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72)
전달에 오류가 있었던 거기는 하지만, 일단 내가 희생해서 녀석을 상대한다는 건 기정사실화가 된 느낌이다.
대주교급까지는 전부 회장에서 몸을 피하기 시작했는데, 나가기 전에 꼭 한 번씩은 나를 보고 감동에 가득 찬 눈빛을 했다.
아니, 진짜 너흴 위해 죽을 생각 없다고. 그렇게 바라봐 봤자 그냥 거북할 따름이다.
나는 한숨을 쉬고 잠깐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장내에 남아 있는 건 교황과 추기경, 그리고 아리나 뿐이다.
앞 쪽은 책임감, 뒤 쪽은 나와의 친분 때문에 버티고 있는 거겠지. 그럴 필요 없는데.
어쨌든, 저 정도면 딱 적당하기는 하다.
만약 내가 성공해도 입단속이 될 면면들인 데다, 실패한다 해도 아마 교황이 희생 주문을 써 줄 테니까.
이제 나만 잘 해내면 된다는 거다.
“……키킥.”
마침 얌전히 있던 패러사이트도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무슨 꿍꿍이로 가만히 있나 했더니, 나와 1대1로 남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했나 보지?
녀석도 역시 초조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본능만큼은 짐승 수준으로 뛰어난 녀석이 저런 잘못된 판단을 내렸으니까.
이제와선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나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녀석의 주먹을 맞서 나갔다.
콰아아앙! 콰앙!
버프의 지속시간은 이제 3분 남짓 남았을 뿐이지만, 패러사이트도 점점 힘이 빠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대가로 줄 수 있는 수명이 다해 가는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내게 남은 버프 시간보다는 더 길 거다. 그전에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만 한다.
있는 힘껏 검을 휘둘러 녀석을 떨쳐 냈다. 그 직후, 왼쪽 팔에서 꽤 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큭…….”
조금 무리했나? 팔뚝의 살점이 반쯤 떨어져 나가 있다. 용의 피로도 재생시키려면 1분은 걸릴 중상이다.
하필 다쳐도 팔이…….
불평을 토로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오른쪽 한 손으로 검을 들고 크게 외쳤다.
“아리나! 방어막으로 저 녀석 공격 30초만 막아 줘!”
“……네! 한번 해 볼게요!”
대답과 동시에 내 앞으로 새하얀 막이 생겨났다.
굉장히 투명한데, 엄청나게 두껍다. 막대한 양의 신성력이 들어갔다는 증거다.
저 정도면 30초는 몰라도 20초는 버티겠지.
나는 건너편에서 성난 얼굴로 공격해 오는 패러사이트를 일별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걸 집중조차 하지 못한 상태로 쓸 수는 없을 테니까.
심법 수련을 하며 명상에는 도가 튼 덕분에 금세 몰입 상태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남은 버프 시간이 1분 남짓이라든가, 20초 이내에 해내야 한다든가 하는 생각들도 금방 사라져 버렸다.
이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이언이 선보였던 ‘무영검’ 동작에 관한 기억뿐이다.
“…….”
솔직히 아직도 반신반의하다. 내가 그걸 진짜로 익힌 게 맞는지.
내 눈으로 보기엔 여전히 단순한 찌르고 베기였을 뿐이었던 데다, 아이언은 성공했다 실패했다 일언반구도 없이 그만두라는 통보에 가까운 말을 하지 않았나.
그나마 기댈 곳이 있다면 제국 1기사단장이었던 리카르도가 익히는 데 성공했다 얘기해 준 것 정돈데, 이것조차 확실하진 않다.
그는 내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으니까.
게다가 익히는 데 성공했다는 거지, 능숙하게 쓸 수 있을 거란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 방법이 도박수란 건, 그런 이유였다.
“키키키킥!”
까강!
순간, 가까이서 들려온 소음에 잠시 집중이 끊겼다. 아마 아리나가 펼친 보호막에 금이 가는 소리일 것이다.
이제 녀석이 나를 공격할 때까지 10초도 안 남았다는 거겠지.
나는 거기서 신경을 끄고 다시 나만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검을 횡으로 들어 올렸다.
단순한 베기. 간단한 찌르기.
무엇이 단순하고, 무엇이 간단한지에 대한 생각조차 버렸다.
내가 해야 할 건, 그저 내보일 수 있는 최상의 검격을 선보이는 것뿐.
그렇게 잠시 후. 내 머릿속에 가장 올바른 베기의 형태가 떠올랐을 때, 나는 그저 그 경로를 따라 앞으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무언가 걸리는 느낌 따위는 없었다. 그냥 허공을 갈랐나 싶은 허무한 감촉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눈을 감은 채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나의 검은, 녀석의 목을 포함한 ‘공간’을 베었다고.
그 이유 하나는 아까부터 키킥대던 패러사이트의 웃음소리가 깔끔하게 멎었다는 거였고, 두 번째는 망막을 뚫고 눈꺼풀 뒤로 떠오른 네모난 형태의 시스템 창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는 업적! / 「재앙의 소멸」]
[당신은 벨리아 대륙에 존재하던 재앙 중 하나를 직접 해치우셨습니다!]
[포인트 정산 중…….]
[존재하지 않는 업적에 정산이 불가능합니다!]
[긴급 구제 포인트가…… 잠시.]
띠링!
[1대1 메시지가 도착하였습니다.]
[정산은 만나서 하도록 하지. 내 종들을 구해 준 것도 계산해야 하니 말이야.]
* * *
“……설마 이길 줄이야.”
살바토르의 목이 떨어지고, 한참 뒤 정신을 차린 교황이 황망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게 지금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분명 상대는 2급 성기사 셋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격차를 보인, 정말 ‘재앙’이란 단어가 어울릴 수밖에 없는 괴물이었다.
아무리 대륙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신진이라 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는 소리다. 나이에 비해 높다지만, 경지도 끽해야 3급일 뿐이지 않나.
‘그런데 이겼지.’
교황 역시 싸움 중간 녀석이 약화 능력을 쓴다는 것과 그게 저 리안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기는 했다.
그라고 교황 자리를 위에서 폼만 잡으며 딴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나,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약해지는 것과 상관없이 ‘재앙’은 2급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무슨 방법인진 모르겠지만, 나중에 가서는 1급에 달할 정도로 강해지기도 했었다.
교단의 최고 기사인 듀크가 온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 괴물을 성녀의 축복 좀 받았다지만 3급의 실력자가 이긴다?
아무리 대륙에 권위 높은 교황의 말이라도 세상이 믿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신도들의 신앙심을 올리기 위해 현대에 신화를 지어내고 있다며 비웃을 확률이 더 높다.
‘신화라…….’
교황이 회장 중앙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저 청년이 정말 현대에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500여 년 전 해방왕 이후 끊긴 역사가, 이제야 이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한 일은 매우 간단했다. 바로 병상에 누워 시스템 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다.
[긴급 구제 포인트가…… 잠시.]
[정산은 만나서 하도록 하지. 내 종들을 구해 준 것도 계산해야 하니 말이야.]
“음…….”
역시 노골적이다.
키탄 교에서 해치운 재앙. 그리고 내 종들을 구해 줬다는 문장.
그 어딜 봐도 메시지를 보내는 당사자가 키탄 본인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여태까진 그래도 주체를 숨기려는 기미 정돈 보이더니, 이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건가?
“으음…….”
원래도 나를 이 세계에 보낸 것이 혹시 신 아닌가 하고 의심하긴 했다.
신성력만 코드가 안 보인다는 점, 키탄이 나를 콕 집어 지명했다는 점 등등. 걸리는 것은 많았으니까.
내 설정엔 녀석들에게 그런 능력이 없었지만, 그거 틀린 게 한두 번도 아니었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택지였던 건 맞다는 소리다.
“……그래도 왠지 그쪽은 아닐 거 같았는데.”
근거는 없다. 그냥 감이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예전 미르가 말했던 것처럼, 경지에 오른 직감은 예지에 가까워진다.
그것 때문에 반쯤 확신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있던 걸 현실로 부정당해 버리니 머릿속이 조금 복잡하다.
옆집 강아지가 수컷이 아닌, 암컷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정도의 충격이라 해야 하나.
“뭐, 아직 확정 난 것도 아니고…… 어차피 곧 만날 테니 그때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누굴 곧 만나요?”
깜짝이야. 뭐지? 여긴 나 혼자였을 텐데?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아리나와 릴리아가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 온 거야?”
“그쪽은 아닌 거 같다고 중얼거릴 때부터요.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희 들어오는 것도 몰라요?”
“설마 개인 병실에 무단 침입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노크했거든요? 그것도 몇 번이나. 그런데도 대답이 없길래 걱정돼서 얼른 들어온 거예요.”
……노크 소리가 있었던가? 아무리 내가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해도 그런 것까지 놓쳤을 것 같지는 않은데.
슬쩍 릴리아를 쳐다봤다. 그러자 나와 아리나, 양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녀석이 미세한 각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씩이나 노크를 했었다는 게 사실이긴 한 모양이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며 사과했다.
“미안.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못 들었나 봐.”
“됐어요. 그보다 다친 데는 괜찮아요?”
그 말에 잠시 옆구리를 넌지시 훑어봤다.
아직도 선명히 보이는 큼지막한 흉터.
마지막 순간 패러사이트 녀석이 날린 최후의 공격으로 입은 상처인데,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용의 피나 신성력으로도 치료가 안 됐다.
일시적인 효과였는지 슬슬 아물고 있기는 하지만…… 덕분에 일주일 내내 팔자에도 없는 병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젠 많이 나아졌어. 흉터도 안 남을 거 같고.”
“음…… 그럼 다행이네요.”
“그런 것보다 밖에서 있던 일이나 좀 요약해서 들려줘 봐. 심신 안정이니 뭐니 하면서 소식도 모르게 하더라니까.”
“그건 확실히 답답하긴 했겠네요.”
아리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큼지막한 것들만 골라서 들려주기 시작했다.
금지에 대한 대대적인 재조사가 들어갔다는 것부터, 대륙 전체에 이번 사건이 널리 퍼졌다는 것까지.
그리고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나도 모르는 새 붙었던 ‘성스러운 기사’라는 칭호가 진화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구원자’라나? 적어도 짧아진 것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성스러운’이 떼진 것도 그렇고.
그때, 재잘재잘 말을 이어 가던 아리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추기경님이 결국 직위를 박탈 당하셨어요.”
“그야 그렇겠지. 자식의 일탈이라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으니까.”
애초에 금지에 들어가는 방법이나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안 것도 그 아버지인 추기경의 직위 덕분일 거다.
연좌제라 주장하기도 힘들다는 소리지.
그보다…… 원작에선 그냥 자숙의 기간을 조금 갖는 정도로 그쳤는데, 이것도 염두에 둬야겠다. 추기경은 나름 스토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주로 플레이어의 앞길을 막는 쪽이었으니, 좋은 변화라고 볼 수는 있을 거다.
차기 추기경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또 다르겠지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