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77)
“……내가 미래를 본 게 아니라, 미래를 겪고 돌아온 거라고?”
“어디까지나 인간 기준으로 설명했을 때 이야기야. 하긴, 너희 입장에선 어차피 큰 차이 없겠지만.”
“…….”
저 녀석의 잘난 척이야 어쨌든, 생각해 보지 못한 관점이다.
내가 애초에 여기 속한 영혼이었단 거나, 내가 만든 게임과는 사실 별로 관계없다는 거나.
내가 만든 세상이라는 상상은 이미 옛날에 버렸지만, 솔직히 어떤 식으로든 관련은 있을 거라 여겼는데…….
잠깐.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그럼 시스템 창은?”
“시…… 뭐?”
“시스템 창. 몰라? 네가 보낸 메시지도 있었는데.”
정산은 만나서 하자든가, 종들을 구해 준 게 고맙다든가. 정황상 어딜 봐도 키탄이 보냈던 메시지 아닌가.
그래놓고 이제 와서 모른 척한다는 건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키탄은 뭔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건 네 인식대로 이 세계를 받아들인 결과겠지.”
“……내 인식?”
“그래. 너는 무의식적으로 이 세계를 겪고, 그걸 게임으로 만들었다 했지?”
아니, 그건 네가 한 이야긴데. 나는 아직 반신반의하는 중이다.
녀석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그 시스템 창이란 건 네가 만든 게임에 나오는 걸 거야. 그렇지?”
“그렇긴 해.”
“그러니까 그건 초창기에 이 세계를 게임으로 인식하던 너의 정신체와 이 세계를 근본으로 두고 있는 너의 영혼이 융합한 결과로 나온 결과라고 볼 수 있겠네.”
“……너 지금 그냥 적당히 둘러대고 있는 거지?”
말투를 보든 얼굴 표정을 보든 아까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뭔가 대충대충인 느낌이랄까.
녀석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뭐, 나라고 뭐든지 알 거라는 생각은 버려. 애초에 네 존재를 눈치채는 것도 꽤 걸렸고.”
“……그럼 네가 보낸 메시지는?”
“내가 세계의 뒤틀림을 감지해서 그 중간에 살짝 간섭한 것뿐이지. 언젠가부터 그 시스템 창인지 뭔지가 조금 이상해지지 않았어?”
확실히, 스바를 얻으러 간 유적지였나. 그때부터 시스템 창이 메시지를 이상하게 띄우더니 뭔가 사설이 많아지긴 했다.
그러니까 저 말 자체는 성립한다는 소리다.
“그럼 포인트는 뭔데? 그냥 폼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세계 시스템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수준이었어.”
“포인트가 뭔지도 역시 모르겠지만……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이면 주는 주체가 누군지는 당연한 거 아니겠어?”
“……이 세계가 나한테 지급하는 거라고?”
“정답.”
키탄이 피식 웃으며 짝짝 박수를 쳤다. 나는 곧바로 녀석에게 물었다.
“그럼 이번에 주는 포인트엔 네가 어떻게 간섭한 건데?”
“뭐 착각한 모양인데, 나는 그 포인트인지 뭔지에 간섭한 적 없어. 애초에 할 수도 없고. 내가 가능한 건 그냥 보내는 메시지에 조금 간섭하는 정도지.”
아니, 하지만 분명 긴급 구제 포인트를 준다는 메시지가 나오다 말았었는데?
재빨리 시스템 창을 열어 확인해 봤다.
[현재 포인트: 6,500]
“…….”
정말 녀석의 말대로, 포인트는 제대로 지급되어 있었다. 그냥 메시지를 씹었을 뿐이라는 건가?
이 새끼가 괜히 헷갈리게 하고 있어…….
순간 발끈할 뻔했지만, 꾹 참았다. 단순히 메시지만 보고 확인 작업 한 번 안 거친 나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까.
나는 손가락으로 인중을 짓누르고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대로면 포인트 지급이든 사용이든 네가 관여하는 건 하나도 없다, 이거지?”
“그렇지.”
“지급되는 기준이 뭔지도 모른다는 거네?”
“애초에 그런 게 있다는 것도 지금 알았는걸 뭐. 당연히 하는 짓 보고 뭔가 더 있겠다 하는 생각은 했지만.”
“…….”
저 말 역시 진실처럼 들린다. 사실 저 녀석이 굳이 나를 속일 만한 이유가 없기도 하고.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기는 한데…….
그러면 재앙과 관련된 일에서 포인트를 많이 주는 것도 키탄과 무관한 일이라는 건가?
타냐에 대한 건 둘째 치더라도, 이쪽은 분명 녀석의 의지가 들어갔다 생각했는데.
머릿속이 좀 복잡하다.
나한테 일어난 일이 예상했던 어떤 것과도 맞지 않아서일까.
잠시 눈을 감고 있는데, 키탄이 히죽 웃으며 불쑥 말했다.
“그보다 너, 혹시 내 사도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뜬금없이 뭐야?”
무슨 보험 권유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다른 데 써야 할 힘이 많아서 별로 둘 생각 없었는데, 지금 보니 너 만한 적임자도 없겠다 싶어서. 앞날 창창하지, 신도들한테 인기 많지. 어때? 너한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거 같은데.”
“일 없다. 내가 어디 소속되는 게 좋지 않다는 건 너도 잘 알 거 아니야.”
“아니, 모르는데.”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여태까지 미래니 과거니 다 의미 없다는 듯 얘기해 놓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도 모른다고?”
“부분적인 정도야 알지. 그리고 미래나 과거나 큰 의미 없다는 건 인과관계 관점에서 얘기한 거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기준에선 중요한 게 맞아.”
“……그러면서 잘난 체는 왜 했어?”
“글쎄. 난 그런 적 없는데, 만약 그렇게 느꼈다면 네 열등감의 표출 아닐까?”
“…….”
진짜 신만 아니면 줘 패고 싶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길 수 있다는 확신만 있었어도…….
지금 전투력이면 하급 신 정도는 손쉽게 이길 거 같은데, 역시 주신 취급 받는 키탄에겐 무리일 거다.
아무리 녀석이 이곳저곳 힘을 분산시키고 있다 해도, 남은 기운만으로 웬만한 전투 신은 쌈 싸 먹을 놈이니까.
일단 아이언에 이어 나중에 보복할 놈 리스트에 추가하고 있는데, 녀석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미래엔 대체 어떻게 되길래 네가 다른 데 소속되면 안 좋다는 거야?”
“네가 그건 왜 궁금한데?”
분명 원작대로라면 신들은 미래에 큰 관심이 없다. 예언가들의 말에도 어차피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무시하기 일쑤니까.
“내가 말했잖아. 너는 미래를 본 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겪은 거라니까? 이 차이를 이해 못 하겠어?”
“어. 못 하겠는데.”
예언가의 예언도 말로 내뱉은 순간부터 확정되는 건 비슷하지 않나.
그런 의미를 담아 키탄을 바라보자, 녀석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건 꼴이군. 저런 보물 같은 경험이 그 가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들어가 있다니.”
“잘난 척 그만하고 제대로 얘기해 봐. 둘이 뭐가 다르단 건데?”
키탄은 몇 번이고 나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포기한 듯 설명을 시작했다.
“아까 시간은 사실 띄엄띄엄 떨어진 점 형태라 얘기했던 건 기억하지?”
“그런데?”
“그럼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어지지 않았는데 서로 영향을 미칠 리가 없잖아.”
“…….”
알 듯 말 듯한 오묘한 이야기다. 일단 잠자코 듣기로 했다.
키탄은 귀찮은 기색을 내비쳤던 것과 달리 허공에 신성력을 형체화한 점까지 찍으며 열정적으로 나왔다.
“사실은 이 점 수백억 개가 완전히 겹쳐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현재가 엄청나게 많다고 할까? 그만큼 존재하는 변수 하나하나에 대응할 수 있는 미래도 있는 거지.”
“그게 나와 예언가의 미래에 무슨 차이가 있는데?”
“너희들이 예언가라 부르는 녀석들이 하는 건 결국 그 수백억 개의 미래 중 하나를 보는 것에 불과해. 언뜻 보면 그 말대로 된 거 같아도, 실제론 이것저것이 바뀌었다는 거지. 하지만 너는 달라.”
뭐가 다르냐고 물으려는데, 그보다 먼저 키탄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매우 진중한 목소리로.
“네가 겪은 미래…… 그건 사실상 이 시점 세계의 원래 ‘결말’에 가까워.”
“……결말에 가깝다고?”
“정확히는 ‘원래’ 결말. 회귀자인 네가 이 세계로 돌아오면서 그 바뀌는 변수가 오직 하나로 고정되어 버렸거든. 그리고 그 변수는…….”
녀석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왜인지 다음으로 올 이야기는 예상이 갔다.
“바로 너야.”
역시.
“그렇군.”
“……뭐?”
내가 태연하게 반응하자, 키탄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저 얘길 듣는 순간 놀람이나 부담으로 까무러칠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21세기 지구인. 하루에도 수천 개의 창작물이 쏟아지는 곳 출신이다. 저것과 비슷한 설정은 수도 없이 봤다는 소리다.
게다가 어차피 이 세계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기에 별로 달라질 것도 없었고.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녀석을 향해 말했다.
“그냥 나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하면 되는 걸 왜 그리 꼬아서 얘기하는 거야?”
역시 잘난 체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리 생각하고 있자, 키탄이 양손으로 얼굴을 푹 가렸다. 그리고.
“하, 하하, 하하하!”
갑자기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뭐지? 미친 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기미가 보이긴 했는데.
내가 거리를 벌리는 와중에도 키탄은 계속해서 웃었다. 그러길 1분쯤 지났을까. 녀석이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후……. 미안, 미안. 그냥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어서.”
“……엉뚱한 생각?”
“응. 보물이 가야 할 사람한테 제대로 갔다 싶었달까. 아, 아까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 했던 건 사과할게.”
“뭐…… 그건 됐는데.”
애초에 별로 신경 쓴 적 없기도 하고.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야겠다.
“그보다 그런 거라면 나는 너한테 미래 가르쳐 줄 생각 없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흠…….”
녀석은 내 말에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겪은 미래가 별로 좋은 결말은 아니었나 보지? 거기다 나한테 그걸 알려 줘서 얻을 이득보다 이야기가 바뀌는 게 더 손해라 본 거고.”
“정확해. 혹시 이게 마음에 안 든다면…….”
“아니, 됐어. 네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런 거겠지.”
생각보다 순순하다. 나한테야 좋은 일이었지만.
나는 그 이후로도 키탄에게 준비해 온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역시 지금 이 신체의 정체였다.
키탄은 심드렁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아, 그거? 아마 세계가 만든 거 같은데. 뭐, 원래 주인이 있었다거나 하는 건 아니니 죄책감 가질 필욘 없어.”
“……그런 건 안 가져. 애초에 내가 원해서 여기 들어온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여기 와서 처음 만난 양아치 말에 따르면 나 들어오기 전에도 일단 활동은 한 모양이던데?”
“그건 그냥 그놈의 인식을 조금 손본 것뿐일 거야. 실제로는 네가 여기 온 후부터 존재했다는 소리지. 일단 축하해.”
대체 뭐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녀석이 피식 웃었다.
“회귀로 모자라서 세계가 직접 만들어 준 몸에 환생까지 한 거잖아? 2관왕 달성했네. 인간들 사이에선 축하할 일이라 생각하는데.”
“……지랄.”
“왜? 빙의까지 3관왕 못 해서 아쉬워?”
“…….”
나는 속으로 ‘참을 인’ 자를 새기며, 보복할 놈 리스트에 녀석의 이름을 아이언 앞으로 옮겨 놓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