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63)
굳이 꾸물거릴 거 없이 바로 안내에 따라 추기경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관이 한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바로 이곳입니다.”
신관은 곧바로 문을 여는 시늉을 하더니, 아차 하며 나를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추기경님의 손님은 오랜만이라 깜빡할 뻔했군요. 원래는 혹시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 편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보죠?”
“문제라기보다는…… 추기경님께서 요구한 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관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다름이 아니라, 추기경님께선 불필요한 절차를 굉장히 싫어하시는 경향이 있으십니다. 해서, 본인에게 용건이 있으면 노크 없이 그냥 들어오도록 지시하셨지요. 딱히 저희 교단만의 규칙이라거나 그런 게 아닙니다.”
이건 설정과 똑같네.
그보다 추기경 때문에 헷갈린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저렇게 경고까지 하는 거 보면.
“상당히 효율적인 걸 추구하시는 분인가 보군요.”
“뭐, 좋게 말하면 그렇긴 하지요. 솔직히 저는 노크 정돈 주고받는 편이 서로 더 마음 편하지 않나 싶기는 합니다만.”
살짝 투덜거리듯이 말한 신관이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을 보지도 않은 채 나를 돌아보며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부디 잘 해결 보시길 빌지요.”
그러더니 망설임도 없이 떠나간다.
나는 그대로 신관의 뒷모습을 잠시 황당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안내하는 경우엔 소개도 생략한다는 설정도 여전한가 보네.
어차피 알고서 불렀을 텐데 무슨 잡담이냐는 이유였던가.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이게 대체 뭔가 싶다. 갑자기 다른 행성으로 떨어져 버린 기분이라 해야 하나.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지 않는 국가가 있다는 급의 문화 충격이다.
아무튼, 여기 있어도 할 일은 없었기에 그만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내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덩그러니 놓인 침대와 책상, 그리고 의자 네 개. 그게 내가 쓰던 방의 두 배 정도 크기 공간에 있는 가구의 끝이었다.
그중 한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인이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군. 기다리고 있었네.”
날카로운 인상이기는 하지만, 어조는 나름 호의적인 투다.
아마 추기경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저 모습에 호감을 느낄 수도 있을 거다.
불필요한 절차를 생략하는 건 그가 탈권위적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이 삭막한 방의 풍경은 그가 검소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 테니까.
정작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벨리아 대륙식 미니멀리즘에 마음까지 휑하니 비어 가는 기분밖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그걸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살짝 고개 숙여 화답했다.
“추기경님을 뵙습니다. 리안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네. 사실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이름이지. 요즘 대륙에 아이언의 제자면서 최초로 위 등급을 이겼다는 단테 경과 함께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자네니까 말이야.”
“그래 봤자 떠오르는 신성일 뿐이지요.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 잡으신 추기경님의 명성에 비할 바가 되지는 못합니다.”
“떠오르는 신성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는단 소리군.”
“그것까지 부정해 버리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기만 아니겠습니까?”
담담하게 되묻자, 추기경이 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지. 대륙 역사상 어느 누구도 자네 나이에 그 같은 업적을 이루진 못하였으니. 아, 거기 앉게.”
가리키는 의자에 다가가 순순히 몸을 기댔다. 그러자 사설은 이제 됐다는 듯 추기경이 곧바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식당에서 있었던 일은 들었네. 내 아들놈과 문제가 있었다지.”
“추기경님의 자식인 건 모르고 생긴 일입니다.”
“만약 알았다면, 그냥 내버려 두었을 건가?”
글쎄. 한 번 더 생각해 보긴 했을 거다.
권위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 분명 나를 노리고 일부러 그랬다는 걸 눈치챘을 테니까.
하지만 결국 결론은 같았겠지.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솔직하군.”
추기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내가 정의감 같은 거 때문에 그랬을 거라 받아들인 모양인데…….
나는 피식 웃으며 그에 대해 뭐라 덧붙이진 않았다. 어차피 착각은 자유니까.
아무튼, 그 후로 추기경은 형식상의 사과를 한 뒤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아리나의 음식 취향이나 생활 습관과 같은 것들이었지만, 종종 나에 대한 질문들도 있었다.
“듣자니 정령술까지 익힌 것 같더군. 대체 그런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건가? 분명 검술에 상단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터인데.”
“이번 임무 중 우연히 익히게 됐을 뿐입니다. 마침 엘프들의 마을이기도 했으니까요.”
“흠. 열흘 남짓한 기간 만에 임무를 해치운 것도 모자라 정령술까지 익혔다라…….”
턱. 필기하고 있던 책을 덮은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됐든 고맙네. 덕분에 성녀님을 보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어. 사과를 하고자 불렀는데, 어쩌다 보니 귀찮게만 만든 것 같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성녀님에 관한 거라면 저도 관계가 없지는 않고요. 그보다 한 가지 여쭤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무엇이든.”
나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신도도 아닌 제가 이번 임무를 맡은 이유에 대해선 추기경님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키탄 님과의 독대를 말하는 거군.”
“예. 혹시 그게 언제쯤 가능할지에 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그때, 추기경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짜 감정이라 할 만한 것이 떠올랐다. 불쾌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금세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아마 성녀님의 임명식이 끝나는 대로 교황님께서 먼저 부르실 걸세. 물론 키탄께서 받아 주신다는 보장은 없지만.”
“시도해 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추기경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다음번에 만나는 건 곧 있을 성녀님의 임명식이 되겠군요. 그때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추기경은 잠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이내 몸을 돌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도 부디 그때까지 무탈하길 빌지.”
* * *
생각보다 유익한 만남은 아니었다. 결국 오간 얘기라 해 봤자 거의 서로 안부를 묻는 수준에 가까웠으니까.
내심 특별한 정보 정도는 기대했었는데.
나는 실내 정원 의자 한구석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개입하게 된 이상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확인차 온 거였지만, 일단 그런 건 없어 보인다. 이대로라면 굳이 내가 뭐 손댈 것도 없이 그냥 원작처럼 무난하게 흘러가겠지.
그럼 오랜만에 휴양이나 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키탄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길진 않을 테니 질문지라도 작성해 놓으면 괜찮겠다.
그렇게 할 일을 정하고 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이봐.”
뒤쪽에서 어떤 음성이 나를 붙잡았다.
최근 들어 본 듯한 조금 익숙한 목소리다.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식당에서 시비가 붙었던 추기경의 망나니 자식이었다.
녀석은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안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지?”
내게 대답을 기대하는 것 같았지만, 솔직히 나는 이 녀석한테 남은 관심이 없었다. 별로 상대해 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냥 어깨를 한 번 으쓱여 주고 떠나가려는데, 놈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기 멈춰!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냐!”
“잘 알아들었으니 제발 그 아가리 좀 조용히 다물어라.”
“……뭐, 뭐?”
설마 신전 내부에서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지 녀석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모습을 일별하고 갑자기 터진 고함에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신관들을 가리켰다.
“다들 일과 시간이잖아. 그런데 만날 처 놀고 있는 네가 소리까지 지르며 관심을 끌면 어떻겠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겠지?”
“……아직 못 들었나 본데, 나는 추기경 님의 자식…….”
“네 아버지가 누군지는 나도 잘 알지. 방금 그분께 스물을 훌쩍 넘긴 자식의 사과를 대신 받고 오는 길이거든.”
솔직히 적어도 옆자리에는 서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나를 붙잡은 이유가 뭔데? 혹시 사과하려는 거면 받은 걸로 칠 테니까 그냥 가라.”
“……나는 사과할 이유가 없다.”
“아, 그래. 태도가 일관돼서 좋다 야.”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반쯤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당황해서 입을 벙긋거리고 있던 녀석이 곧바로 나를 붙잡았다.
“자, 잠깐! 그런 게 아니라,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는 소리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면?”
“아버지가 시킨 일이었다!”
이게 갑자기 앞뒤 안 가리고 막 나가네.
나는 녀석이 ‘아’ 자를 꺼내는 순간부터 바람을 조절해 소리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확인한 뒤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뭐 어쩌라니……. 당연히 내 자의가 아니었으니 사과를 할 필요도…….”
“그럼 그전까지 망나니짓을 하고 다녔던 것도 전부 네 아버지가 시킨 일이었나?”
내 말에 녀석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선 몸을 굳혔다.
나는 그에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니, 만약 그렇다 해도 말이 안 되지. 너는 성인이잖아. 혹시 아직도 뭐 할 때 부모님의 지시가 필요해?”
“……그분은 키탄 교의 추기경이시다. 만약 자식이라 할지라도 눈 밖에 난다면…….”
“이 도시에 발붙이고 살 수 없었을 거라고? 그거야 네가 제일 잘 알긴 했겠지.”
무심한 눈으로 녀석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알량한 권위를 등에 업고 살아가고 있던 인간이 바로 너니까.”
“…….”
“필요할 때는 조용히 얹혀 가 놓고, 막상 안 좋을 때 되니까 그걸 변명 거리로 써먹진 마라. 네 배부른 투정 따윈 공감해 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
녀석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나는 뭐라도 대답이 나올까 싶어 잠시 기다리다가, 이내 주위에 쳐 둔 바람을 해제시켰다.
어차피 말한다 해도 별로 유익한 정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다.
주위에 있던 신관들도 어느새 전부 사라져 있었다. 안의 상황이 궁금해도 소리가 안 들리니 금세 흥미를 잃었나 보다.
그걸 보고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질리지도 않았는지 녀석이 다시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비밀을 알려 줄 수도 있다.”
아, 그러셔?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걸었다.
곧이어 당황한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진짜다! 그분은 사실 성녀를 원하지 않는다!”
“…….”
“그뿐만 아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분명 임명식 때 뭔가를 저지를 생각일 거다!”
어떻게든 나를 붙잡고 싶었는지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주위에 바람을 쳤다.
내가 설득됐다 생각한 녀석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이제야 알겠나 보군. 내가 주려는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야.”
“……뭐지?”
나는 녀석을 마주 보며 짜증 섞인 기색으로 말했다.
“그만 됐으니까 아가리 좀 닥치라고.”
녀석이 말하는 것 중, 내가 모르는 정보는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