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174화 (174/225)

너의 코드가 보여 (174)

“그건 안 될 말이로군.”

교황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일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망설임 없는 태도.

보통 중요한 발표의 일정을 바꾸란 소리를 들으면 이유라도 물어본다. 일단 상대가 미친놈인지 아닌지 판단이라도 해야 하니까.

한데, 그것조차 없으면 답은 하나다. 애초에 본인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지.

“신들께서 정하신 일이기 때문입니까?”

“……그것까지 짐작했나 보군. 하긴, 이런 일을 신도들끼리만 결정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추론이네만.”

교황은 혼자서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그대로 말을 이었다.

“맞네. 이 합의는 우리 교황들 사이에서 논의된 것이 아닐세. 얼마 전 갑자기 키탄, 닉스, 가이아, 하톤, 데피티. 5대 종교의 신들께서 내리신 신탁에 의한 결과이지.”

“혹시 다섯 신앙을 통합하려는 이유도 같이 밝히셨는지요.”

“따로 알려 주시지는 않으셨지만…… 요즘 정세를 보고 짐작하는 건 있네.”

짐작 가는 거라.

아직 2부 시점 전이다 보니 그 당시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의 세세한 감정이나 추론까지는 잘 모른다. 그냥 그랬겠거니 짐작만 할 뿐.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재앙일세.”

교황은 들고 있던 찻잔을 탁, 내려놓고 이야기했다.

“얼마 전 아르곤 사건이 터졌을 때는 어쩌다 생긴 일이라 치부하려 했지만, 이번엔 우리 교단에서까지 비슷한 케이스가 발생하지 않았나. 어쩌면…… 앞으로 일어날 문제의 전조 현상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그렇군요. 일리가 있습니다.”

제국 사건 이후로는 나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대륙이니 ‘재앙’이란 게 충격적이기도 했을 거다.

어쨌든 교황의 짐작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고. 그보다는 부분적으로 맞췄다 말하는 편이 더 옳겠지.

원래처럼 아르곤 사건만 터졌다 해도 저렇게 생각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의 일은 상상으로만 남겨 두기로 하려는데, 교황이 그제야 궁금해졌는지 물어왔다.

“그보다 발표를 미뤄야 한다는 이유가 뭔가? 역시 다른 왕국들의 견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담담하게 대꾸하자, 교황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말게. 아무리 신들의 의견으로 갑작스레 합의된 결정이라고는 하나, 우리도 최대한 문제 없이 처리될 수 있도록 이런저런 조치들을 준비해 두고 있으니까.”

그게 먹히지 않으니까 문제인 건데.

어차피 설득이 가능해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됐다. 남은 건 역시 키탄과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는 수밖에 없나.

나는 키탄과의 만남을 며칠 이내 주선해 보겠다는 대답을 듣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 * *

원래 순식간에 바뀌는 게 사람 마음이라던가.

엘프 마을에서 고기만 먹고 한동안 채식하겠다 결심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병상에 누워 흰죽만 퍼먹다 보니 이젠 육식이 땡긴다.

나는 평상시 몸이 원하는 것을 섭취해 주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굳이 유혹에 저항하는 대신, 곧바로 밖에 나와 고기 요리를 원 없이 시켜 먹었다. 다친 다음엔 몸보신도 해야 하니까.

아무튼, 그렇게 쌓인 접시가 수십 그릇. 액수로 따져도 금화로 계산해야 하는 수준이 됐다.

보통 1골드가 평균적인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라는 걸 생각해 보면 정말 엄청나게 처먹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애초부터 비싼 식당이기도 했지만.

쨌든, 여기 오고 얼마 안 된 시절의 나라면 모를까 지금의 내겐 전혀 부담되는 금액이 아니었다. 부담은 방금 내 위장이 졌지.

별생각 없이 가게 주인에게 금액을 지불하려는 순간이었다.

“잠시.”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사람이 다가오고 있단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지만, 내게 볼 일이 있었다고는 생각 못 해서 조금 놀랐다.

슬쩍 뒤돌아보니, 선한 인상의 신관 하나가 환히 웃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구원자님이 맞으시군요! 반갑습니다. 파멜리온이라고 합니다.”

카멜레온?

이름이야 어쨌건, 구원자는 이번에 내게 새로 생긴 별명 중 하나다.

날 알아본 거 보니 회장에 있었던 사람 중 하나인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는 척해 온 걸 무시하기도 좀 그랬다. 아직 신관들에겐 미안한 마음도 조금 남아 있었고.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인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뒤돌아섰다.

“저도 반갑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창한 칭호는 아직 저에겐 많이 부담스럽군요. 그냥 리안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하하하, 겸손까지 떠시다니. 역시 아무나 구원자 칭호를 받는 건 아닌가 봅니다.”

겸손이 아니라 진짜 부담스러운데.

이런 걸로 논쟁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

“그보다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

“그런 건 아니고 식사하러 왔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보여 한번 불러 본 겁니다. 제일 앞에서 싸우시는 광경이 정말 인상 깊었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식사 맛있게 하시길.”

대답해 주며 다시 뒤돌아서려는데, 신관의 손이 한 번 더 나를 붙잡았다.

“잠시만! 혹시 지금 계산하시려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그럴 수가! 도시의 은인께 식사값을 내게 할 수는 없지요! 제가 대신 내드리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아니요.”

딱 잘라 대답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이번에도 역시 신관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막았다.

“겸손도 지나치면 오히려 독이 되는 법입니다. 부디 한 번만 제 호의를 받아 주시지요.”

“제가 먹은 것이 조금 많아 그렇습니다. 아무리 호의라고는 하나, 부담 드리기엔 액수가 조금 크군요.”

“하하, 부담은요! 신관 월급이 그리 많은 건 아니지만, 은인께 밥 한 끼 사드릴 돈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보게, 이분 식사비가 얼만가?”

신관의 물음에 우리 둘의 눈치를 보고 있던 주인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게…… 다 합해서 2 골드입니다.”

“뭣이!”

신관이 근처에 있던 책상을 쾅! 내리쳤다.

“자네 지금 신관의 앞에서 이방인을 등쳐 먹으려는 건가? 사람이 돼지새끼도 아니고 어떻게 혼자 한 끼 식사로 2 골드어치를 처먹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그것이…….”

“변명은 됐네! 적어도 이 도시에는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건만…… 내가 착각한 모양이군. 사람을 돼지처럼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2 골드라니.”

신관은 분노한 얼굴로 나를 잡아끌며 말했다.

“됐습니다. 그만 가시지요. 감히 도시를 구했다 해도 모자랄 분한테 바가지라니……. 이 가게는 신전에 보고하여 따로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시 입장에서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2 골드가 맞습니다.”

“예?”

“2 골드가 맞다는 말입니다.”

“……?”

거듭 얘기해 줘도 신관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내가 앉아 있던 식탁을 가리켰다. 아직 종업원이 치우지 않았는지 접시가 수북이 쌓인 채였다. 진한 기름기도 그대로 남아 있다.

“전부 비싼 육류로만 이루어진 음식입니다. 그걸 혼자 저만큼이나 먹었으니, 2 골드가 나올 만도 하지요. 딱히 바가지 씌운 건 아닙니다.”

“…….”

신관은 말이 없었다.

아까와 달리 이해는 했지만,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하긴, 2 골드가 호의 한 번 베풀겠다고 낼 수 있는 금액은 아니지. 아무리 고마워한다 해도 현실의 벽이란 게 있는 거다.

애초에 2 골드를 현금으로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을 리도 없었고.

그때, 침묵하고 있던 신관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호기롭게 말했는데, 사실 지금 가진 돈이 50 실버뿐이라…….”

그럴 거 같았다.

나는 그가 더 무안해하기 전에 빠르게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며 말했다.

“저는 신관님의 그 마음만으로 충분합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이제야 계산하고 나갈 수 있겠네.

안도하며 드디어 주인에게 돈을 건네려는데,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이건 또 뭐야.

한숨을 내쉬고 뒤돌아보니, 이번엔 성기사 패거리였다. 그들은 내게 짧게 목례하더니 신관의 어깨를 두드렸다.

“슬퍼 마십시오. 이제 저희가 왔으니까요.”

“아아…… 형제님……!”

“식구뿐 아니라 은인까지 걸린 문제! 저희가 어찌 이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제발 무시하고 가 줬으면 좋겠는데.

내 생각과는 관계없이 그들은 제멋대로 내 식사비를 뿜빠이 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다섯이니 40 실버씩만 내면 되겠군요 하하하.’ 하면서.

더 심했던 건, 식당 주인까지 뒤늦게 내가 누군지 알았다며 돈을 안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결국 내느냐 안 내느냐 하는 말싸움으로 번졌는데, 마지막엔 주인을 포함해서 각각 33 실버씩 내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판매자가 돈을 대체 왜 내지? 어차피 본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거 아닌가?

그런 의문을 말하기엔 너무 훈훈한 분위기였다. 무슨 불우이웃을 돕기라도 하는 것 같은 광경.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내 재산은 저들 거 다 합친 것보다 몇백 배는 더 많을 테니까.

원래 그런 것보다 마음이 중요하단 건 알지만…… 솔직히 지금 여기서 실랑이하는 시간 동안 내가 상회 일을 했으면 그게 2골드 넘겼을 거 같은데.

그리고 그런 건 다 둘째 치더라도, 신전 사람들이 저렇게 대해 주는 게 아직 편치 않았다.

여전히 이번 사건에는 어느 정도 내가 일조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지금까지는 병상에 누워 있느라 얘기로만 듣고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직접 겪으니 더 부담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 망나니 새끼 하나 때문에 이게 뭔 짓인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형님 동생 하고 있는 그들 사이로 슬쩍 끼어들었다.

“식사는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자시여,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저 칭호도 얼른 돌아가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였다.

쉽게 놓아 줄 거 같지 않아 붙잡을 수 없는 핑계를 댔다.

“아직 그때의 상처가 다 낫지 않아 요양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오늘도 나오면 안 되는 걸 억지로 나온 거고요.”

“저런……! 그러셨군요. 혹시 저희가 실례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그만 보내 주기만 하면 된다.

“괜찮습니다.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렇습니까…….”

신관은 아쉬운 듯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환히 웃었다.

“그럼 저희 형제들에게 그런 사정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밖에 나오셔도 귀찮은 일 없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처음으로 대화가 통한 기분이 든다.

나는 안심한 얼굴로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다음 곧장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생각했다. 키탄과의 볼일이 끝날 때까진 얌전히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야겠다고.

어차피 볼일 마치자마자 스바를 타고 돌아가면 이런 일이 또 없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구원…… 아니, 리안 님. 여기 주교 한 분께서 보낸 병문안 선물이…….”

“리안 님! 오늘은 무려 대주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프란시스 경께서 불사조의 깃털을 들고 오셨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이놈의 신전은 내가 한시라도 가만히 쉬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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