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64)
이 망나니 자식이 갑자기 왜 아버지를 배신하고 나한테 들러붙으려는 건진 잘 모르겠다.
처음엔 또 추기경의 수작인가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자가 이 머저리를 다시 써먹을 리도 없었고.
굳이 추측해 보자면 야단을 맞았다든가 하는 그런 한심한 이유겠지 뭐.
어쨌든 중요한 건, 나한테도 이 녀석은 별 쓸모가 없다는 거다.
“네가 해야 할 건 나한테 와서 거래를 제안하는 게 아니었어. 네가 깽판 부렸던 가게에 찾아가 사죄하는 게 먼저였지. 안 그래?”
“……미, 미안하다. 사, 사과하면 됐지 않나.”
“나 말고 가게. 병신아.”
솔직히 나는 이 녀석 사과야 어찌되든 정말 하나도 관심 없다.
딱히 실질적인 피해를 본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따지자면 내가 훈계한 쪽에 가까우니까.
“아버지 때문에 삐뚤어졌다 변명이라도 해 보려면 적어도 그 정도 성의는 보였어야지.”
나는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몸을 돌렸다.
이쯤 했으면 이제 붙잡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솔직히 나도 조금 심했나 싶을 정도로 몰아붙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조차 순진한 소망이었나 보다.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뒤쪽에서 원독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후회할 거다.”
순간, 잠시나마 들었던 미안한 감정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이만큼 얘기했으면 최소한 제정신 차리는 척은 할 줄 알았는데.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녀석을 향해 살짝 기운을 방출했다.
“내가 어떻게든 네놈을 지옥 구렁텅이에…… 끄악!”
녀석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이마를 부여잡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신관 말단만 돼도 막을 수 있을 만큼 가볍게 뿜은 건데 아예 반응도 못 하다니…….
솔직히 이 정도면 상대해 주는 내가 우습게 느껴진다.
나는 죽어라 엄살 부리고 있는 녀석을 일별한 뒤, 그냥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 * *
“젠장, 젠장!”
살바토르가 연신 욕설을 내뱉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처음 받은 명령이 너무도 하찮은 것이라 싫었고, 그걸 말한 대로 해냈는데도 폭언을 들은 것에 이르러선 완전히 불합리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었다. 항상 두려워했던 아버지를 상대로 반항을 해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제깟 놈이 날 무시해?’
망국의 초신성.
그 이름은 살바토르도 정말 질릴 만큼 들어 왔다. 그야 요즘 대륙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두 사람 중에 하나니까.
스물도 채 안 된 나이에 3급의 무력. 이제는 대륙급 상단으로 거듭난 리안 상회의 주인. 그리고 거기서 번 돈을 뿌려 얻은 인망까지.
홀연히 나타나 오직 무력만으로 이름을 날린 단테와 달리, 사회적 영향은 오히려 그보다 더 클 거라 알려진 젊은 신진이다.
살바토르가 생각하기에도, 그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안할 정도의 차이가 났다.
‘……그러면 뭐해 애미, 애비도 없는걸.’
아무리 유망하다 해도 결국 그뿐.
2급 성기사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아버지를 둔 그와의 비교는 불가능하다.
본인조차 속이지 못하는 변명거리였지만, 살바토르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그런 식으로 자신을 달래 왔다. 그마저 하지 않으면 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함이 눈앞을 덮쳐오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건, 모든 게 잊혀질 때까지 술을 축내는 것밖에 없었다.
살바토르는 씩씩대며 찬장 가까이 다가갔다. 여느 때처럼 술병을 꺼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문고리에 손이 닿은 순간.
‘……잠깐.’
어느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지하 금지 쪽에 500년 전 봉인된 존재가 하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어릴 적 얼핏 들은 이야기다. 아직 그가 성실히 수업을 수행하고, 아버지도 비교적 친절히 대해 주고 있었을 때.
‘분명…… 재앙인지 뭔지 하는 거창한 호칭이었던 거 같은데.’
그 이름값의 절반만 할지라도 무언가 보여 주는 것이 있을 거다.
예전에 발견한 지하 금지까지 뚫린 개구멍을 떠올리며, 살바로트는 입가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 * *
본청에서의 나날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한가하지만은 않았다.
일단 릴리아에게 정령술을 가르쳐 줘야 했던 건 둘째치고, 알고 보니 행사의 주역들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한 임무에서 성녀의 보좌를 한 성스러운 기사라나?
정작 보좌는 걔가 한 것 같지만…… 굳이 이에 대해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두 번째 주인공이라는 역할조차 귀찮기도 했고, 나만 안 끼었으면 대충 인사만 하고 오는 난이도로 쉽게 해결했었을 게 분명하니까.
거기다 성녀 임명식인데 ‘사실 임무에 딱히 기여한 건 없어요.’ 할 수도 없었을 테고.
아무리 그래도 ‘성스러운 기사’라는 단어는 내가 신전 소속인 것처럼 보이게 될까 봐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하나 싶긴 했는데, 나는 이것 역시 관대하게 넘어갔다.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보다 내가 신전과 친한 사이라는 소문이 도는 게 더 이득이라는 판단에서다.
아무튼, 어떤 이유가 있든, 두 가지 모두 내가 순순히 받아들여 줬기 때문에 용인되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거다.
하지만 임명식 당일인 오늘. 지금.
“…….”
다른 건 다 참아도, 이건 도저히 못 참겠다.
“왜 내 복장이 검은색 양복인 건데?”
그것도 그냥 양복이 아니라 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과할 정도는 아니지만, 눈에 심히 거슬린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심플함과는 거리가 멀다.
“뭐 어때서요? 잘만 어울리는구만.”
옆에 있던 아리나가 불쑥 말했다.
나는 거울을 통해 그쪽을 바라보았다.
녀석 주위엔 여신관들이 새하얀 드레스에 이것저것 달아 주고 있다. 주로 신전을 상징하는 문양들이었다.
딱 봐도 쟤 쪽이 나보다 더 심하기는 하다. 저건 진짜 움직일 수는 있을지 의문이 드는 수준으로 화려했으니까.
그게 내가 이걸 받아들일 이유가 되지는 않았지만.
“손을 뻗을 때 팔꿈치가 걸려. 칼집이 상의에 가려져서 매끄럽게 닿지 않아. 발이라도 한 번 디딜까 하면 옷이 온몸을 조여.”
“그거야 당연하죠. 전투복이 아니니까요.”
“바로 그게 문제인 거야.”
나는 그대로 겉 윗도리를 벗어 의자 위에 던져 놓았다. 주위의 신관들이 그걸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내 취향의 복장도 아니지만, 백 번 양보한다 해도 저런 불편한 걸 입고 다닐 생각은 꿈에도 없어.”
“에이, 좋은 날 왜 그래요? 키탄 교 본청에서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만약 생긴다면 되돌릴 수 없을걸.”
수백 명의 사람 앞에서 옷이 찢어져 알몸으로 전투해야 할 테니까.
그 정신적 충격 때문에 이길 것도 못 이기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거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어쨌든 저는 평상복 그대로 입장할 거니까, 혹시 위에서 묻거든 그냥 제가 막무가내로 나왔다고 전해 주시면 됩니다.”
나는 그 말만 남기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방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멀어져 간다.
대충 신관들이 두 분 참 잘 어울렸는데 아쉽게 됐다며 아리나를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없어져 불편했던 건지 대답하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조금 미안한 기분도 들었지만, 어차피 주인공은 쟤인 만큼 굳이 두 명이나 눈에 띌 필요는 없을 거다.
그냥 빨리 갈아입고 돌아가면 되겠지 뭐.
그런 생각과 함께 근처 탈의실에 들어가 빠르게 원래 입던 옷으로 바꿔 입었다.
움직임에 불편도 하나 없는 데다 형상보존 각인까지 걸어 넣은 마탑의 오더메이드 작품.
겉보기엔 아까 그게 더 비싸 보일지 몰라도, 실제 값은 이게 5배는 더 나갈 거다.
내 나름대로 격식은 갖췄다는 소리지.
어쨌든 그 복장으로 다시 방에 돌아오자 신관들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며 칭찬해 줬다.
“역시 모델이 좋으니 뭘 입어도 태가 나네요!”
“어떻게 서민 옷을 걸쳤는데 귀족 느낌이 들지?”
“그러게. 너는 귀족같이 입어도 서민 느낌밖에 안 들던데.”
“뒤질래?”
어째 옷 자체에는 별 반응 없는 것 같지만……. 뭐 됐나. 비호감으로 보이지만 않으면 충분하니까.
주위에 몰려든 신관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곧장 아리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사과부터 했다.
“미안.”
“……리안 님이 갑자기 왜 사과를 해요?”
“오늘 행사 주인공은 넌데 내가 제멋대로 굴었잖아. 네 입장에선 기분 안 좋을 수도 있지.”
“별로 그렇지는 않았는데…….”
않기는. 들어올 때 꽁한 표정 짓고 있던 거 다 봤는데.
하지만 이걸 그대로 말하는 것은 하수다.
잘못한 게 있다면 일단 변명 없이 사과부터 할 것. 본인 변호는 그 이후에.
지구에 있을 당시 본 자기개발서에 나온 내용이다. 꽤 신빙성 있는 말이기도 했고.
그 가르침을 똑같이 따르려는데,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아리나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만 됐어요. 솔직히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기는 했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고. 뭣보다 리안 님 들어오는 거 본 순간 바로 풀리더라고요.”
“내가 들어왔을 때?”
“네. 만날 보던 그 복장이라 그런가. 그게 제일 잘 어울리긴 하더라고요. 아, 아까 전 옷이 안 어울렸단 소리는 아니고요.”
눈에 익숙하다 이건가.
나도 지금 이걸 입었을 때가 가장 편안하긴 하다.
몸뿐만의 얘기가 아니라 마음 쪽까지 포함해서. 비교적 현대의 옷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오늘의 주인공이 저만은 아니거든요?”
“성녀 임명식인데 네가 주인공이지 또 누가 주인공이야? 나는 그냥 옆에 선 들러리 같은 거지.”
“글쎄요.”
아리나가 뭔지 모를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건 나중에 보면 알겠죠?”
“…….”
뭐지? 분명 뭔가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인데.
나는 임명식에 대해 제대로 들은 것이 없었다. 애초부터 알려 달라고 한 적도 없었고.
어차피 뒤에서만 치하해 주고 행사 당일은 조용히 묻힐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안 그럼 주인공인 성녀의 후광이 그만큼 빛을 바래 버릴 테니까.
달리 뭐를 기대한 적도, 바랜 적도 없었는데……. 뭐가 있는 건가?
그에 대해 물어보려는 순간, 신관 하나가 들어와 우리를 호명했다.
“성녀님, 기사님. 이제 임명식이 준비되었습니다.”
그 말에 아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긴장되네. 그럼 갈까요?”
“……너 알고 있는 게 뭐야.”
“으음……. 무슨 소린지 잘 못 알아듣겠어요.”
그러더니 능청스런 얼굴로 먼저 나가 버린다.
이게 쟤 방식의 복수는 아니겠지?
잠시 그렇게 의심했지만, 어차피 여기 있는다고 뭐가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결국 약간의 불안한 마음을 지닌 채 신관을 따라 행사장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거기서 살짝 한숨 쉬었다.
그날 중요한 순서대로 입장하는 규칙상 분명 내가 제일 먼저 입장하게 될 거다.
아마 나, 대주교 7명, 추기경, 교황, 아리나 이 차례대로겠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한참 동안 혼자 있어야 한다는 건데……. 그것도 은근히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런 사소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우리를 안내한 신관이 크게 소리쳤다.
“곧이어 ‘망국의 초신성’, ‘레이튼의 성자’, ‘성스러운 기사’의 칭호를 가지신 리안 님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거, 쓸데없이 길기도 하네. 그보다 성스러운 기사는 언제 칭호로 붙인 거냐?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스르륵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이것도 경험이거니 버텨야지 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열렬한 환호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든 순간.
“…….”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살짝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당연히 나보다 늦을 거라 생각했던 이들이 먼저 들어와 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7명의 대주교와 추기경은 물론.
짝짝짝짝.
신전의 최정상. 교황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