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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65화 (165/225)

너의 코드가 보여 (165)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서 잠시 제자리에 멍청히 서 있었다.

솔직히 아리나의 반응을 보고 생각보다 대우해 주겠네, 예상하긴 했다. 만약 나쁜 일이었다면 녀석이 그렇게 행동하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행사가 시작한 이후의 얘기지, 설마 등장 순서까지 바뀌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건 벨리아 대륙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분이 나오셨군.”

계속해서 이어지던 환호와 박수 소리가 멈추고. 교황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환영하오. 신성한 자여. 그대의 자리는 이쪽이요.”

그러면서 본인의 밑에 있는 의자를 가리킨다. 추기경의 바로 옆. 신전의 2인자를 뜻하는 위치다.

“……추기경님의 옆자리?”

“아니, 차례를 양보한 것도 모자라 저렇게까지 대우해 준다는 말인가?”

“이건…… 심상치 않군.”

대주교급 이상의 지도부 사이에서만 상의된 내용인지, 회장에 모인 주교급 이하의 신관들이 경악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보였다.

그 반응들 덕분에 나는 오히려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신성한 자.

그냥 찬사 비슷한 거라고 넘어가기엔 너무 노골적인 단어 선택이다. 보통 이럴 땐 대부분 당사자에게 붙은 칭호로 호칭하니까.

나 같은 경우엔 ‘망국의 초신성’이라든가 ‘레이튼의 성자’라든가 이런 거.

성스러운 기사니 뭐니 하던 것도 그렇고, 아예 나를 본인들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인가?

문제는 저렇게까지 해 가면서 끌어들일 정도의 가치가 내게 있느냔 건데…….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직 내가 저런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수준은 결코 아니다. 저건 일국의 재상급은 되어야 받을까 말까 한 예우니까.

역시 아리나의 입김인가?

잠시 고민하다가 씨익 웃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안 좋은 상황은 아니다. 이렇게까지 나와 준다면 순순히 받아 주는 것이 예의겠지.

아까까지 망설이던 모습은 잊어버리고 당당히 회장 중앙을 걸어갔다. 양옆에서 나를 응시하는 눈길들이 쏟아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경계나 질시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경탄의 빛이다.

나는 그 어느 쪽에도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하게 의자에 앉았다.

한발 늦은 박수가 터져 나오고, 나를 보는 교황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제 짝꿍이 된 추기경이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성녀님께 뭔가 얘기 들은 것이 있었나?”

“행사에 관한 걸 물으시는 거라면, 전혀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추기경의 눈동자에 한 줄기 흥미가 담겼다.

“그런 것치곤 상당히 침착하군. 자칫하면 부담스러운 자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말 한마디에 판단을 마쳤다.

역시 얘가 입단속시킨 거였구나.

상식적으로 이런 중대한 사건을 당사자에게 말도 없이 진행시킬 리가 없다.

내가 이런 대우를 받게 된 건 추기경과 무관할지 몰라도, 그걸 내게 알리지 않은 것은 그의 입김이 들어갔겠지.

그리고 그렇게 한 이유도 대강 짐작이 갔다.

작게는 신관들의 반발심을 노린 걸 거다.

키탄이 신전 소속도 아닌 내게 임무를 맡긴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거기다 지휘부까지 나를 극진하게 모시면 분명 배알 꼴려하는 인간들이 나올 테니까. 그 와중에 내가 모자란 모습이라도 보였다면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이쪽은 중간에라도 정신 차린 덕분에 잘 해결되었다. 애초에 주목적도 아니었을 테고.

역시 또 하나는…… 나중에 할 본인의 ‘발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추기경은 선택을 잘못했다.

그쪽은 이미 손을 써 둔 데다,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렇게 성대한 건 처음이지만, 비슷한 경험은 몇 번 겪어 봐서 익숙한 편입니다.”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자네도 큰 상단을 이끄는 몸이니까.”

궁금한 건 그게 전부였다는 듯 추기경이 시선을 정면으로 되돌렸다. 나도 그와 똑같이 어깨를 으쓱이며 회장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만만한 놈들이 없다니까.

내가 본인과 맞먹는 위치에 앉는단 것은 불쾌하고 불리한 일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와중에 그걸 유리하게 써먹으려 시도하다니.

무난하게 원작대로 흘러갈 거라 생각하고 편안히 있었는데, 조금 긴장해야겠다. 뭔가 또 다른 걸 준비해 놨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무튼, 내 아래 위치한 대주교 몇몇과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입구의 신관이 다시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오늘 임명식의 주인공, 수백 년 만에 탄생한 성녀님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이번에는 환호나 박수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모두 말없이 출입구를 응시할 뿐. 그리고 문이 완전히 개방되었을 때. 회장에 누군지 모를 감탄 소리가 흘러나왔다.

“와아…….”

위치를 찾는 건 의미가 없었다. 한두 군데에서 터진 음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만 모인 자린데 너무 체통이 없는 거 아닌가도 싶었지만, 솔직히 내가 봐도 그럴 만하기는 했다.

문틈 사이로 드러낸 아리나의 모습은 정말 성녀라는 말이 어울려 보였으니까.

“…….”

분명 분장실에서 봤던 모습인데, 왜 지금은 저렇게까지 달라 보이지?

어쩌면 표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전에 주문받은 게 있는지 평소와 달리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 분위기가 저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나 싶기는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걸 부정할 수도 없고.

어쨌든 한 가진 확실했다.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낯선 느낌이라는 거. 갑자기 뭔가 거리가 멀어진 듯한 기분이라 해야 하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묘한 심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아리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그녀가 내 앞까지 도착했다.

성녀의 지정석은 교황의 바로 옆.

이대로 지나쳐 뒤쪽으로 가겠다 싶은 찰나.

“리안 님.”

녀석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에게만 보일 정도로 작게 미소 지었다. 아까의 차가운 표정은 전부 꾸며 낸 거라는 것처럼.

“말씀 안 드려서 죄송해요. 저는 알려 주는 게 낫지 않나 싶었는데, 추기경 님께서 이런 건 원래 깜짝 놀라게 하는 거라고…….”

역시 그런 거였나. 애초에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라 문제 될 건 없었다. 얘야 사정을 모르니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고.

미안함 반, 어색함 반을 섞고 있는 얼굴을 마주 봤다.

아까의 낯설었던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진 뒤다. 누가 ‘착각한 건 너였어요.’라 얘기라도 하고 있는 듯하다.

분장실에서 했던 말도 생각났다.

조금 기분 안 좋았었는데 내가 평상복 입은 거 보니 바로 풀렸다는 거.

그때 녀석도 지금의 나와 비슷한 심정 아니었을까?

서로 원래 모습이 아니면 생소하게 느껴질 만큼 익숙해졌다는 거지. 추리닝만 입던 가족이 갑자기 양복 차려입은 광경을 보면 어색하게 보이듯이.

솔직히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피식 웃고 조용히 대꾸했다.

“그런 건 됐으니까 그만 자리에나 가서 앉아라. 사람들 쳐다본다.”

“지들이 쳐다보면 뭐 어쩌겠어요? 성녀는 전데.”

표정 관리하느라 애쓰고 있던 게 말은 잘해요.

아리나는 내가 한 번 더 재촉하고 나서야 제자리에 가서 앉았다. 곧이어 교황이 축사를 하고, 행사가 시작되었다.

원래도 딱히 평등에 비중을 준 종교는 아니었던 만큼, 위치는 철저하게 분리되었다.

주교급까지는 아래. 대주교급 이상은 위.

덕분에 나는 신관 몇몇이 가져다주는 음식과 술을 먹으며 회장 안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어디 보자.

가장 걱정했던 릴리아는 생각보다 활기차게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 역시 모자는 푹 눌러쓴 채기는 했지만.

하긴, 쟤가 아는 사람 없다고 처박혀 있을 스타일은 아니지. 괜한 염려를 한 것 같다.

안심하고 시선을 떼는데,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내가 한 소리 했던 추기경의 아들. 나중에 얼핏 듣자니 이름이…… 샅바토스였던가?

아마 비슷한 느낌이긴 했을 거다.

별로 좋은 인연도 아니고, 별다른 감정도 없었지만, 떠오른 김에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어차피 그 외에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대화를 나누며 회장을 둘러보길 잠시.

나름 꼼꼼하게 뒤졌음에도 녀석을 발견할 순 없었다.

아무래도 임명식에 참석하지 않았나 보지?

얼추 짐작한 일이긴 하다. 나 같아도 사이 나쁜 녀석이 주인공인 행사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그래도 일단 중요한 행사이긴 한 만큼, 잠깐 얼굴이라도 비추지 않을까 했었는데.

깊게 생각하진 않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그런 녀석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이 많기도 했고, 때마침 교황도 이 지루한 식전 행사의 끝을 알리고 있었으니까.

“처음 있는 임명식이라 준비가 미흡했을 텐데, 다들 잘 즐겨 주어서 고맙소.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가장 중요한 식은 아직 따로 있지.”

곧바로 잔잔하게 울려 퍼지던 음악 소리가 멈추고. 하하 호호 웃고 있던 사람들도 앞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교황은 그들을 둘러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바로 후보가 성녀에 적합한지 표결하는 것이오.”

그 말대로, 아리나는 아직 성녀가 된 것이 아니다. 임명식을 무사히 마치기 전까진 후보 신분일 뿐이지.

정식으로 임명받기 위해선 신성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 외에도 대주교급 이상 아홉 명의 과반 표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제까지 모두가 녀석이 벌써 성녀라도 된 것처럼 대한 점에서 알 수 있듯,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기도 하다.

본인들의 신이 고르고, 맡긴 임무까지 무사히 완수했는데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나는 교황 뒤, 회장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정 구슬을 바라보았다.

신의 의사를 표현해 주는 성물로, 만약 전원이 찬성한다 해도 저기서 빛이 나지 않으면 게임은 그대로 끝이다.

신이 ‘아차, 실수.’ 했다는 걸로 받아들인다 해야 하나.

물론 정말 그렇다 할지라도 빛이 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신이 실수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권위가 바닥까지 떨어지는 수가 있으니까.

어차피 4, 50년 안에 수명 다해서 죽을 거 그냥 참고 기다리겠다는 심정이겠지.

어쨌든, 처음 겪는 임명식이라 그런지 이에 대해 모르는 신관이 많았다. 교황은 그들에게 규칙을 설명한 뒤, 자리에 착석하며 말했다.

“참고로 투표는 거수식이요. 혹시 후보가 성녀에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는 분이 계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손을 들어 주시오.”

아래의 신관들이 벌써 박수를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들도 형식적인 절차라는 걸 눈치챈 거겠지.

하지만 그들의 눈에 당혹의 빛이 감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베스터 추기경, 지금 이게 무슨 의도지?”

“의도랄 것도 없습니다, 교황님.”

추기경은 담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냥 저와 대주교 넷의 뜻이 같았을 뿐이지요.”

손을 든 사람이 추기경까지 총 다섯.

성녀의 임명을 반대하는 숫자가 과반을 넘겼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였지만…….

나는 떨리는 눈으로 교황 뒤편의 수정 구슬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빛이라곤 하나 없는, 그저 어둠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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