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76)
눈앞이 어두워짐과 동시에 두둥실 뜬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어느새 은은한 광채가 도는 새하얀 신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건물의 형태 자체는 키탄 교 본청과 똑같지만, 이곳은 자재 하나하나에 엄청난 양의 신성력이 깃들어 있다. 근처 벽돌 뽑아다 가져가면 성물 취급도 받을 수 있을 거 같달까.
그렇게 주변을 구경하다가, 슬쩍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근데 이걸 정신이 날아온 거라고 표현할 수 있나?
설정 자체를 그런 식으로 표기했다 보니 멋대로 생각하기는 했는데, 차이를 모르겠다. 정신이란 게 정말 따로 있는지조차도 모호하고.
촉감도 정상이고 시각, 후각, 미각 역시 멀쩡했다.
대체 뭐가 달라진 거지?
몸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팔다리 잘 달려 있고, 눈, 코, 입 잘 붙어 있고. 머리카락도…….
……뭐지? 뭔가 이상하다. 갑자기 짧아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거울은 없었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금속 물질은 있었다. 곧바로 거기에 모습을 비췄다.
깔끔하게 자른 검은색 투블럭. 대충 차려 입은 청바지에 반팔 티셔츠. 딱 봐도 현대인 같은 피곤에 절은 눈초리까지.
안에 있는 건 나였다. 그러니까…… 지구에서의 나 말이다.
인식하고 보니 팔다리도 붙어만 있을 뿐이지,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조금 짧아졌…… 이건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그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정신체로만 들어올 수 있는 곳에서 갑자기 몸이 바뀌었다면, 그건 내 정신이 아직 한국의 나에게 머물러 있다는 소리겠지. 자아라고 해도 좋을 거다.
그 사실이 조금 안심되는 동시에 씁쓸하게 다가온다. 결국 나는 이방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
이놈의 상상은 몇 번을 반복해도 잊을 만하면 또 나타나네.
잡념을 털어 내고 입구를 돌아봤다.
지금 중요한 건 이 모습을 하고 나타난 나를 상대로 키탄이 어떻게 나오느냐다.
지금까지의 정황과 달리 내가 이곳의 사람이 아니란 걸 모른다면 어리둥절한 반응일 것이고, 만약 녀석이 나를 여기 데려온 장본인이면…… 그냥 덤덤히 있겠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밖으로 나섰다. 곧이어 나온 기다란 복도를 지나자 내 덩치의 5배는 될 법한 큰 문이 나왔다.
얼마 전 아리나의 임명식을 진행했던 회장이었다.
앞에 서서 망설이다, 손으로 얼굴을 짝짝 쳤다.
지금 이러고 있는 시간도 아깝다. 내가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벌컥, 하고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리고.
“어서 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
나는 드디어 이 세계의 주신. 키탄과 만났다.
* * *
“앉을 곳이 없어서 미안하네. 알다시피 내가 손님 맞을 일이 별로 없다 보니.”
금발의 남자, 키탄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 말대로, 회장 내부는 휑해도 이렇게 휑할 수가 없을 정도다. 대륙 본청에는 의자나 책상이 세기도 힘들 만큼 많았는데, 여기는 교황이 앉던 자리 뒤쪽의 수정 구슬이 다다.
별로 신경 쓰이는 요소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 사납게 하는 물건들이 없어서 더 좋다.
나는 대답 없이 서서 키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래? 혹시 환영 인사 같은 거라도 기대하고 있는 거야?”
키탄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으로 신음을 흘리더니, 난처한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딱히 준비한 게 없는데. 보통 신도들한테는 진중한 모습을 꾸며서 보여 줘야 하거든. 신이란 놈이 폭죽 같은 거라도 터뜨리면 웃기잖아. 강아지 만드는 거라도 보여 줄까?”
그러면서 손으로 뭔가를 빚기 시작한다. 자세히 보니 신성력으로 만든 강아지 형체였다.
나는 저 웃기는 짓거리에 호응해 주지 않고 담담히 물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
“뭐야, 시시하게.”
키탄은 김빠진 듯한 얼굴로 손을 홰홰 젓고는 말했다.
“누군지 아냐는 건 뭘 말하는 거지? 혹시 철학적인 질문이야?”
“말장난하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 이러려고 너 만나러 온 게 아니니까.”
“거, 까칠하기는.”
네가 내 입장이 돼 봐라. 안 이럴 수가 있나.
만약 내게 주어진 시간이 더 많았다거나 녀석에게 궁금한 것이 별로 없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세계 왔을 때부터 계속 가지고 있던 의문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는 순간 아닌가.
아닌 척하고 있지만, 사실 긴장 때문에 계속해서 손바닥에 땀이 고이고 있다.
나는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편 뒤, 재차 물었다.
“다시 한 번 질문한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
키탄은 한동안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이내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재미없게 구네. 그래. 안다, 알어. 아이언의 제자 단테인 동시에, 레이튼 출신인 리안이잖아?”
“그 둘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을 텐데.”
“뭐, 네가 지구인이라는 거?”
……역시.
알고 있을 거라 생각은 했다. 일단 지금 내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했으니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지.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것도 너냐?”
“모함은 그만해 줄래. 나한테 그럴 능력 없다는 건 너가 더 잘 알잖아?”
“내가 아는 네 능력이라면 지금 네가 나에 대해 아는 것도 이상해.”
“……그래? 그건 또 예상 밖인걸.”
녀석은 잠시 고민에 빠진 것처럼 하늘을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네 기준에서 생각하다 보면 그 정도 각색은 일어났을 수도 있겠네.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지.”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살짝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물었는데, 키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오히려 반문해 왔다.
“네가 만든 게 뭐야?”
“만든 거?”
“이 세계를 배경으로 뭔가 창작했을 거 아니야. 소설이든 만화든 연극이든.”
“…….”
이 세계에서 죽을 때까지 못 들어 볼 거라 생각했던 말이다.
바이론조차도 나보고 세계를 창조하고 가지고 노니 뭐니 했을 뿐, 저런 유희거리는 떠올리지 못했다.
정확히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쪽에 가깝겠지만.
그 누가 본인들 인생이 한낱 창작물로 소모된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겠는가.
나는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게임이다.”
“게임? 보드 게임 같은 걸 얘기하는 거야?”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그거랑은 달라. 실물이 아니라, 컴퓨터 속에 존재하는 디지털 데이터 같은 거니까.”
“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게임이란 말이지. 그건 또 의외인걸.”
키탄이 대충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게 연기가 아니라면, 아무래도 진짜 몰랐던 거 같은데…….
“정말 네가 나를 여기로 데려온 장본인이 아니야?”
“그렇다니까. 애초에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런 방법도 몰라. 지구라는 이름도 내가 얼마나 어렵게 알아냈는데.”
“그럼 나를 여기로 불러낸 게 누군데?”
내 질문에, 키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시큰둥하게 말했다.
“너를 여기 불러낸 건, 다름 아닌 너야.”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나를 불러?”
“정확히는 네 영혼이라 할 수 있겠네. 진짜 그런 게 있냐고는 묻지 마. 나도 정신체도 반신반의하는 인간한테 설명할 자신은 없으니까.”
“…….”
뭔가 무시당한 기분이다. 고차원의 존재들이 가지는 선민의식 그런 건가?
아무튼,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내 영혼이 왜 나를 이 대륙으로 불렀다는 건데?”
“사실 반대야. 원래 여기 태어났어야 할 영혼이 지구 쪽으로 잘못 갔다 하는 게 맞겠지.”
“……내가 여기 태어날 사람이었다고?”
키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전후 관계를 잘못 인식했다 할 수 있지.”
“……하지만, 내 정신체는…….”
“지구의 모습이라고? 봐 봐. 내가 이래서 설명하기 싫었다니까.”
키탄은 거만한 기색으로 눈을 감더니, 고개를 젓고 이어서 말했다.
“영혼은 신체, 정신과는 달라. 네 자아가 어떻든 간에, 근본은 이곳에 속해 있다는 거지.”
“……일단 네 말이 맞다고 치자. 그런데 그게 자주 있는 경우인가?”
녀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확실히 흔한 경우는 아니야. 특히 네 영혼은 이 세계와 궁합이 어마어마하게 잘 맞거든. 다른 세계로 떠밀려 갔으면서도 이곳의 삶을 엿볼 수 있을 정도로. 보통 그 수준이면 어떻게든 다시 태어나는 게 정상인데…… 생각보다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나 보지?”
딱히 그런 쪽으론 생각해 본 적 없다. 죽고 싶지 않아 하는 건 맞았지만, 세상 누군들 죽어 보고 싶겠냐고.
어쨌든, 키탄의 얘기에는 한 가지 허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 영혼이 이 세계와 잘 맞아서 지구에서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엿볼 수 있었다는 거지? 내가 그걸 게임으로 만든 건 무의식적으로 받은 영향으로 인한 결과물이고?”
“그렇지. 설명 안 해 준 것도 알아서 잘 이해하네. 어쩌면 영혼에 관한 사실도…….”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
내가 말을 끊어 버리자, 녀석이 툴툴거렸다.
“또 뭔데? 하여간 의심만 많아서.”
“내가 본 건 이 세계의 현재 삶이 아니야. 정확히는 미래 모습이지.”
“아, 난 또 뭐라고.”
키탄이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이번에도 역시 인간과 시공간의 상대성에 대해 토론할 생각은 없으니까 대충 설명할게. 너는 이 세계의 미래를 본 게 아니야.”
“……미래가 아니라고?”
그럴 리가. 몇 가지 바뀐 것들은 있어도, 대부분 커다란 사건들은 내가 만든 게임 그대로 진행됐다.
그런 게 미래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의문스레 쳐다보자, 녀석이 턱을 괸 채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정확히는 미래가 맞기는 한데,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할 수 있겠네.”
“……또 말장난을 할 생각인가?”
“그런 게 아니라, 진짜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어서 그래. 음…… 인간식으로 말하면 뭐라 해야 하나…….”
키탄은 잠시 눈을 감더니, 얼마 안 지나 번쩍 뜨고 말했다.
“아, 그래! 여기도 인간 세계와 흐르는 시간이 다르단 거는 알고 있지? 그거랑 비슷한 거야. 원래 시간이란 게 연속된 선처럼 보이지만, 사실 띄엄띄엄 새겨진 점에 가깝거든.”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네가 지구에서 본 건 앞으로 일어날 일임과 동시에, 이미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는 거지.”
“…….”
솔직히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 못 하겠다.
그래서 미래라는 건지 과거라는 건지.
키탄은 그런 내 얼굴을 보더니, 보란 듯이 크게 한숨 쉬었다.
“이 정도로 설명해 줘도 인간은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잘난 척은 됐고, 이제 그만 알아듣게 설명해 봐.”
“……그럼 진짜 인간 수준에 맞춰서 얘기해 줄게.”
키탄이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더니 나를 마주 봤다. 그리고 담담히 말했다.
“굳이 따지자면 너는 미래를 보고 온 게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그때를 겪고 돌아온 거야. 요컨대 회귀했다 할 수 있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