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175화 (175/225)

너의 코드가 보여 (175)

“네가 성녀 권한으로 제발 다 꺼지라고 좀 해 봐.”

“그거 말도 안 되는 부탁인 건 아시죠?”

“지금 네가 말했는데 안 되는 건 없을 거 아니야.”

진저리치는 내 말에 아리나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성녀 발언이 세대도 리안 님 병문안까지 막을 순 없을걸요. 저보다 인기가 더 높으신 거 같은데.”

“농담 마라. 진짜 같으니까.”

“농담이 아니니까 진짜 같이 들리죠. 됐고, 이거나 먹어요.”

그러면서 과도로 깎은 사과를 건네 온다. 드라마 같은 데서 자주 보던 토끼 모양이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여기에도 이런 게 있었던가. 포크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이 세계 오고 몇 가지 안 되는 좋은 점이라면 과일이 지구보다 맛있다는 것이다. 곧바로 풍부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이게 병문안 선물로 받은 것만 아니면 더 좋았을 텐데.

“사과 이제 몇 개나 남았어?”

“백 개 정도 세다가 포기했어요. 그래도 두 배 넘게 남아 있더라고요.”

그 숫자라면 나도 단념했을 거다. 보고만 있어도 속이 물리는 느낌이다.

“……신관들한테 좀 나눠 주자.”

“사과는 신관분들이 준 건데요?”

“그러면 성기사들한테 줘.”

“음……. 그럼 성기사님들이 준 고기는 신관님들한테 나눠 줄까요?”

“그건 됐어. 아마 삼 일 내로 다 먹을 거야. 너랑 릴리아도 있으니까 넉넉하겠지.”

“그래요, 그럼.”

아리나는 곧바로 수긍하고 사과를 하나하나 따로 싸기 시작했다. 아마 줬던 걸 되돌려 준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그러는 듯했다.

쟤가 은근히 저런 부분에서 꼼꼼하단 말이지. 눈칫밥 전혀 안 먹고 자랐을 성격인데.

아무튼, 나한테 온 걸 전부 떠넘기기는 그래서 어떻게 포장하나 유심히 지켜봤다. 종이로 감싸고, 리본은 위로 넣어서 아래로 빼고.

좋아. 터득했다.

원래 비교적 몸치인 나지만, 여기 오고 나서는 처음 보는 것도 곧잘 따라 하곤 했다. 본체 재능인지 초인 특성 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둘이서 재빠르게 해치우다 보니 수북이 쌓여 있던 사과를 싸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0분이 지났을 즈음에는 산더미 같던 사과가 산더미 같은 포장된 사과로 바뀌어 있었다.

전해 주는 건…… 아리나한테 맡기자. 내가 나섰다간 뭘 더 줄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성녀한테 직접 받은 사과라니. 신관들 입장에선 그만한 영광도 없지 않나. 아리나도 취임 기념으로 이미지 관리한다 치면 되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뒤, 저 문제에서는 그만 신경 껐다. 그 외에도 처리할 게 천지였으니까.

어디서 소식 듣고 왔는지 상회의 영감님이 보낸 서류들 수습부터, 곧 키탄과 만났을 때 물을 질문의 최종 점검까지. 행정 업무가 잔뜩 남아 있었다.

사각사각.

사과 깎는 소리와 필기하는 소리가 겹쳐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리나는 말없이 과도만 움직였고, 나 역시 조용히 펜만 긁적였다.

그러던 한중간, 아리나가 갑자기 툭 내뱉었다.

“리안 님은 잘못한 거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너무 맥락 없이 나온 말이라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리나는 그런 내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아래를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이번에 일어난 일이요. 리안 님이 죄책감 느끼고 있는 거 알아요.”

“죄책감? 내가 왜?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러니까요. 그리 잘 아시면서 왜 그러시나 몰라.”

“내가 죄책감 가졌다는 근거는?”

“음…… 글쎄요. 지금 답지 않게 말이 많아졌다는 거?”

“…….”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 말하고 싶은 기분은 있었지만, 반박하는 자체가 저 말을 시인하는 꼴이니까.

아리나는 침묵하는 나를 보더니, 과도를 접시 위에 턱 내려놓았다.

“그것 말고도 뭐 이것저것 있긴 해요. 장례식이야 같이 싸운 전우로서 그냥 갈 수 있다 쳐도, 죽어도 안 입겠다던 양복을 바로 걸친 거라든가, 가서도 이유 없이 사망자 가족들한테 돈을 나눠 준 거라든가.”

“……그 정도야 장례식 가면 기본적으로 지키는 것들이잖아.”

“그렇다기엔 액수가 좀 컸죠? 원래 리안 님 성격대로라면 옷도 검은 평상복 정도로 타협했을 거고요.”

“…….”

이번에도 역시 대답할 수 없었다. 솔직히 내가 봐도 그랬을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요즘 돈이 많아졌다 해도, 그걸 단순한 동정심으로 물 푸듯이 사용한 적은 없다.

레이튼에 고아원을 세운 거나 자경단에 돈을 기부한 건 상회가 터 잡을 도시를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이 컸고, 나중에는 전부 회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일종의 투자라고 볼 수 있지.

하지만 확실히 이번 부조금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철저한 외부인으로서 일에 휘말린, 오히려 보상을 받아야 하는 쪽이었다. 상대를 위로하는 쪽이 아니라.

요컨대, 오바가 조금 심했다는 소리다.

“리안 님 성격에 남들을 더 지키지 못했다고 그럴 것 같지는 않고.”

아리나는 다시 과도를 든 채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아마 그 추기경 아들이 일 저지른 게 본인 때문 아닌가 생각하는 거 같은데, 맞아요?”

“…….”

“맞나 보네.”

“……네가 뭘 몰라서 그래. 원래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요? 리안 님이 아는 미래에서는 그러니까?”

툭.

순간 펜을 놓쳐 버렸다.

그대로 표정을 굳히고 옆을 바라보자, 아리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뭘 그렇게 놀라요? 그렇게나 이것저것 아는 티를 내고 다녔으면서. 예언인지 뭔지는 몰라도, 아마 리안 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충 다 눈치채고 있을걸요?”

“……그러냐.”

나는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펜을 들어 올렸다.

너무 갑작스레 나온 말이라 놀란 거지, 짐작 못 하고 있던 일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숨기는 데 그리 애쓴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알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에 가까웠지.

“뭐, 어쨌든 네 말이 맞아. 원래대로라면 그 재앙 같은 건 깨어날 일이 없었어. 그렇게 강할 거란 것도 예상 못 했고. 솔직히 내 책임이 없다고는 보기 힘들지.”

“리안 님.”

아리나가 다시 한 번 과도를 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리안 님은 신이 아니에요. 아니, 이제 성녀인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신인 키탄 님조차 모든 걸 뜻대로 굴릴 수는 없어요. 그런데 리안 님이 대체 뭐라고 그렇게 잘난 듯이 다 책임지려고 들어요?”

“…….”

“반성하고 후회하는 건 좋은데, 정도를 넘지는 말라는 뜻이에요. 아닌 척하면서 괴로워하는 거 다 보여. 병문안 선물 받을 때마다 뭐 잘못한 사람처럼 입 꾹 닫아 버리는데, 옆에서 그냥 볼 수가 있어야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한동안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까처럼 겹쳐서 나는 것이 아닌, 과도뿐인 소리였다.

그렇게 잠시 후.

나는 피식 웃으며 서류에 시선을 돌린 채 자그맣게 말했다.

“고맙다.”

“고마우면 좀 잘해요. 만날 말로만 하지 말고.”

“그건 좀 생각해 보고.”

아리나는 체, 하며 다시 사과를 깎는 데 열중했다. 나 역시 재차 펜을 놀리는 데 집중했다.

아까는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던 펜과 과도의 사각 소리가, 어째선지 이번엔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기분이 들었다.

* * *

그 뒤라고 해서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원래 했던 대로 재산을 풀어 이번 일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게 보상했고, 감사 인사를 받았다.

바뀐 거라면 이제 고맙단 소리를 들어도 별 감정 안 든다는 것일까. 거북하다든가 꺼림칙하다든가 하는 느낌 없이 그냥 덤덤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전엔 사실 몇 번 악몽을 꾸기도 했으니까. 내용은 특이하게도 비난받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감격의 눈으로 나를 보는 거였다.

보통은 좋아할 꿈이 왜 나한텐 그리 고통스럽던지.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지금 나는 성수 목욕을 마치고 접견실 앞에 서 있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인간 손님이 아닌 신을 맞이하기 위한 방이라는 점이다.

확실히 교단 입장에서도 흔한 일은 아닌지 신관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다.

들어가는 재료들도 만만찮다.

코드를 읽을 수 없는 성물 쪽은 빼고 세었는데도 S등급 물건만 다섯 개가 넘어간다. 소모품도 포함되어 있으니 금액으로 따져도 수천 골드는 가뿐히 넘어가는 의식이겠지.

하긴, 신을 만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애초에 신의 의지를 전한다는 교황이란 직위 자체가 필요 없었을 거다.

“긴장되지는 않으시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교황이었다.

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는 마저 입을 열었다.

“나도 키탄 님과 직접 만난 것은 교황에 즉위할 때 단 한 번뿐이었지. 그마저도 정말 잠깐이어서 솔직히 어디 가 자랑할 얘기도 없었소.”

“저도 그렇게 짧을까요?”

“그대는 그보단 더 길 것이오. 그때 했던 얘기대로, 시간을 늘려 줄 재료들을 이것저것 추가했으니까. 아마 최근 100년 이내론 키탄 님과 가장 길게 만나는 인물이 되지 않을까 싶군.”

“그건 다행이군요.”

그 뒤로 구체적인 시간을 묻자, 확신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이 체감하는 세월은 인간의 것과 다르기 때문이라나.

괜히 어렵게 꼬아서 얘기했지만, 신계와 인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소리다.

거기서 10분이 여기서 1시간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거기서 1시간이 여기서 10분이 될 수도 있는 식이랄까.

예상하고 있던 걸 확인한 것에 불과해서 깊이 캐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뭐 달, 년 단위로 차이 나는 건 아니기도 하고.

키탄 님을 만나면 뭘 물을 거냐, 혹시 달리 기대하는 거라도 있느냐, 이참에 아예 사도직을 맡겠다 해 보는 건 어떠냐 등등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다 보니 어느새 신관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준비가 전부 끝났습니다. 지금 바로 접견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교황이 나를 슥 돌아봤다.

“혹시 아직 마음의 준비를 못 마쳤다면 말하시오. 기다려 줄 수 있으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곧바로 시작하도록 하지요.”

“그대 의지가 그렇다면 그러도록 하지.”

나는 교황이 가리키는 대로 방 중앙에 있는 오망성(五芒星)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위 꼭대기엔 교황이, 나머지 꼭짓점에는 대주교들이 자리 잡았다.

그들 뒤에 선 신관 수백 명이 의미 모를 성가를 부르고, 안에서는 끝없이 교리를 외웠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휘이잉.

창문 하나 없는 방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오망성이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동시에 털썩, 성가를 부르던 신관들이 모두 탈진해 쓰러졌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끝났소.”

교황 역시 간신히 버티는 듯한 모습으로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키탄 님을 만나면 본인 대신 안부 인사 좀 부탁하지.”

그러겠습니다,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이미 내 정신은 몸을 벗어나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