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61)
내 말을 들은 아리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혼 빠진 얼굴로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걸 굳이 붙잡지 않고 마저 짐 정리를 계속했다.
너무 직설적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결국 언젠가는 본인이 직접 감당해야 할 일이니까.
뭐, 말 몇 마디로 교황을 바꿀 수 있다는 건 너무 과장이 들어간 것 같기는 했나.
그보다 쟤는 안 그럴 거 같으면서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평상시 성격 보면 ‘그럼 성녀 봉급도 엄청나겠네요?’라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스케일 듣자마자 바로 꼬랑지를 내린다.
게임에서는 저것보다 비교적 뻔뻔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승님!”
릴리아가 거침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여기는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없는 건가 했는데, 슬쩍 돌아보니 방문이 열려 있다. 아리나의 짓인 게 분명했다.
문 닫고 나갈 정신도 없었던 거구나…….
나는 그만 체념하고 풀던 짐들을 모조리 침대에 쏟아 버렸다. 어차피 정리할 틈도 없을 거 같아서.
“아, 아직 짐 풀고 계셨어요?”
“그래.”
“죄송해요. 저는 그냥 문이 열려 있길래…….”
얘도 첫인상과 달리 생각보다 예의가 바른 편이다. 물론 나한테 원하는 게 있어서 그렇겠지만. 사실 그래선 안 될 나이기도 하고.
어쨌든 이미 짐작하고 있던 문제라 그냥 별말 없이 넘어갔다.
“그건 됐어. 그보다 너는 벌써 짐 다 푼 거야?”
“아, 그게…….”
그리 어려울 거 없는 질문이었는데,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린다.
그제야 잠시 잊고 있던 사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얘, 밀항자였지?
제 몸 하나 챙기기도 바쁠 시점에 뭐 다른 걸 가지고 올 여유가 있었을 리 없다.
거의 눈까지 가리고 있는 저 모자조차 내가 준 거다. 엘프 귀는 내놓고 다니기에 너무 눈에 띄니까.
아무튼, 옷이든 뭐든 새로 사야 한다는 건데…….
그쯤에서 한 번 늘어진 짐들을 보며 한숨 내쉬었다.
원래는 아리나한테 맡기면 되겠지만, 그쪽도 지금 제정신인 상황은 아니니.
처음부터 안 받았으면 모를까, 일단 받은 이상 어느 정도 책임은 져야겠지. 이런 걸로 엘프들한테 빚 지울 수 있다면 나쁠 거 없기도 하고.
결국 그런 심정으로 릴리아와 함께 신전을 나섰다. 그리고 그렇게 3시간이 흐른 뒤.
“후우…….”
나는 기진맥진한 채로 식당 테이블에 엎드려 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까다로워서…….”
사과하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릴리아가 힐끗힐끗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얘 잘못은 없었다. 본인 말처럼 별로 깐깐하지도 않았고.
문제는 녀석이 엘프란 것과 이곳이 바로 뤼빈하이켄이라는 점이지.
엘프들은 종족 특성상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밖에 못 입는데, 이 도시에는 직물로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키탄이 딱히 살생을 금해서는 아니고, 본인들이 알아서 검소하게 살기 때문일 거다.
정확히는 검소하게 살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하나. 왕국에서 독립한 게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란 거다.
나는 종업원이 들고 나온 빵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됐어. 별로 종족적 특성 가지고 뭐라 할 생각은 없으니까. 인간으로 치면…….”
뭐지?
잠시 입을 멈췄다. 일단 얘기를 꺼낸 건 좋은데, 적당한 예시가 생각 안 나서.
벌거벗고 다니는 거랑은 완전히 다를 테고, 그렇다고 인피에 빗대자니 그건 또 너무 갔고.
결국 슬쩍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렇다는 거야. 그런데 너도 그만큼 이해해야 할 게 있다는 건 알지?”
“……제가 이해해야 할 거요?”
“이런 거.”
먹고 있던 빵을 슬쩍 들어 올렸다.
내가 상대라 그런지 아까부터 조용히 있었지만, 가끔씩 닿는 시선이 딱 혐오 식품 보는 그런 눈이라 느낌이 좀 그랬다.
괜히 체할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엘프를 제외한 대부분 종족들은 이렇게 식물을 먹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 굳이 너한테까지 그걸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존중은 필요하다는 소리야. 내가 너희 마을에서 계속 고기만 먹은 것처럼.”
사실 이 문제 때문에라도 어차피 한 번쯤 나와야지 생각은 했다.
나는 내가 나름 육식파라 여겼는데, 그것도 한 열흘쯤 되니 죽을 맛이더라. 역시 한국인은 탄수화물을 먹어야 한다는 거지.
어쨌든 앞으로 최소 일주일간 고기는 입에도 안 댈 거다.
릴리아는 그제야 본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눈치챈 듯했다.
녀석은 곧바로 저러다 꺾이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개를 확 숙였다. 아까보다 훨씬 박력 넘치는 사과였다.
“죄, 죄송합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아직 적응이 좀 안 돼서…….”
“됐어. 나도 그 정돈 이해하니까. 그냥 다른 사람들이랑 있을 때는 좀 주의하라는 거지.”
“……네. 명심하도록 할게요.”
기본적인 주의사항은 이 정도면 된 거 같고…….
나는 다시 오랜만에 기분 좋은 식사를 시작했다. 녀석도 조금 깨작거리긴 해도 곧이어 나온 고기를 군말 없이 입에 넣었다.
그렇게 절반쯤 해치웠을 때쯤.
끼이이익.
누군가 식당 안으로 들어온다. 신관 복장을 한 세 명의 남자였다.
이 도시에서는 상당히 비싼 편에 속하는 식당이라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그들은 이쪽을 꽤 오랜 시간 동안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흥미를 잃고 자리에 가서 앉는다. 그리고 건들건들한 모습으로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여기! 주문 안 받나?”
“아, 예!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쯧, 종업원 주제에 굼뜨기는.”
……별 또라이 같은 새끼들을 다 보겠네. 신관 복장 입고 저 지랄이라니.
정식 신관일 리는 없다. 그쪽은 나름 규칙이 엄중하니까.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겉으로는 티를 내기 어렵다는 소리다.
아마 귀족의 사생아나 부잣집에서 내버린 망나니들인가 본데…….
그런 경우는 생각보다 흔했다. 막대한 기부금이 동반되는 고급 고아원 같은 거라 해야 하나.
대부분 부모님이 살아 있긴 하지만,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는 점에서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거다.
뭐 어느 쪽이든 굳이 나설 생각은 없었다. 녀석들이 서빙 하는 종업원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기 전까진 말이다.
“앗……!”
쨍그랑!
녀석들이 음식을 뒤집어쓴 종업원을 보고 푸하하하 비웃었다.
“저놈 좀 봐. 접시 하나 제대로 못 나르는 반푼이라니! 저 정도면 그냥 집에서 나와선 안 되지 않나?”
“거, 사람 참. 마음 넓은 우리가 이해해 주세. 저런 이들이라도 일은 해야 밥을 먹고 살 것 아닌가.”
“어이, 네놈. 내 바지에 묻은 이거 어떡할 거냐! 엉?!”
하, 시X 유교 마렵네.
웬만하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 했는데, 저놈들 꼬라지가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못 그러겠다.
간신히 예절 가르쳐 둔 릴리아도 저 광경을 보며 고개 끄덕이고 있기도 하고.
아마 저게 인간의 규칙이구나 익히고 있는 거 아닐까. 엘프는 계급 사회가 아니다 보니 오해할 만도 했다.
안 그래도 선머슴 같은 애한테 망나니 속성까지 추가된다니.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미래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웃음바다인 녀석들에게 다가가 그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울먹이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종업원을 천천히 일으킨 뒤 말했다.
“릴리아.”
“네, 네?”
“첫 번째 수업이다. 제대로 들어 둬.”
뽀르륵.
녀석들 위에 커다란 물방울들이 떠올랐다.
“정령술은 의지의 술법이다. 마음먹는 것에 따라서 똑같은 기술도 완전히 다르게 써먹을 수 있다는 소리지.”
그제야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챘는지 망나니들이 위를 바라봤다. 나는 그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리고.
“원하는 바에 따라선 가 목표로 한 대상만 공격할 수도 있다는, 그런 뜻이다.”
쏴아아아!
떠올랐던 물방울들이, 녀석들을 덮쳤다.
* * *
뚝. 뚝.
신기한 광경이었다. 몸에선 확실하게 물이 떨어지고 있는데, 정작 그것이 바닥엔 묻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뿐만 아니다. 의자와 책상 어느 곳에도 물기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나도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론으론 알고 있었어도 직접 써먹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네놈…….”
내심 뿌듯해하고 있는데, 녀석들 중 하나가 정신을 차렸는지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이러는 거냐?”
너무 진부하지 않나?
숱하게 들어 본 소리라 대답하기도 귀찮다.
나는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종업원의 옷에 묻은 잔여물들을 씻어 낸 뒤,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이봐!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냐!”
“아, 나한테 하는 말이었나?”
“그럼 여기 네놈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이냐!”
“음……. 미안하네, 하도 사리 분별 못 하고 날뛰길래 혹시 눈이 안 달려 있나 했지.”
“이 새끼가…….”
망나니 하나가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사과해라.”
“뭘?”
“우리에게 물을 끼얹은 것 말이다!”
생각보다는 온건하게 나온다. 바로 주먹부터 휘두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내가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여겨서 그런가?
하여간 이런 놈들이 꼭 조금만 불안하다 싶으면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상한 소리를 하네. 누가 너희한테 물을 끼얹었다는 거야?”
“당연히 네놈 아니냐! 분명 마법을…….”
“마법? 내가 주문 같은 걸 외웠던가?”
아무리 메모라이즈 마법을 적용해 놨다 하더라도 최소한 기술명 정도는 외쳐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거 없이 일행을 상대로 잡담했을 뿐이고.
녀석도 그걸 깨달았는지 잠시 흠칫했다.
“거짓말하지 마라! 마법이 아니면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냐!”
“그거야 나도 모르지. 별로 관심도 없고. 너희가 젖었지, 내가 젖은 건 아니잖아? 아무튼, 그럼 난 이만.”
“정령술!”
태연하게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앉아 있던 한 놈이 일어나 소리쳤다.
“분명 내가 들었네! 정령술은 의지의 기술이니 뭐니 했었어!”
“……정령술?”
먼저 일어나 있던 망나니의 눈빛이 변한다.
경계에서 멸시로.
“마법사가 아니었던 건가?”
“뭐, 그쪽이랑은 전혀 연관이 없기는 하지.”
“……하, 어이가 없군.”
녀석은 퉤, 하고 침을 뱉더니 말을 이었다.
“설마 존재 가치라곤 희귀하다는 것뿐인 정령사였다니. 끽해야 하급밖에 못 다룰 녀석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글쎄다. 망나니 몇 괴롭히는데 자신감까지 필요할 이유가 있나?”
그 말이 무슨 역린 같은 거였는지 상대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앉아 있던 마지막 망나니가 그걸 보더니 곧바로 일어나 외쳤다.
“망나니라니! 너 이 자식, 감히 이분이 누군 줄 알고!”
“그만.”
표정이 굳어 있던 녀석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다. 어차피 놈도 곧 알게 될 테니까.”
그러더니 비열하게 웃으며 가게를 뜬다. 마지막에 한마디 남기는 건 잊지 않은 채.
“매우 지옥 같은 방식으로 말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