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70)
생각해 보면 그리 부정적인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패러사이트는 원래 2급 이상의 숙주에 기생할 경우 바포메트를 훨씬 뛰어넘는 힘을 갖는다.
한데 지금은 일반인만도 못한 무능력한 녀석에게 붙었으니 사실상 본래 가졌을 잠재력의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거다. 기생형 생물체가 갖는 한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거 하나는 분명 긍정적인 일이었다.
문제는 하필 까다로운 능력을 갖고 있어서 나 혼자 상대해야 한단 것과, 나 혼자 상대하기에는 지금 상태의 녀석조차 버겁다는 거지만.
쿠웅! 쿠우우웅!
쉴 새 없이 뻗어 오는 주먹을 검으로 하나하나 맞받아쳐 나갔다.
힘의 차이가 확연함에도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은 침식한 패러사이트 역시 살바토르와 마찬가지로 동작에 절도가 없었던 덕이다.
요컨대, 내 쪽이 기술로서 녀석을 상대하고 있다는 건데…….
내가 갖던 포지션이 반대로 뒤바뀌어 버리니까 기분이 조금 요상하다. 나와 싸우던 적들의 심정을 이해할 거 같다고나 할까.
저런 무식하게 힘만 센 오우거 같은 새끼.
그 순간, 차마 피하지 못한 녀석의 주먹이 정면으로 뻗어져 왔다.
나는 간신히 검의 능력을 발동하여 패러사이트를 잠시 굳게 만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몸을 피했다. 곧이어 섬뜩한 바람이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마터면 뒤질 뻔했네.”
충격의 여파만으로 귀 한쪽이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다. 삐, 하는 이명이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곧바로 용의 피로 재생시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이론의 힘이 담긴 흑철검.
원래는 3, 4급 정도의 실력자를 잠깐 멈칫하게 할 수 있는 게 다인데, 이성이 없는 녀석이라 그런가. 다행히 무난히 통한 듯하다.
진짜 주먹 한 방 맞았다고 죽지는 않았겠지만, 치명적이기는 했을 거다. 최대한 빠르게 회복시켰다 쳐도 다친 부위가 감각 기관이 대부분 모여 있는 얼굴이었을 테니까. 그대로 연타를 허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조금 더 집중해야겠다.
나는 그리 마음잡으며 다시 녀석의 공격에 대응해 갔다.
그렇게 한 시간 같은 오 분이 흐르고. 슬슬 위험하다 싶을 때쯤, 다행히 지원이 왔다.
“모두 저분을 지켜라!”
“외부인이 너무 참견한다고 쑥덕거리던 녀석들이 정작 왜 지금 같은 상황엔 쏙 빠져 있는 거야!”
“당장 정신 차리고 보조해! 최소한 목숨 정도는 걸란 말이다!”
회장에 있던 3명의 2급 성기사들이었다.
패러사이트에게 달려들었다 거의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고 쓰러졌었는데, 그새 신관의 치료를 받고 회복한 모양이다.
약화 능력 때문에 3급 정도의 힘을 내는 게 고작인 그들이었지만, 그 실력까지 어디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성기사들은 오늘 처음 보았을 나의 전투 방식에 방해 없이 완벽하게 보조를 맞춰 주었다. 아직 실전 경험이 미숙한 나로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기교였다.
덕분에 혼자였으면 위험했을 상황을 몇 번이나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더불어 신관들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프란시스 경의 말이 맞소! 우리도 신전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합시다!”
“노련한 신관들은 저 녀석이 공격하는 순간을 맞춰 보호막을 생성하시오! 그러면 타격을 중화시킬 수 있을 것이오!”
“투를리온 경이 쓰러지셨다! 얼른 후송해서 치료해!”
원래 신관에게 전투 능력 따윈 없다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들의 전투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여기 모인 인원들은 키탄 교단의 최정예.
이 자리에는 10여 년 전 제국과의 전쟁에서 중립의 신분으로 최전방을 전전한 성직자부터, 하루하루 몬스터와 생존을 다투는 마을을 구원한 성자까지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웬만한 기사들보다 오히려 더 싸움에 이골이 난 이들이다. 그들의 지휘 아래 신관들은 신속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녀석에게 맞서 나가던 성기사가 쓰러지면 직접 끌고 와서 신성력을 들이붓는다. 그 와중 눈먼 공격에 맞아 사망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다.
그 상황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을 것이 분명했음에도, 그들은 본인의 차례가 되면 전혀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마치 신관에겐 신관만의 싸움이 있다는 것처럼.
그 희생들 덕분에 나가떨어졌던 2급 성기사들은 곧바로 회복해 전투에 복귀할 수 있었다.
“버텨! 버텨라! 녀석의 힘이 점점 떨어져 간다!”
“교황님이 축복을 내리셨다! 이제 1분은 더 버틸 수 있어!”
나는 그들의 외침을 들으며 오른쪽 어금니를 악물었다.
패러사이트의 힘이 빠졌다는 말은 성기사의 하얀 거짓말이었다.
확실히 예상보다 저항이 거세서인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고는 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수명을 더 당겨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1급 턱걸이에 머물고 있던 녀석의 힘은 어느새 확연한 1급이라 해도 될 만큼 강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나와 성기사들이 겨우겨우 버틸 수 있는 것은, 교황이 덕지덕지 붙여 준 버프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한계는 있다. 효능은 전후가 확연히 차이 날 정도로 뛰어나지만, 정작 지속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하니까.
아마 앞으로 길어야 3분.
그 시간이 지나면 도미노 쓰러지듯 순식간에 전부 무너지고 말겠지. 그리고 내게는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도가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게임엔 나오지도 않는 녀석 둘 때문에 죽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만약 내가 죽는다면 본편의 메인 보스 때문일 거라 생각했지, 살바토르나 패러사이트 같은 애들은 상정에 두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안일했던 대가를 치른다고 볼 수도 있으려나.
“…….”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 내고 정신을 붙잡았다.
지금 당장 내가 죽는다고 결정 난 것은 아니다. 아직 내 머리는 목 위에 제대로 붙어 있다. 그걸로 해야 할 건 비관적인 상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녀석의 공격에 대응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녀석의 주먹을 튕겨 내며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버프의 지속 시간이 1분 정도 남았을 때, 마침내 한 가지 방도를 떠올려 낼 수 있었다.
옆에서 패러사이트의 공격에 팔이 뜯겨져 나가는 프란시스를 일별하고 회장 중앙의 수정 구슬을 바라봤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몰렸는데도 키탄은 응답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 안은 여전히 어둠뿐이었다.
순간 짜증이 솟구쳤지만, 금세 덮어 버렸다.
어차피 기대한 적도 없었으니까.
쓸데없는 감정 소모에 집중하는 대신 수정 구슬의 코드를 띄웠다.
[HT-5-N]
비활성화 상태를 의미하는 알파벳 N.
나는 또다시 찢겨져 나간 귀를 재생시키며 이어서 생각했다.
‘코드 N을 Y로 변경.’
[HT-5-N] -〉 [HT-5-Y]
[코드 변경에 5,000포인트가 소모됩니다.]
[변경하시겠습니까?]
예전 라이놀 가문의 창고에 갔을 때와 비슷한 메시지다. 달라진 점이라면 지금은 포인트가 충분하다는 점일까.
그 당시엔 친족인 라이놀을 이용해 소모 포인트를 줄였지만, 지금은 그런 방법을 찾아낼 겨를이 없다. 버프가 풀리기까지 30초도 안 남은 시점이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수정 구슬의 코드를 바꿔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HT-5-N] -〉 [HT-5-Y]
[5,000포인트가 소모되었습니다.]
[코드 변경에 성공하였습니다.]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수정 구슬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성스러워 보이는 그 모습에 잠시 전투가 멈췄다.
신관들은 감격의 눈으로 그곳을 응시하였고, 패러사이트는 당황한 얼굴로 빛의 근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혹시 아직도 아리나가 혼혈이라는 이유로 성녀에 등극하는 걸 반대하는 분이 계십니까!”
성녀 임명에 과반이 찬성한다 해도 키탄의 허락이 없다면 그건 곧바로 무효가 된다. 결국 신의 의사가 제일 중요한 법이니까.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다르다.
키탄이 허락한다 해도 과반이 반대하면 성녀의 임명은 곧바로 무효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명분상 신도 신도들의 의사를 어느 정도 존중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후보자는 신 본인이 직접 뽑아도, 탄핵의 권리는 신도들에게 맡겼다고 보면 된다.
어쨌든 내가 꾸며 낼 수 있는 건 신의 의사뿐이었다. 이 뒤는 인간들의 일이라는 거지.
대주교들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시선이 닿은 곳은 추기경이었다.
“…….”
추기경은 드물게 감정이 드러난 눈으로 회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참담함이었다.
신성력을 한계까지 썼는지 머리가 새하얗게 물든 상태로, 그는 덤덤히 말했다.
“나는 후보의 성녀 임명에 찬성하겠소.”
본편에서도 신의 허락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마음을 돌렸던 대주교들이다. 그들을 반대로 뭉쳐 놓았던 추기경의 사실상 허락까지 떨어지자 태세는 금방 전환되었다.
만장일치로 찬성이 되기까지 단 10초.
때마침 버프가 딱 끝난 시점이었다.
쏴아아아!
“아…….”
누군가 천장을 보고 감탄을 흘렸다.
그곳에는 아까 수정 구슬에서 흘러나왔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막대한 양의 빛에 휩싸인 아리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이제 정말 정식으로 성녀 자리에 임명된 것이다. ‘신의 육신’이라 불릴 만큼 엄청난 수준의 신성력을 몸에 품은 채로.
곧이어 보기만 해도 성스럽던 빛이 깨끗이 사그라들고, 아리나의 몸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녀석은 그와 동시에 바로 눈을 뜨더니 크게 외쳤다.
“지금 축복 다시 걸어드릴게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말이 끝나자마자 새하얀 무언가가 날아와 내 몸에 깃들었다. 기초적인 수준의 신체 강화와 마력 상승 버프였다.
아직 신성력만 많다뿐이지 배운 것은 정식 신관 차원에 머물러 선택권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실망하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기술보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내가 여태까지 경험한 바와 같이 매우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였으니까.
아까 교황에게 고성능 버프를 받았을 때는 그냥 강해진 듯한 느낌이 들 뿐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허물 벗은 매미라도 된 심정이라 해야 하나.
하급 주문으로 이 정도면 대체 고위 주문을 배웠을 땐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리 못해도 내가 예상했던 걸 훨씬 뛰어넘을 거라는 건 틀림없었다.
진짜 미리 도장 찍어 두길 잘했다니까.
만에 하나 최고위직에 올라간다 할지라도 퇴직은 불가능하다 명시하였으니 문제도 없을 거다.
나는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다 피식 웃어 버렸다.
조금 여유가 생기자마자 또 바로 이러네. 아직 전투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우리 쪽이 확연히 유리해졌다고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왔다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저 녀석은 그만큼 강한 상대였으니까. 여전히 이길 확률보다는 질 확률이 더 높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뭐 해? 볼 장 다 봤는데 덤비지 않고.”
어째선지 나는 아까와 달리 내가 질 거라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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