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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66화 (166/225)

너의 코드가 보여 (166)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원작대로라면 분명 추기경의 저 작은 반란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무너진다. 다른 사람들이 딱히 뭘 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수정 구슬이 빛을 발해 신의 지지를 선언하기 때문이다.

결국 키탄의 의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대주교 넷이 마음을 되돌려 추기경 혼자만의 반대로 성녀에 임명된다는 이야긴데…….

다른 경우의 수는 계산한 적 있어도 이런 건 짐작에 두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변하지 않을 전제 조건과 같았으니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 가짜로 바꿔치기했나 코드를 확인해 보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설마 이렇게 버림 패로 쓴다고?

물론 키탄은 이득만 된다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놈이지만…… 딱히 그럴 만한 이유가 없을 텐데?

풀리지 않는 의문에 복잡하게 뒤엉킨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신관들 역시 수정 구슬을 보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이 상황에 동요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위쪽에서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조용.”

신관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고정된다. 정확히는 내 뒤의 교황을 향해서.

“키탄께서는 신중하신 분이라 곧바로 대답을 주시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으시오. 하니, 지금 당장 신께서 지지를 철회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지.”

그 말에 웅성이던 실내가 조금은 조용해졌다. 그를 확인한 교황이 회장을 한 번 둘러보곤, 다시 추기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 우리는 일단 인간의 일에만 신경을 쓰면 되겠소. 실베스터 추기경. 반대의 이유를 밝힐 수 있겠나?”

교황의 질문에도 추기경은 한동안 말없이 수정 구슬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걸 보고 확신했다.

이건 추기경의 예상에도 없던 일이었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려는데, 잠잠히 있던 추기경이 시선을 아리나에게 향했다. 녀석은 당황했는지 아직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물론 이유는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지요.”

“두 가지라……. 그게 무엇인가?”

“먼저 하나는 저희에겐 성녀가 필요 없다는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있는 게 오히려 손해에 가깝습니다.”

그런 쪽으론 생각도 못 해 봤는지 나름 조용해졌던 회장이 재차 소란스러워졌다.

교황은 그를 다시 한 번 진정시키고 침착한 눈으로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손해에 가깝다라……. 그 이유도 한 번 설명해 보게.”

추기경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교황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 교단의 힘이 더 커지는 걸 두 왕국에서 용납할 리 없다는 사실을요.”

“…….”

“저희만의 도시를 만들겠다고 한 순간부터 선은 한참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왕국에서 저희를 가만히 내버려 둔 건, 그냥 저희 교단이 애매하게 컸기 때문이지요. 괜히 건들기엔 여론이 신경 쓰여 차라리 모른 척 넘어가자 하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추기경은 시선을 교황에게 향했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의 신관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녀가 생긴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다른 종교와 달리 교황밖에 없는데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저희 교단이지요. 한데 이 상황에 성녀까지 생겨난다면, 왕국도 더 이상 키탄 교를 좌시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좌시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 군대를 꾸릴 가능성까지 있겠죠.”

교단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소리다.

상당히 지나친 비약이었지만, 회장의 분위기를 돌리는 데는 그걸로 충분했다.

“……군대? 왕국이 우리를 공격할 거란 얘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진 하지 않겠지. 왕국에도 키탄 교를 믿는 신자가 얼마나 많은데. 다른 제재면 몰라도.”

“어쨌든 뭔가 규제를 걸긴 걸 거라는 소리잖아. 아직까지 키탄께서 응답이 없기도 하고……. 그분께서도 마음을 돌린 거 아니야?”

신관들의 여론이 서서히 추기경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여태 아리나를 비호하고 있던 교황은 그에 큰 동요가 없는 눈초리였다.

그는 재차 추기경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너무 비약적이긴 하나,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지. 하지만 우리는 키탄의 종일세. 인간의 문제가 어찌 되든 그분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 입장이란 소리야.”

아마 교황의 저 말에 추기경이 하고 싶은 대답은 오직 하나였을 거다.

‘인간의 문제가 어찌 되든 신경 쓰지 않는 신이라면, 우리가 그를 굳이 믿고 따라야 할 까닭이 대체 뭐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솔직히 신관이 아니라면 한 번쯤 해 봤을 법한 상상이다. 문제는 이곳이 신전이고, 그는 신관. 그것도 그 꼭대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추기경의 위치란 거지만.

비교적 종교에 문외한인 나도 아는 걸 추기경이 모를 리 없다.

그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아직도 잠잠한 수정 구슬을 가리켰다.

“그분의 의견 또한 이미 나온 것 같습니다만.”

“아직 임명식은 끝나지 않았네.”

“완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셨다는 거군요. 뭐, 일단은 그리 넘어가지요. 그럼 곧바로 두 번째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이번 것은 교리와도 관계가 있으니까요.”

“……교리와 관계가 있어?”

왕국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발언에도 꼼짝 않던 교황이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추기경은 그를 보고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후보의 태생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설마 성녀께서 레이튼 출신 고아라는 걸 짚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당연히 교리와도, 인간의 선택과도 무관하네.”

“그 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말 그대로 태생이 무엇인가 정확히 짚으려는 것 뿐이지요.”

“……아무래도 지역이나 신분을 얘기하는 건 아닌 것 같군.”

“그렇습니다.”

추기경이 단호하게 대답하더니, 아리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담담히 말했다.

“아리나 성녀 후보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라니?”

“정확히는 반만 인간이라 할 수 있지요.”

나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아리나는 떨리는 눈으로 추기경의 입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차피 있을 일이긴 했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그리 좋지 않은데…….

일단 기운을 내뿜어 녀석의 귀를 살짝 막으려는 순간. 추기경의 싸늘한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그녀는 엘프와 인간의 피가 반반 섞인, 단순한 잡종입니다.”

* * *

이 세계에는 예로부터 이종족을 혐오하는 문화가 자리 잡혀 있다.

단순히 생김새가 다르다든가 특징이 다르다든가 하는 간단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훨씬 근본적인 문제가 있던 탓이다.

바로 여기서 이종족은 오백 년 전 이계에서 침략해 온 침략자들의 후손이라는 것.

원래 벨리아 대륙은 인간들과 몬스터 몇 만이 존재하는 평화로운 곳이었는데, 그걸 놈들이 더럽혔다 여기는 거다.

어찌 보면 정당한 분노였지만, 사실 이종족도 변명 거리는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침략자가 아니었다.

단지 강제로 징용되고 부려 먹히는 노예였을 뿐. 그들 역시 이계에 침공당하고, 본인들의 세계를 강탈당한 피해자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들에겐 상황이 유리해 보이니 붙는 박쥐 같은 놈들이란 조롱밖에 못 들었지만, 전쟁 막바지에는 전향해서 같이 이계를 상대로 싸웠으니 동지에 가깝지 않느냔 주장이다.

어쨌든.

인간과 이종족 어느 쪽의 의견이 옳으냐는 둘째 치고, 지금은 그러한 차별인식이 꽤 많이 바뀐 편이다. 전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두 왕국이 연합을 인정한 덕분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두 집단이 있었으니.

첫째는 이계를 물리치고 국가를 건설한 해방왕의 후계자, 제국의 생존자들이었고.

둘째는 인간들만의 신을 따르는 자, 키탄의 신전이었다.

“……추기경. 본인의 발언에 책임질 자신이 있으니 하는 말이겠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교황의 질문에, 실베스터 추기경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부모가 누구인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후보의 머리카락을 마탑에 보내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그녀는 틀림없이 엘프와 인간의 혼혈입니다.”

“……이종과의 임신은 확률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명 났었을 텐데?”

“거의가 절대는 아니지요. 저는 그저 결과로 말할 뿐입니다.”

교황은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침묵을 택했다. 추기경은 그를 보고 계속해서 말했다.

“오직 인간만을 신도로 인정한다는 교리도 있는 마당에, 갑자기 성녀가 이종족과의 혼혈이라뇨? 이야말로 키탄께 반하는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키탄께서 그 사실을 몰랐을 거 같은가? 어쩌면 이번에 그분이 엘프를 콕 집어 도움을 준 것도 그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네. 우연이라기엔 절묘하지 않나.”

원래라면 교황의 의견이 제대로 먹혔을 것이다.

키탄이 오랜만에 내린 신탁이 엘프를 도우란 건데, 그 임무 당사자로 뽑은 성녀 후보가 마침 엘프와 인간의 혼혈이다?

교황의 말대로, 이런 우연이 쉬이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로 설득되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추기경이 다시 한 번 어둠뿐인 수정 구슬을 가리켰다.

“하면, 키탄께서는 왜 아직까지도 침묵을 택하고 계신 겁니까?”

“…….”

“키탄께서 이 사실을 아셨든 모르셨든, 적어도 지금 성녀의 등극을 바라지 않는 건 사실이라는 소립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 교황이 조용히 눈을 감아 버렸다. 아리나 역시 본인도 몰랐던 출생의 비밀에 충격받았는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질문의 화살이 갑자기 내게로 날아왔다.

“한데, 자네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

추기경의 물음에 나는 태연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본인도 모르고 있던 것 같은데,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런 것치곤 침착해 보여서 하는 말일세. 아, 자네는 키탄 교도가 아니니 이 사태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를 수도 있겠군.”

은근히 나를 외부자로 몰아 버리는 말이다.

내가 뭐라 발언하든 간에 전부 본인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부외자의 발언으로 만들려는 거지.

나는 그 낌새를 눈치채고 담담하게 웃었다.

“확실히.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교에 투신한 몸은 아니다 보니 가슴으로는 잘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요즘 시대에 이종족이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이 난리들인지…….”

순간, 회장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전부 나의 도발 같은 발언에 분노한 것이다.

추기경은 설마 내가 이렇게까지 멍청히 나올 줄 몰랐다는 듯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성녀님의 의견도 자네와 같다고 여겨도 되겠나?”

“제 의견이 어째서 성녀님의 의견이 되는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마 키탄 님의 의견은 저와 비슷할 겁니다.”

“신도도 아닌 자가 어디 그분의 의견을 멋대로……!”

아리나의 임명을 반대한 대주교 중 하나가 성이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추기경은 그를 한 손으로 제지하고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보이는 상황은 그와 많이 다른 것 같군. 수정 구슬은 반대를 표하고 있네.”

“반대를 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를 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추기경의 질문에 회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냥 이곳이 의견을 표하기 적합하지 않아 침묵하고 계시는 것뿐이지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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