대 최고 기록이라 하더군요.”
신관이 부럽다는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쟤네 입장에선 본인들 신과 오래 만날 수 있다면 그만한 영광도 없겠지.
하지만 정작 나는 불안감만 더 커질 뿐이었다.
“그게 얼마나 되는지······.”
“놀라지 마십시오. 무려 일주일입니다!”
다행이다. 돌아왔더니 몇 년 만의 귀환이다, 이런 전개가 아니어서. 만약 그랬다면 계획 다 꼬이는 거였는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수십 명의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구원자님이 돌아오셨다는 게 정말인가?!”
“저기, 저기 계신다!”
그들은 순식간에 내 주위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키탄께서는 정말 본청의 석상과 같은 모습이냐부터 시작해서, 혹시 사도직을 제안받지 않았냐는 날카로운 질문까지.
그래도 선은 지키는 건지 무슨 대화를 나눴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어쨌든 충분히 이해 가는 반응이었기에 내 나름대로 성심성의를 다해서 대답해 줬다.
“키탄께서는 석상과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하면……?”
“눈은 입 부분에 걸려 있고, 입은 눈 부분에 달려 있더군요. 코는 위로 거꾸로 매달린 형상입니다.”
신관은 반신반의하는 얼굴을 하였다.
“……그게 정말입니까?”
“지금 제가 그분의 신전 안에서 거짓이라도 말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디 신을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마시길. 아, 그리고 사도직은 제안받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질문을 날렸던 성기사가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구원자님이라면 분명 키탄 님께서도 탐낼 만한 인재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쉽게도 제가 그분의 눈에 들기엔 조금 모자랐던 모양입니다.”
성기사가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물론 압니다. 오히려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신 것 같아 영광일 따름입니다. 그보다, 더 질문 남으신 분은 없으십니까?”
물어보고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망설이는 기색이기는 한데, 손을 들 기미는 없다.
아마 궁금한 건 남았지만 실례를 저지르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거겠지.
굳이 그런 것들까지 나서서 해결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실제로 대답해 주기 곤란한 것들이 대부분이기도 하고.
중간부터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뒤, 엉덩이를 털었다.
“더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침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중에라도 생각나는 질문이 있으면 부담 없이 오셔도 됩니다. 아, 선물은 빼고요.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몇 번이고 강조한 다음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구원자님.”
신관 하나가 검집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여기 착용하고 계시던 검입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으시기에 따로 보관 중이었습니다.”
하긴, 정신만 날아갔지 몸은 여기 그대론데 일주일 동안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곤란했을 거다. 나 역시 길어야 몇 시간 정도 예상해서 따로 스바에 넣어 놓든가 하지도 않았고.
“혹시 기분이 나쁘셨다면…….”
“아닙니다. 보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네 오는 검을 받으려 팔을 뻗었다. 그리고 내 손과 검이 맞닿은 찰나.
화아악!
엄청난 빛이 나와 내 무기를 감쌌다. 신성력이었다.
나는 잠깐 당황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이게 대체 뭔 짓거리지……?
그때, 내게 검을 건넸던 신관이 감격에 가득 찬 얼굴로 무릎 꿇으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서, 성녀님에 이은 사도님의 탄생이다! 키탄께서 구원자님을 사도로 임명하셨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