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67)
회장에 잠시간 침묵이 맴돌았다.
내 발언에 당황해서가 아니라, 분노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본인들 논쟁 거리를 하찮은 것으로 여긴 걸로 모자라 그들에게 모욕이 될 수 있는 말을 꺼내었으니,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
아마 내가 그들의 임무에 손을 보탠 손님으로 초대받은 것이 아니었다면 진작 돌팔매질이라도 맞고 쫓겨났을 거다.
하지만 키탄 교는 상당히 위계질서가 뚜렷한 교단. 덕분에 신관들은 끙끙대면서도 내게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다.
결국 나한테 뭐라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둘뿐이었다. 나보다 위에 앉아 있는 교황과, 나와 짝꿍 맺고 있는 추기경.
교황은 아직 이 사태에 생각하고 있는지 조용했고, 추기경은 언짢은 듯한 표정을 꾸며내고 침묵했다.
신관들이 나에게 더 반감을 가질 수 있도록 일부러 뜸 들이는 거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었다 생각했는지 추기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은 키탄과 가장 가까운 장소인데, 정작 여기가 그분께서 의견을 표하시기 적합하지 않다니.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확실히 그가 발언 타이밍을 잘 잡는다는 것 하나만큼은 인정을 해야겠다.
조용히 있던 신관들 역시 추기경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조금씩 그에게 동조하기 시작했다.
“아까 전 얘기한 것도 그렇고, 아무리 신성한 임무에 힘을 보태 줬다고는 하나, 부외자가 너무 신전 일에 참견하는 거 아닌가? 건방지게 말이야.”
“솔직히 이종족 발언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점이 있었는데, 이번 거는 좀……. 저자 주장대로라면 키탄께서 우리를 저버렸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조금씩 나오던 불만들이 점점 커져 가더니, 이내 회장을 가득 채울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뭐라 변명하지 않고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봤다. 그리고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온 추기경을 향해 물었다.
“추기경님의 아들은 현재 어디 있습니까?”
“그게 지금 상황에 왜 궁금한지 모르겠군. 내 아들이라면 저기 있네.”
“첫째 말고 둘째 말입니다.”
“……살바토르 말이군.”
그런 이름이었나? 뭐 그런 거야 어찌 됐든 좋다.
“예. 아까부터 한참을 찾았는데, 보이지 않는군요. 혹시 어디 있는지 모르십니까?”
“모르네. 별로 관심도 없고.”
자식에 대한 애정이야 어쨌든, 적어도 지금은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
나는 이번엔 시선을 회장이 아닌, 아래로 돌렸다.
스토리에 잠시 언급만 하고 넘어갔던 지하 금지 쪽이다.
원래 지키는 성기사 둘만 있어야할 그곳에, 견습 신관을 뜻하는 코드 하나가 추가되어있다.
고유 코드는 아니었지만, 어째선지 저게 얼마 전 싸웠던 그녀석일 거라는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추기경님의 가족관계에 별로 참견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성기사를 불러 아드님을 찾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어째서지?”
나는 추기경의 말에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키탄께서 응답을 못 하고 계시는 게 추기경님의 아들 때문인 것 같거든요.”
* * *
내가 만든 ‘벨리아 대륙 전기’에는 설정에만 나오고 스토리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일단 넣고 봤는데 써먹을 만한 상황을 만들기 어려웠을 때도 있고, 그냥 단순히 내가 써 보고 싶어서 작성해 놓은 경우도 있다.
그런 대충대충인 생각으로 만들었던 설정들은 ‘이스터 에그’라고 불리곤 했는데, 그거야 어쨌든 원래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은 것이 더 흥미를 끄는 법이다.
일부 유저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짜내기 시작했다.
아예 설정의 전제 자체가 바뀌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부터,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만약에 가까운 가설까지.
거기에는 제작자인 나조차 흥미롭게 느껴지게 만든 해석들이 많았지만, 추기경과 교황의 마찰 도중 머릿속에 떠오른 건 한 가지였다.
‘키탄 교 금지에 있는 재앙의 봉인이 풀린다면, 키탄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나도 명확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라 정확하게 확언하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때의 내가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했던 기억은 난다.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키탄은 절대 그곳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을 거라고.
“……어이가 없군.”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가깝다.
설정에 명시한 내용도 아니었던 데다, 결국은 모두 내 상상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세계의 스토리 자체가 내 상상으로 짜낸 얘기 아니었던가.
이유 없이 반응하지 않는 수정 구슬. 얼마 전 들었던 원독에 가득 찬 추기경 아들의 목소리. 때마침 보이는 지하 금지의 신관 코드.
내가 그렇게 의심할 만한 근거는 충분했다.
어차피 그 외엔 달리 짚이는 바가 없기도 했고.
“만약 내 아들을 이용해 말을 돌려 보려는 속셈이라면 전혀 소용 없…….”
“제가 무슨 속셈인지는 일단 그 살바토르를 찾은 이후로 미루지요.”
나는 추기경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괜히 꾸물거리다가는 더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거 같으니까요.”
“……귀찮은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이번에 질문한 건 교황이었다.
아리나의 문제에 속으로 어떤 결론을 내린 건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아직까지 호의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용해야지. 어차피 잘 되기만 하면 서로에게 나쁠 것 없는 이야기니까.
나는 입술을 한 번 핥은 뒤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추측이기는 합니다만, 아마 그가 지하 금지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대가 지하 금지에 관한 건 어떻게 아오? 극비까지는 아니나, 내부자가 아니면 알기 힘든 이야기일 텐데.”
“책에서 읽었습니다.”
“……신전의 보안 시스템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겠군.”
교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을 이었다.
“지하 금지에 대해 아는 건 일단 그렇다 치지. 하지만 살바토르가 그곳에 있다 생각하는 건 또 어째서요? 그리고 그게 키탄 님과 연관이 있다 주장하는 건 또 무슨 이유고?”
“얼마 전 그자와 또 충돌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전 안에서 있던 일을 얘기하는 거군.”
역시,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다.
리베라로 소리를 차단해서 중요한 내용까지는 전달받지 못했겠지만, 대충 싸우는 분위기였다는 정도는 보고받았겠지.
“그래서? 그때 추기경의 아들이 뭐라 얘기라도 한 것이오?”
“그렇습니다. 자신이 ‘재앙’의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알고 있다며 저를 협박하더군요.”
내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자, 회장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슬슬 얼마 전 아르곤에 나타났던 ‘바포메트’의 소문이 돌기 시작한 시점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와 같은 재앙이라니. 이게 웬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가 싶겠지.
여태 신관들이 저렇게 나올 때마다 분위기를 진정시켰던 교황도 이번에는 뭐라 말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진화될 불길이 아니라는 걸 짐작했을 거다.
나는 그 기세를 몰아 교황에게 말했다.
“살바토르가 지하 금지에 어떻게 들어갔는가, 재앙의 봉인을 어떻게 푼다는 건가, 그것이 키탄님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이 청년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터무니없는 비약을 하는가. 전부 타당한 의문입니다. 하나, 그것들은 일단 전부 뒤로 미뤄 주시지요.”
교황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만약 일이 틀어지고 나면 잘잘못을 따질 시간도 없을 테니까요.”
“…….”
교황은 다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건 결정 내리기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내 말이 틀리다고 해도 그들이 손해 보는 건 약간의 시간뿐이다.
지하 금지에 사람이 있나 파악하는 정도로 그리 많은 자원이 들어갈 리 없지 않은가. 추기경한테 얘기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눈을 뜬 교황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투를리온 경. 지하 금지를 한번 확인해 보시오. 그리고.”
교황이 나를 힐끗 보면서 덧붙였다.
“만약 저 말대로 내부에 침입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압송해서 데려와도 상관없소.”
* * *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금방 데려올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직까지도 교황이 보냈던 성기사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2급에 달하는 실력자가 걸음이 느릴 리는 없고. 역시 중간 중간 인증 절차라도 깔아 둔 건가?
나름 금지라는 이름을 하고 있는 만큼, 그러는 쪽이 더 어울리기는 한다.
뭐 그곳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교황과 추기경도 담담한 표정인 걸 보면, 딱히 걱정은 할 필요 없겠지.
나는 그쯤에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리나는 아직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아까와 같이 당황에 가득 찬 기색은 없었다.
이럴 때 보면 얘가 은근히 성녀에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다.
보통은 하루아침에 성녀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 제정신 못 차릴 텐데, 얘는 그걸 넘어 임명되기 직전 대중 앞에서 탄핵 선언까지 들은 판이다. 거기다 본인도 모르던 출생의 비밀까지 만천하에 드러났고.
내가 만약 같은 상황이었어도 제정신 차리는데 한참은 걸렸겠지.
그런데 여태 소리 한 번 안 지르고 어찌 저찌 멘탈을 되찾은 거로 봐선, 얘도 정신력 수준이 일반인은 진작에 넘어섰다.
“괜찮아?”
걱정스런 기색으로 묻자, 곧바로 답변이 돌아왔다.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놀랐는데, 지금은 비교적 괜찮아요. 어차피 성녀 자리에 그리 집착한 것도 아니었고. 제 몸에 엘프의 피가 섞였다는 건 역시 충격적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
“이상한 일이 아니라니?”
“봐요. 야채 먹으면 토한다든가, 이번 엘프 마을에 갔을 때 세계수 보고 친근감을 느낀다든가. 오히려 엘프와 관계가 없다고 하면 신기한 수준으로 공통점이 많기는 했죠.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거, 원래 내가 마을에서 했던 이야기 같은데.
그보다 녀석이 뒤에 붙인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성녀 임명이나 본인 출생보다 중요한 문제라니. 지금 상황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리나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엘프의 하프면 수명까지 닮는 걸까요? 동안이라는 소리는 많이 듣기는 했는데.”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농담까지 할 정도로 회복된 거 보면 이쪽도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하지만 아리나는 내 쪽을 흘기며 말했다.
“웃지 마요. 농담 아니란 말이야. 나는 그리 오래 살고 싶은 생각 없다고요.”
“보통은 반대 아닌가? 예전 칼페온 왕 중에도 불멸의 마법 발명하려다 국가가 파산 직전까지 몰린 경우도 있고.”
“그 사람이야 살아있으면 계속 그 권력 누릴 수 있으니 그런 거겠죠.”
“너도 성녀 되면 비슷하게 누릴 수 있을걸.”
“이제 안 될지도 모르는 판이잖아요. 게다가…… 만약 된다고 해도 아는 사람들 다 죽었는데 저 혼자 살아가고 싶지도 않아요. 그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 말은 꽤 의외였다. 평상시 얘한테서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주제랄까.
나 역시 분위기를 뒤바꿔 진지하게 대답하려는데, 녀석이 먼저 내게 물었다.
“……그보다 리안 님은 괜찮아요?”
“뭐가?”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얼굴을 보니 아리나가 머뭇대는 기색으로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본인이 질문하기 어렵거나, 내가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기에 편히 풀어 줄 목적으로 먼저 말했다.
“뭔지는 몰라도, 편하게 물어봐도 괜찮아.”
내 말에 힘을 얻었는지, 아리나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하지만 그 순간.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뒤쪽에서 폭발음 소리가 들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