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60)
벨리아 대륙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중립 도시는 레이튼 한 곳뿐이다. 세 왕국이 만장일치로 합의한 유일한 장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가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는데, 바로 몇몇 신전들 때문이다.
수백 수천 개의 종교 중 유독 커다랗게 성장한 일부가 무려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해 버린 것이다. 그들이 밟고 사는 땅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만들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왕국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을 거다. 영토에 본인들 지배가 닿지 않는 선례를 남기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왕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들조차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린 신앙들이 있었다.
인간들의 신이자 대륙의 주신인 키탄.
달과 태양, 그리고 하늘을 관장하는 닉스.
대륙의 땅을 손수 빚었다는 어머니 가이아.
모든 동식물들을 창조해 낸 생명의 주인 하톤.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이종족들의 신 이주자 데피티.
왕국은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이들 다섯은 끝끝내 본인들만의 도시를 가지는 데 성공했다. 가장 중요한 세금을 걷지 않고 있다는 시점에서 이미 얘기는 끝났다고 봐야 할 거다.
어쨌든 여기 뤼빈하이켄은 그중에서도 주신 키탄의 지배하에 있는 땅이라 할 수 있다.
그 덕분이라 해야 하나. 성 입구를 지키는 자도 일반 경비가 아니라 무려 성기사다. 그것도 4급에 이르는 숙련 기사 수준.
“정지.”
다른 도시라면 경비대장 정돈 맡고 있을 사람이 입구에 떡하고 서 있으니 조금 신기하다.
내심 그런 감상을 품으며 순순히 멈춰 섰다.
성기사는 우리 일행을 미심쩍게 훑어보더니 물었다.
“이 도시에는 무슨 볼일이지?”
“지금 막 신성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신전에 보고를 드리려 합니다.”
“신성한 임무?”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눈초리가 더 강해진다.
“내가 알기로 지금 신성한 임무를 맡고 있는 건 성녀님 일행밖에 없다. 그리고 그분들은 아직 돌아오기까지 한참 먼 시점이지.”
성기사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롭게 정련된 것이 관리 좀 한 모양새였다.
그는 그 시퍼런 날붙이를 우리에게 겨누더니,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런데 감히 성녀님 일행을 사칭하다니……. 네놈들이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곱게 투항하는 편이 본인들 안전에도 좋을 거다.”
그 말에 살짝 한숨이 나왔다.
대충 예상하긴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나.
다행인 점은 딱히 설명을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는 거다.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리나, 그것 좀 꺼내서 보여 줘 봐.”
“그거요?”
“그 왜 후보 인장 있잖아. 설마 못 받았어?”
“아, 맞다. 깜빡하고 있었네.”
깜빡할 게 따로 있지 무슨 성녀 후보로 인정해 주는 패를 잊어 먹고 있냐? 아무리 봐도 키탄이 생각을 잘못한 거 같은데.
하지만 나는 그렇게 쏘아붙이는 대신 조용히 침묵했다.
본인이 모시는 신의 성녀가 그런 취급을 받고 있으면 기분 좋아할 성기사는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아리나가 품속을 뒤지고 있는데, 그걸 본 성기사가 인상을 찌푸린 채 우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대체 뭘 하는…….”
“아, 찾았다.”
성기사의 낮게 깔린 목소리를 끊으며 아리나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품위라곤 전혀 없는 모습으로 그걸 툭 건넨다.
“여기, 제가 성녀 후보라는 걸 증명하는 인장이에요.”
키탄의 신도라면 절대 못 알아볼 수 없는 인간이 그려진 황금빛 문양.
교단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보물일 거다. 지금에나 후보를 증명하는 인장이지, 임무의 성공을 보고한 순간부터 성녀를 증명하는 인장이 되니까.
설마 그런 걸 저런 태도로 건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상대 역시 대수롭지 않게 그를 넘겨받았다. 가짜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건……!”
쨍그랑.
확인 작업을 마친 성기사가 입을 떡 벌리며 검을 놓쳐 버렸다. 날카롭게 정련됐던 칼날에 흠집이 박힌다.
아리나는 그를 살짝 걱정스런 눈초리로 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저흰 이제 그만 들어가 봐도 괜찮을까요?”
* * *
“정말 죄송합니다. 하늘을 나는 배에 대해선 보고받았으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빠를 거라곤 도저히 예상을 못 해서…….”
조금 비굴하게까지 보일 정도로 허리를 숙이고 있는 건 무려 주교였다.
부담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당사자인 아리나에겐 훨씬 더했나 보다. 녀석은 당황한 게 확 티 나는 모습으로 마주 고개 숙였다.
“아, 아뇨. 저희야말로 너무 빨리 와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게 딱히 죄송할 일은 아닌데.
제 딴엔 진심으로 사과한 것이겠지만, 다른 사람 귀에는 질책으로 들렸을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늙은 주교의 허리가 오히려 전보다 더 굽혀졌다.
“다시 한 번 사죄드리겠습니다. 혹시 처벌을 원하신다면 제가 직접 책임지겠습니다.”
“처, 처벌이요?”
“예.”
그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일단 바로 주교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
상상도 못 한 대답에 놀랐는지 아리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주교라면 보통 한 도시 전체를 책임지는 고위 성직자. 그런 걸 사소한 실수 하나로 포기한다고 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나로선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다. 나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녀석을 대신해 말을 꺼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저희가 대륙의 상식으론 도저히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도착한 것은 맞으니까요.”
“그대는……?”
그제야 주교가 굽혔던 허리를 펴며 나를 살펴봤다.
나는 그들의 방식으로 성호를 그리며 인사했다.
“이번 성녀님의 임무에 함께 동행했던 리안이라고 합니다.”
“아, 그대가 그…….”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쁜 이미지는 아닌가 보다. 왜냐면 내 정체를 밝히자마자 얼굴이 한결 밝아졌으니까.
그는 뭔가 혼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이어서 답했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키탄 님이 성녀님의 동행으로 신도도 아닌 자를 선택했을 땐 조금 의아했지만…… 직접 보니 그럴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과찬이십니다.”
“과찬은요. 이번 임무에서도 핵심적인 일은 전부 직접 해치우신 걸로 압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뭐라도 보상하고 싶은데, 이제 주교도 아닌 몸이라 그럴 수가 없어 한이군요.”
제발 그러지 마라. 저기 너네 성녀 얼굴 새파랗게 질린 거 안 보이냐?
“정말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건 성녀님 본인도 원하는 바가 아니실 테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 네? 아…….”
아리나가 겨우 정신 차린 얼굴로 돌아와 힘차게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죠. 애초에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 걸 가지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뇨.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교가 굳은 표정으로 아리나의 말을 끊더니 녀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성녀님에 관한 그 무엇도 하찮은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소한 식사부터 포함해서 물 마시는 것까지 전부요. 만약 그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 한다면, 그건 저희 신전 자체를 모욕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 말에 아리나는 가까스로 되찾은 혼을 다시 잃어버린 안색으로 띄엄띄엄 말했다.
“어……. 제, 제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닌데…….”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전부 성녀님의 끝 모를 배려심 때문이겠지요. 하나, 본인이 그만큼 중요한 존재라는 걸 자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주교는 마지못해 대답하는 아리나를 보고 자애롭게 웃더니,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저의 불찰을 용서해 주신 것은 감사를 드려야 하겠군요. 자, 따라오시죠. 제가 바로 본청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녀석을 앞세워 바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 뒤를 따랐다.
그때, 옆에서 커다란 모자를 쓴 릴리아가 살짝 혀를 차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여간 인간 놈들. 광신 하나는 알아 줘야 한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엘프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 * *
“저, 거북해서 죽을 거 같아요.”
“난 너 때문에 거북해서 죽을 거 같다.”
아직 안내받은 방에 짐을 채 풀지도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노크도 없이 들어와 한탄이라니.
그냥 내쫓아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꾹 참았다. 쟤 마음도 일단 이해는 갔으니까.
나는 녀석을 의자에 앉히고 물었다.
“여기 오면 이런 대우를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해 봤어? 성녀 직위가 어떤지는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대충 생각해 둔 건 있었는데요…….”
이 정도는 아니었단 거겠지.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예상이 갔다.
“레이튼에선 어땠는데? 일단 후보 직위는 거기서 받은 지 꽤 됐었잖아.”
“본청에서 나온 성기사님들이 과하게 깍듯하게 대해 주기는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전이랑 크게 달라진 거 없었어요. 그냥 조금 신기해하는 느낌?”
“그건 걔네들도 실감이 안 나서 그랬겠지.”
나 같아도 어릴 때부터 같이 놀던 친구가 갑자기 대기업 후계자라고 하면 도저히 못 믿을 거다. 그냥 정신이 나갔나 하고 말았겠지.
게다가 레이튼이 사실상 키탄교의 손길을 벗어난 지 오래됐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거긴 지금 신전이 아니라 고아원이나 다름없는데, 그 덕분에 교리에 대해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인원이 별로 없을 테니까.
다시 일어나 짐을 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빨리 익숙해져라. 이제 네가 좋아하는 고기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잖아.”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체할 거 같은데요…….”
“한번 해 봐. 아마 그 순간 바로 교단이 뒤집어져서 독살 시도인가 하고 요리사들부터 족치고 볼걸? 그 광경도 나름 볼만은 하겠네.”
내 말에 더 매스꺼워졌는지 아리나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걸 보고 피식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하자 그제야 녀석이 조금 안정된 기색을 취했다.
사실 진심으로 한 소리였지만.
오히려 내가 말했던 것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할 일은 없을 거다. 성녀의 안위란 건 그만큼 중요한 법이니까.
아리나는 책상에 턱을 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교단의 성녀들도 전부 이러는 걸까요? 대체 숨 막혀서 어떻게 살고 있는 거지?”
꼭 그렇지는 않다. 교단에 따라선 그냥 일반 평신도와 똑같이 취급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아무래도 얘도 레이튼 출신이라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거 같은데……. 일단 자각은 시켜 둘까.
그렇게 마음먹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통 어느 정도 대우를 받기는 하는데, 사실 너는 좀 과한 편이긴 하지. 다른 데는 성녀한테 실수 한 번 했다고 주교 자리를 놓니, 마니 그러진 않아.”
“그럼 왜 저한테만 그러는 건데요?”
“이유야 간단하지. 쟤네도 성녀는 처음 겪어 보는 거거든. 과민 반응하는 거야.”
“……처음 겪어 본다고요?”
“응. 너는 키탄교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한 성녀니까.”
나는 짐을 풀던 손을 잠시 멈추고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지금 네 말이면 교황도 바꿀 수 있을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