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62)
망나니들이 가게를 떠나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제자리에서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남기고 간 말에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설마 끝까지 그런 중2병 같은 말투로 얘기할 줄이야…….
어쩌면 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건드렸는지도 모르겠다. 또 만나면 손발이 시공간 너머로 날아가 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가, 감사합니다! 어찌 보답을 드려야 할지…….”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인과 아까의 종업원이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습니다. 딱히 별일도 아니었고.”
“그, 그게…….”
사장은 뭔가 꺼림칙한 듯 말끝을 흐렸다.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예, 아마 그럴 겁니다.”
뭐지. 알고 보니 교황의 손자쯤 되나?
성호를 그리며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니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웬만한 귀족이나 부잣집 도련님 정도론 이런 반응이 안 나올 테니까.
설정상 교황은 자식이 없지만…… 지금까지 달라진 게 한두 개도 아니고. 사실 숨겨 두고 있었다며 갑자기 뿅 튀어나와도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어쨌든, 생각보다 조금 귀찮아질 수도 있겠는데.
그런 심정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사장과 종업원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 혼자 멋대로 나선 거기도 하고. 그보다 상대가 누구였는지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정말 높은 녀석은 맞는지 사장은 꽤 오랫동안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길 잠깐. 결국 한숨 내쉬듯 포문을 연다.
“다른 두 명은 별거 없는 그냥 평민 출신이지만…… 손님분과 가장 많이 대거리 한 자는 아마 추기경님의 아들일 겁니다.”
……추기경?
“혹시 키탄 교의 실베스터 루테리아 추기경님을 말하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이 도시에 또 다른 추기경님이 있을 리는 없으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상황이 짐작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나는 분명 상대가 귀족가의 사생아나 부잣집 망나니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쪽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거 같으니까.
아무튼, 크게 바뀐 건 없다.
가게에 피해 갈 일은 없을 거라 얘기하고 자리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이상하긴 하군요.”
걱정스런 눈길로 문밖을 쳐다보던 사장이 불쑥 말했다.
“이상해요?”
“예. 분명 망나니로 소문이 나 있긴 하나, 저렇게까지 막 나가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평상시에는 최소한의 선은 지키거든요.”
“아, 그거라면 이상할 것 없습니다.”
내 말에 사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뭔가 짐작 가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네.”
“혹시 그게 무엇인지…….”
굳이 답변하지 않고 씨익 웃기만 했다.
어차피 별로 저쪽이 알 필요는 없는 정보였으니까. 아니, 오히려 알게 되면 해가 된다고 해야 하나.
나는 대충 별거 아니라고 얼버무린 뒤, 이번에야말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걱정스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릴리아가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추기경이면 교황 바로 다음 가는 사람인 걸로 아는데……. 인간들은 그런 거 많이 중시하잖아요.”
“괜찮아. 어차피 한 번쯤 부딪혀야 할 상대였으니까.”
“……한 번쯤 부딪혀야 했다니요?”
“굳이 이런 방식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다른 쪽으로 뭐라도 저질러 봤을걸.”
“네?”
내 말뜻이 이해가 안 가는지 릴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아까 먹던 빵을 마저 베어 물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방금 소동은 애초에 나를 목표로 일부러 벌인 거였다는 소리야.”
어쩐지, 너무 전형적이다 싶었다.
* * *
키탄교 본청에서 1인실을 배정받을 수 있는 인물은 몇 되지 않는다. 건물이 작은 것은 아니나, 그에 비해 상주하는 인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보통 이러면 아무리 신실한 신관들이라 할지라도 불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정작 교단의 수백 년 역사 동안 이에 대해 항의하는 자들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바로 최고위급인 주교마저 2인실을 사용하고 있던 탓이다.
그만한 직위의 신관도 방을 나눠 쓰는 판국에, 누가 감히 불평을 토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그런 이유로 본청의 1인실은 교황과 추기경. 그리고 7명의 대주교와 공석인 성녀와 사도, 마지막으로 중요한 손님을 위한 방까지. 겨우 열세 개에 불과했다.
요컨대 본청에서 혼자만의 공간을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최정상 권력의 상징과도 같았다.
“아, 아버지…….”
그런 몇 안 되는 개인실 중에서도 두 번째로 큰 공간. 한 청년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 말씀하신 대로 하기는 했습니다만…….”
“내가 지시한 대로 했다라.”
하얀 신관 복장의 중년인이 아무 감흥 없는 얼굴로 청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멀쩡한 꼴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거지?”
마치 다치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투다.
본인 자식에게 하는 말이라곤 믿을 수 없이 매정했지만, 청년은 한 줌의 아쉬움조차 토로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그, 그게…… 상대는 검술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스물이 될까 말까 한 나이에 검술 말고 다른 기술까지 익힐 여력이 있었을 거라 보느냐?”
중년인의 싸늘한 말에 청년이 잽싸게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정말입니다! 제가 직접 겪었단 말입니다!”
“겪었다고?”
“상대는 정령술을 익힌 상태였습니다!”
정령술.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가 희귀해서 그렇지, 일단 소질만 있으면 한 달 안에라도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기는 하다.
그뿐만 아니라 장점은 하나 더 있다.
바로 은밀하게 익힐 수 있다는 것.
마법은 스승이든 뭐든 흔적이 남으나, 정령술은 그렇지가 않다. 일정 이상의 친화력만 있으면 혼자서 계약을 마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조사에 걸리지 않았던 건가?’
추기경이 곰곰이 생각했다.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뒀음에도 아들의 얘기를 무시한 건 그런 이유도 있었는데, 정령술이라면 사실 들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본인이 직접 내보이지 않은 이상엔 말이다.
‘그런데 너무 간단히 써 버렸단 말이지…….’
전력을 감추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문제다.
드러난 것보다 숨겨진 것을 주의하라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와 같으니까.
만약 그걸 지키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유는 크게 두 가지.
그것조차 생각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다든가, 그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을 만큼 자신감이 있는 거다.
‘그자는 분명 후자겠지.’
그렇게 생각한 까닭은 간단하다.
그런 미련한 인간이 전 대륙에 이름을 떨칠 수도 없을 뿐더러, 키탄께서 병신을 성녀의 동행자로 택했을 리도 없었으니까.
‘나이 스물에 3급 검사인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거기다 정령술에 대륙급 상단의 주인이라니…….’
이건 예상을 훨씬 초월한 상대다.
추기경이 잠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눈치를 보던 청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그자에게 왜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시는 것인지…….”
“그자는 이번 신성한 임무에서 성녀의 호위를 맡았던 인물이다.”
“……네?”
너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온 대답에 청년은 잠시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곧 그 말뜻을 이해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저에겐 그냥 견습 기사일 뿐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요즘 가장 유명한 ‘망국의 초신성’이라니요!”
“말해 줬으면 가지도 않았을 거 아니냐.”
“아버지! 그러다 제가 진짜 죽기라도 하면……!”
“그만.”
추기경이 차가운 눈으로 청년을 응시했다.
“어차피 네가 원래부터 하고 다니던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 명예가 계속해서 실추되는 와중에도 너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 그게 대체 왜인 줄 아느냐?”
그 말에 청년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건 그도 항상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혈연의 정 때문은 아닐 거다.
그런 것과는 연이 없는 인물인 데다, 만약 그랬다면 좋게 타이르는 것이 먼저다.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을 궁금해해 왔던 답안은, 추기경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나왔다.
“바로 이때를 위해서다. 살바토르 루테리아.”
“……이때를 위해서라뇨?”
“추기경의 망나니 자식. 얼핏 들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 상대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 이만한 위치가 또 없지. 건드리기는 껄끄러우면서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눈에는 더 거슬리니까.”
추기경은 이제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자식은 하나 더 있으니 너는 그 정도 포지션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힘들여 정신을 차리게 한다 해도, 네가 무슨 재능을 보인 것도 아니지 않느냐. 끽해야 정식 신관쯤 겨우 되겠지.”
“……아무리 그래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너 같은 반푼이가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나가 보아라. 그나마 있는 쓰임새도 다하기 전에.”
살바토르는 한참을 이를 악물고 떨다가 이내 방을 나가 버렸다.
추기경은 그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고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했다.
‘지금 키탄교에 성녀 같은 건 필요 없다.’
이미 없이 생활한 지 수백 년.
그런 상황에 나타난 성녀라는 존재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에 가깝다.
‘키탄께서 갑자기 마음이 변하신 이유는 모르겠지만…….’
원래 가치가 없는 것은 잘라 내야 하는 법.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 * *
릴리아와 쇼핑을 마치고 돌아온 뒤. 일단 아리나에게 있었던 자초지종을 대충 설명했다.
“추기경님 아들이랑 마찰이 있었다고요? 대체 어쩌다가요?”
“말했잖아. 그쪽이 망나니처럼 굴었다고.”
“보통은 그런 이유로 고위 공직자 자식을 폭행하지는 않거든요.”
“때린 적 없어. 물만 조금 끼얹었을 뿐이지.”
“그거나 저거나.”
아리나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조금 기다려 봐요. 제가 한번 얘기나 해 보고 올게요.”
“추기경이랑 만난 적 있는 거야?”
“리안 님 나가셨을 때 잠깐요. 괜찮아요. 인상 좋으셨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야.”
인상이 좋다고?
나는 조금 기가 막혀 버렸다.
오기 전 수소문한 바로는 절대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없었으니까. 오히려 신관치고 서늘하다는 평가가 대다수였다.
뭐 레이튼 기준으로 하면 또 모르긴 하겠네. 그쪽은 진짜로 사람 몇 담갔을 면상이 길마다 돌아다녔으니까. 실제로 담그기도 했을 거다.
“괜히 무리할 필요 없어. 내가 직접 만나서 사과드릴 테니까.”
“……리안 님이요?”
아리나가 수상하단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대체 뭐가 목적이에요?”
“사과하는데 무슨 목적?”
“리안 님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과하실 사람은 절대 아니잖아요.”
얘는 날 너무 아는 게 문제라니까.
어쨌든 태연한 얼굴로 만남만 주선해 달라고 얘기하려는 순간이었다.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아, 성녀님! 다름이 아니라, 일행분이 방에 없어서 혹시 어디 계신지 아시나 여쭤보려고 왔습니다만…….”
아리나가 괴상한 얼굴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물었다.
“여기 있기는 한데, 무슨 일인데요?”
“그것 참 다행이군요.”
큼큼, 건너편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말을 이었다.
“추기경님께서 그분을 부르십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직접 사죄를 드리고 싶으시다고…….”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