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59)
잠시 후 펠리나가 자리를 떠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리나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둘이 무슨 얘길 그렇게 한 거예요? 동생을 부탁한다는 건 또 뭐고요?”
“그 전 대화는 못 들었어?”
“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그런 와중에 마지막 내용은 잘도 들었네.
조금 기가 막혀 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해 줬다.
“나도 정확한 의미는 몰라. 원래 예언가들 하는 말이 죄다 그런 식이라서. 대충 짐작 가는 건 있지만…….”
“그게 뭔데요?”
“별로 중요한 건 아니야. 그보다 시작한다.”
단상 위를 가리키며 말하자,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마침 지루하던 연설이 끝났는지, 안드라스가 뭔가를 들고 세계수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내가 들고 왔던 흙뭉치. 다만, 그 상태 그대로는 또 아니다. 나는 조금 더 확실히 해 보기 위해 그를 탐색해 봤다.
“저건…….”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니, 문제랄 건 아닌데.”
그보다는 오히려 좋은 쪽이긴 하다. 흙 안에 포함돼 있던 혼원력이 원래보다 몇 배는 응축되어 있었으니까. 저런 상태라면 세계수 회복이 예상보다 훨씬 빨라질 거다.
굳이 문제라고 한다면……. 저걸 대체 어떻게 한 건지 감도 안 온다는 거지.
이 세계에서 내가 모르는 일은 매우 드물다는 걸 생각해 볼 때, 확실히 예사로운 방법은 아니다.
아무래도 일주일 동안 헛짓거리만 한 건 아닌가 보네.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 했는지 한번 물어봐야지.
“…….”
나중 일이야 어쨌든, 안드라스는 다른 장로들과 다르게 아무 말 없이 곧바로 흙을 땅에 섞어 묻어 버렸다.
일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분위기였고, 대다수는 뭐 저런 놈이 다 있냐는 듯 황당한 시선이었다.
엘프들 기준으로도 정상적인 전개는 아니었나 보다.
보통은 시작 전에 자기 공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몇십 분씩 과시하는 게 대부분이니까.
아무튼, 덕분에 조마조마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확 풀어져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꽤 중요한 행사인데 이 정도로 긴장감이 없어도 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와아.”
옆에서 아리나의 몽롱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고개 돌릴 틈은 없었다. 나도 멍하니 세계수를 쳐다보기 바빴으니까.
“…….”
자그마한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안드라스가 흙을 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세계수는 곧장 엄청난 양의 빛무리들을 털어 내기 시작했다.
개미굴 가기 전에 봤던 것과 비슷하지만, 그 규모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마치 이대로 빛이 세상을 다 덮어 버리지 않을까 싶은 모습.
정말로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같은 황당한 고민까지 품으며, 나는 그렇게 한참을 넋 놓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아리나다.
그제야 살짝 정신을 차렸다. 주변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둘러보자, 엘프들은 방금 전 나보다 훨씬 심한 모습으로 격렬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우는 건 기본에 너무 벅찬 감동으로 진이 다 빠져 버린 듯 쓰러져 있는 자들도 무더기다.
순간 조금 소름이 돋았다.
분명 아름다운 광경이긴 했지만, 저 정도의 반응이라니.
게다가 엘프가 아닌 나조차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더 충격이었다.
세계수에 정신 조작 능력이 있다는 설정은 없었는데, 있나?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 냈다.
그냥 좋은 장면 봤다는 거에 만족하자.
어차피 곧 떠날 마을인 데다, 만약 정말 그렇다 해도 딱히 해가 될 건 없으니까. 엘프들이 세계수탕스 짓 한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을 때,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아리나는 대체 어떻게 나보다 더 빨리 정신을 차린 거지?
분명 어떤 점을 고려해 봐도 내가 먼저 일어나는 게 정상이다.
본신의 경지든 정신적 성숙도든, 어디를 보더라도 내가 더 우위니까. 거기다 세계수에 대한 감정은 말할 것도 없고.
쟤가 나보다 더 빨리 깬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차오르는 궁금증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리나가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걸 마주 보며 물었다.
“너는 저거 보고 뭐 느껴지는 거 없어?”
“없긴요. 제가 뭐 감성이 메말라 버리기라도 한 거 같아요?”
솔직히 그런 거 아닌가 조금 의심 중이다.
나는 일단 그 혐의는 접어 두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그치만 이 중에서 네가 제일 멀쩡하잖아.”
“제가 엘프가 아니라 그런가 보죠.”
“그렇다기엔 나도 정신 놓아 버렸는데.”
“음…….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러네요.”
아리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바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글쎄요. 저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내 뭔가 떠올린 듯, 아리나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마 저것보다 더 보고 싶은 풍경이 있었나 봐요.”
* * *
마중은 생각보다 훨씬 화려했다.
엘프들은 그때 그 광경을 다시 재현하겠다는 것처럼 긁어모은 빛 가루들을 뿌려댔고, 몇몇은 다시 그걸 보고 혼절했다.
세계수의 구원자니 뭐니 환호를 하기는 하는데, 저게 송별회 모임인지 사이비 이교도 모임인지 조금 헷갈린다.
찝찝한 기분과는 별개로 나는 스바 위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줬다. 일단 화답해 주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그것도 금방 그만두었다.
그럴 때마다 오열을 하는데, 무슨 광기라도 들린 것 같다.
쟤네 진짜 얼마 전까지 우릴 죽일 듯이 노려보던 녀석들 맞나?
옆에서 같이 지켜보고 있던 아리나도 질린 듯이 중얼거렸다.
“1 장로님이 하셨던 말이 저런 걸 두고 했던 건가 봐요. 엘프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세계수만 관련되면 이성을 잃는다는 거.”
좋은 쪽이 있다는 말은 안 했던 거 같은데.
어쨌든 이성을 잃는다는 건 충분히 동의하는 바다. 저걸 제정신인 상태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쪽이 더 끔찍하니까.
나는 재빨리 스바를 띄우며 말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다시 만날 일 없으니 다행이지. 신전이랑은 얘기 끝났어?”
“네. 연합 수도에 있는 엘프 원로들이 인간들에 호의적인 입장을 고수했대요. 심지어 극강경파인 사람들까지도요.”
어쩌면 좋은 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엘프의 극강경파라 하면 인간이 배신 때리기 전에 선수 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놈들인데, 그런 녀석들까지 한순간에 마음을 돌려 버리다니.
진짜 세계수에 정신 조작 능력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
아무튼, 연합의 주축인 엘프가 그렇게 나왔다는 건 정말 다행인 일이다.
수인이나 뱀파이어들은 원래도 인간에 대해 온건한 편이었으니, 사실상 앞으로 겔리안과의 동맹은 흔들릴 일이 없다고 봐도 되겠지.
이 정도면 오히려 목표 초과 달성이다. 거기에 생각지도 못했던 보상까지 챙겼고.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갑판 한편에 놓인 오크통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굴렸다.
“아악!”
동시에 안에서 가냘프다고 하기는 힘든 우렁찬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옆에서 내가 뭘 하나 지켜보고 있던 아리나가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요즘 여기저기 벌이는 사업이 많다더니, 설마 인신매매에까지 손을 뻗치신 거예요?”
“너부터 팔아 줄까?”
웃지 못할 농담에 한숨을 내쉬며 녀석에게 딱밤을 날렸다.
“넌 배 탔을 때 뭐 이상한 거 못 느꼈냐?”
“이상한 거요?”
“내 배에는 원래 오크통 같은 거 없어.”
그제야 깨달은 듯, 아리나가 손바닥을 탁 쳤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그럼 대체 저건 언제 올라탄 거죠?”
“오크통은 내가 배 꺼내 놓고 장로들이랑 인사하고 있을 때, 그리고 안에 든 녀석은 배 띄우기 직전 엘프들이 고개 숙이고 있을 때.”
“리안 님은 그거 전부 아시면서 왜 가만히 내버려 두신 건데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오크통을 툭툭 건드렸다.
“야. 이 정도로 얘기했으면 그만 좀 알아서 나와라.”
“……아, 하하.”
얼마 지나지 않아 통 안에서 어색한 표정의 엘프 하나가 기어 나왔다. 마을에 머무는 내내 계속 찾아와 정령술을 가르쳐 달라 조르던 릴리아다.
그녀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나를 보며 밝게 웃었다.
“역시 스승님! 눈치가 빠르다니까.”
“대체 누가 네 스승이냐?”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응수했지만, 릴리아는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야 당연히 스승님이죠. 달리 또 누가 있겠어요?”
내 이름은 스승이 아닌데.
나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펠리나가 동생을 부탁한다고 했을 때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만, 설마 진짜로 얘가 그 동생이었을 줄이야.
슬쩍 환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러기 힘든 이유가 있다.
바로 예언가가 내뱉은 간접적인 예지였기 때문이다.
바꾸자 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 상당히 귀찮아졌겠지. 예를 들어 몰래 마을을 가출해 레이튼까지 찾아온다든가.
그렇게 위치라도 잘 잡으면 약과다.
십중팔구는 레이튼이 아니라 어딘지도 모를 도시에 도착했을 거다. 50년 넘게 살았다 해도 마을에만 박혀 살던 엘프에게 바깥 생활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못 되니까.
그러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겨우 메꿔 놨던 인간과 연합의 사이가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결국 그냥 조금의 귀찮음을 감수하는 게 낫겠단 판단이었는데, 이게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릴리아를 뚱하니 쳐다보는데, 옆에서 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그때 그 여자 장로님이 부탁한다던 동생이…….”
“맞아. 얘가 그 동생인 거지.”
“부탁한다는 게 육아 쪽이었구나…….”
외형만 보면 그렇긴 한데, 나이를 생각해 보면 그보다는 케어 쪽 아닌가?
슬슬 퇴직을 생각해 봐야 할 연세일 텐데.
아무튼, 아리나는 어쩐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릴리아와 인사를 나눴다.
나는 그 장면을 조금 심란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이내 포기해 버렸다.
그냥 가끔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가르쳐 주면 되겠지. 어차피 카일한테도 알려 줄 게 있으니까.
둘이 겉보기 연령은 비슷한 만큼 의외로 잘 어울려 지낼지도 모른다. 서로 나잇값 못 한다는 공통점도 있고.
물론 한쪽은 나이에 비해 과하게 늙은이 같고, 다른 한쪽은 나이에 비해 과하게 애 같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뒤에는 종족적 차이라 뭐 어쩔 수 없나.
그렇게 대충 정리를 끝내고 있자니, 어느새 스바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려 왔다.
곧장 난간에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새하얀 건물들과 중앙 광장에 우뚝 서 있는 남자의 동상.
거리를 다니는 사람마다 성경 하나씩 챙겨 들고 있는 이곳은, 바로 키탄의 신전 본청이 있는 중립도시. 뤼빈하이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