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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71화 (171/225)

너의 코드가 보여 (171)

이성을 잃었다는 게 본성까지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패러사이트는 내 도발에 아까처럼 무턱대고 덤비는 대신 얌전히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상황이 본인에게 유리하지만은 않다는 걸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어쩌면 버프 스킬의 지속 시간이 길지 않다는 걸 눈치채서 고민하는 중일 수도 있고.

하지만 사실 시간은 우리의 편에 가까웠다.

이쪽은 신관들의 신성력으로 능력을 향상시킨 반면, 저 녀석은 본인의 수명을 희생해 본신의 힘을 끌어올리고 있는 형편이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생명이 꺼져 가고 있다는 거지.

게다가 조금만 더 버티면 키탄 교 최고 실력자인 1급 성기사가 도착할 거다.

패러사이트가 그 사실까지 알 리는 만무했으나, 적 본진에서 오래 머무는 게 좋지 않다는 지식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결국 덤벼들어야 하는 건 저쪽이라는 소리다.

“……키킥.”

녀석 역시 그런 사실을 깨달았는지 짐짓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봤자 꾸며 낸 것에 불과하긴 했지만.

내가 그 모습에 착각하고 먼저 공격하기를 바라는 거다. 방어하는 쪽이 더 유리하단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에 가까웠으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칼을 어깨에 걸치고 말했다.

“좀 전엔 오지 말래도 달려들던 놈이 이제는 오래도 안 오네. 뭐, 평생 그러고 있든가. 난 어차피 시간 많다.”

“…….”

패러사이트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놈은 귀까지 찢어져 있던 입꼬리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버……러……지…….”

더듬거리는 말투로, 녀석이 입을 열었다.

“왜 너만…… 왜 나는…….”

“…….”

아직 의식이 전부 잡아먹히지 않았던 건가?

이것 역시 예상을 벗어난 사태긴 하다. 보통 침식이 저 정도까지 진행된 이후에는 숙주의 정신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사실상 이미 죽은 상태라 생각했는데…… 패러사이트도 오랫동안 봉인돼 있다 보니 능력이 약해졌었나?

어쨌든 녀석이 수명까지 써 가며 나를 노리는 이유가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간다.

패러사이트에겐 남은 뒤가 있을지 몰라도, 녀석은 앞으로 미래가 없었을 테니까.

키탄 교 본청에서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기도 했겠지. 이단 심문관의 고문 방법은 유명하다.

나는 그저 말없이 검을 다시 바로잡고 공격을 대비했다. 딱히 녀석과 나눌 대화에 영양가가 있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놈은 그런 나를 보더니, 큰 괴성을 지르며 돌진해 왔다.

“주우욱어어어어!”

쿠아앙!

이전보다 수명을 더 끌어당겨 쓰고 있는지 압력이 훨씬 강해졌다. 하지만 정작 버티기는 오히려 더 수월하다.

역시 아리나의 버프 덕분이다.

이 정도면…… 원래보다 거의 두 배 수준은 더 강해진 거 아닌가?

지금 상태라면 나보다 위라 생각했던 프란시스도 손쉽게 상대할 수 있겠다.

“주거! 주우거어!”

물론, 그렇다고 내가 녀석보다 위라는 소리는 아니다.

이제 패러사이트는 약화 능력 없이도 순수 힘만으로 그때의 프란시스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목표는 이기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끄는 것이지. 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다.

“얼른 주그란 마리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잘린 팔을 붙이고 돌아온 프란시스도, 목이 반쯤 떨어져 나갔던 투를리온도. 그리고 이름 모를 2급 성기사도. 모두 싸움에서 떨어져 뒤로 물러나 있었다.

도망친 게 아니라, 이제 곁에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방해된다 판단해서일 거다. 그만큼 나와 녀석의 수준이 많이 올라갔으니까.

덕분에 나는 혼자 남아 녀석의 공격을 계속 맞대응해 나갔다. 속으로는 계속해 시간을 재면서.

주먹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 3분.

발차기가 한쪽 다리를 부러뜨렸을 때 4분.

그 둘을 완전히 복구시켰을 때가 5분.

그쯤 돼서야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

분명 진작 도착했어야 할 1급 성기사 듀크가, 아직 도착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 * *

“……듀크 경은 아직인가?”

“그것이…….”

“꾸물대지 말고 얼른 답해 보게. 지금 우리에게 낭비할 시간이 있어 보이나?”

교황의 재촉에 밖으로 상황을 알리고 돌아온 주교가 두 눈을 꼭 감으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 오시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저 녀석이 금지에 있던 다른 존재들의 봉인까지 전부 풀어 버린 모양입니다. 듀크 경께서 빠지시면 당장이라도 밀릴 상황인지라…….”

그 말에 교황이 침음을 흘렸다.

수백 년간 아무 문제도 터지지 않아서 방심했나? 어쩌면 보안이 지나치게 허술해졌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언제쯤 정리하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던가?”

“아마 앞으로 30분은 더 걸리실 거라고…….”

“우리가 전부 죽은 이후겠군.”

“……해서, 건의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만.”

주교가 조심스런 태도로 입을 열자, 교황이 그를 돌아보며 반문했다.

“그게 무엇인가?”

“……일단은 교황님과 추기경님 그리고 대주교님들은 듀크 경 곁으로 잠시 몸을 피하시는 게 어떠실지.”

“핵심부만 도망치라는 소리군.”

교황은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피식 웃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회장을 응시하며 손가락으로 가운데를 가리켰다.

“그런 말을 꺼낸 걸 탓하진 않겠네. 지금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결정이기는 하니까. 하나, 교단의 신도도 아닌 사람이 저렇게 목숨 걸고 싸우는 와중에, 그 지도부라는 자들이 저 살겠다고 몸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주교가 재앙이라는 것과 싸우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멸망한 제국 수도에서 이름을 날렸다 하여 ‘망국의 초신성’. 그렇게 폐허가 된 도시에서 빈민들을 먹여 살린 성인이라 하여 ‘레이튼의 성자.’ 마지막으로 신성한 임무에 직접 도움을 줌으로써 얻은 ‘성스러운 기사’라는 호칭까지.

그들 교단이 개인적으로 받은 도움은 둘째 치고라도, 이런 곳에서 죽기엔 너무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다.

주교도 그것을 알았다. 그가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그렇게 했을 거다.

하나, 세상에 의지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말썽거리 같은 건 애초부터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교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조심스레 충언했다.

“……저분에겐 죄송한 일이지만, 일단 지도부가 살아남아야 교단을 재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군.”

“무엇을 말씀이신지……?”

되묻는 주교의 말에, 교황이 단호히 답했다.

“만약 나와 추기경, 그리고 대주교들이 전부 사망한다 해도 교단은 건재할 걸세. 중요한 건 누가 위에 위치해 있느냐가 아니라, 그 집단이 어떤 정신을 지켰느냐니까.”

“……그건 너무 이상에 가까운…….”

“이상에 가까우면 어떠한가? 종교가 원래 그런 이상을 따르는 학문인 것을. 그리고 저기서 싸우고 있는 리안이라는 기사야말로 키탄의 정신에 가장 어울린다고 볼 수 있네.”

“…….”

주교가 조용히 침묵했다.

교황에게 완전히 동화되어서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납득은 갔으나, 그렇다고 지도부가 무슨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단의 정신은 일관된 것이 아닌, 이끄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거라고 보았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주교는 더 이상 뭐라 설득하든 교황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았다.

결국 그가 입을 다문 것은 수긍이라기보다는 포기에 가까웠다.

교황은 그런 주교를 보면서 피식 웃음 지었다.

생각이 깊어 내심 다음번 대주교 후보로 점치고 있던 자였다.

대피하는 주체에서도 주교급을 제외한 걸 보면 본인 또한 여기서 목숨을 달리할 각오였을 거다.

아직 본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런 점을 알고 있었던 덕분에 안심하고 뒤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정한 교황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되었네. 나만 남기고 전부 물러날 수 있도록 조치해 주게.”

“교황님 혼자 남아 대체 뭘 어쩌시려고…… 설마……!”

되묻던 주교가 뭔가 깨달은 듯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맞네.”

교황은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희생 주문을 사용하도록 하지.”

* * *

아직까지 듀크가 안 오는 것 보면 무슨 일이 터지긴 제대로 터진 모양이다. 게임에서 본 성격대로라면 무섭다고 도망칠 비겁한 위인은 아니었으니까.

그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나온 결과는 명확했다.

바로 나 혼자 녀석을 해치워야 한다는 거다.

아까와 달리 시간이 저 녀석 편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리나가 준 버프의 지속 시간은 10분. 앞으로 겨우 5분이 더 남았을 뿐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 전에 듀크가 올 것 같지도 않았고.

앞으로 5분이 지나면 내가 처발릴 일만 남았다는 소리다.

녀석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전에 처리해야 하는데…….

그렇게 이를 악물고 있을 때였다.

“성스러운 기사시여.”

문득,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라 깨닫는 게 늦었지만, 분명히 나를 부르는 칭호였을 거다.

나는 패러사이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상대에게 대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를 위해 고생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나, 이제 그만 대피하시지요.”

……이건 또 무슨 의미지?

“제가 도망친다고 해서 저 녀석이 그냥 놓아주지는 않을 텐데요.”

“그쪽은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그 해결 방법이란 게 무엇입니까?”

솔직히,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나도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방안 중 하나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뒤쪽에서 침통한 음성이 말을 이었다.

“교황님께서 희생 주문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면 저놈을 30분 정도는 봉인할 수 있으실 거라고…….”

“됐다고 전해 주십시오.”

더 들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뒤쪽의…… 아마 주교로 추정되는 사람이 당황했는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이내 황급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아니면 기사님도 포함해서 다 같이 죽게 될 거란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더 죽게 될 것은 오직 하나뿐이니까요.”

“…….”

이번엔 한참 동안이나 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뭔가 망설이는 듯한, 어쩐지 감동 먹은 듯한 기색만 피부로 전해져 올 뿐.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슬쩍 뒤돌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패러사이트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 거 같았으니까.

결국 무시하고 다시 전투에 집중하려는 찰나. 주교가 그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교황님을 대신한 귀하의 희생은 절대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뭐? 누구의 희생?

누구 맘대로 사람을 죽여대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쟤 죽이고 말 거라는 걸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뿐인데?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해명하기도 전에 탁탁,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주교가 이미 싸움에 방해되지 않도록 자리를 피한 것이다.

“…….”

뭐, 상관없나. 어차피 달라진 건 별로 없으니까.

교황이 희생 주문을 사용한다면 당장의 상황은 해결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키탄과 나를 직접적으로 연결해 줄 수 있는 건 교황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뭐 때문에 엘프 마을서부터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데. 전부 녀석과 페이스 투 페이스 맞대고 대화해 보기 위함 아니었나.

진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라면 모를까, 아직은 그런 선택까지 몰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직 내게는 남은 수단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녀석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도박수가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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