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58)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그건 내가 집에 틀어박힌 시간이기도 했다.
두일란은 밖을 돌아다녀도 별로 상관없다고 했지만, 정작 나간다 해도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관광 왔다 생각하려 해도 뭐 볼 게 있어야지.
엘프들은 자급자족이 기본 생활 방식인 덕분에 무언가를 파는 상점도 없었고, 음식을 파는 식당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래도 손님이라고 음식은 따로 챙겨 줬다는 거다. 하마터면 대뜸 활 잡고 사냥이라도 나설 뻔했네.
나는 대충 근처에 있던 나무에서 따온 잎사귀로 만든 차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만약 지루한 천국이란 것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하고.
“저는 뭐 나름 평온하고 좋은데요?”
앞에서 같이 차를 홀짝이고 있던 아리나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물질주의의 선두주자를 달리던 녀석이 물물교환하는 원시시대에 와 저런 얘길 꺼내다니.
순간 무슨 헛소리인가 했지만, 생각해 보니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돈 버는 목표가 고기 사 먹기 위해서라고 하기도 했었으니까. 삼시세끼 육식만 하는 여기가 조금 지루하더라도 맞을 수도 있지.
얼마 전까지 길 가다 칼 맞는 게 일상이던 레이튼에서 살았으니 이곳의 무료한 분위기가 평화롭게 다가왔을 수도 있고.
아리나는 하품하며 턱을 괴더니 이어 말했다.
“리안 님도 이왕 머무는 거 그냥 좀 편안하게 즐기는 거 어때요?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원래 고생은 사서도 하는 거야.”
“거봐요. 너무 힘들게 살아오니까 그런 꼰대 같은 소리가 나오는 거잖아.”
“…….”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지구에서 비슷한 내용을 써 놨던 책들이 생각나서.
잠시 침묵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집안이 편안하지 않은데 어떻게 편히 머물 수가 있겠냐.”
“아…….”
아리나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쓰게 웃는다.
“요즘도 계속해서 찾아오나 봐요? 그 엘프. 이름이…… 릴리아라고 했던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얘만 속에 다른 종족 영혼이 들어갔나 봐. 이렇게 끈질긴 엘프는 또 처음 본다.”
“아는 엘프가 그리 많지도 않잖아요.”
“안면 있는 엘프가 별로 없는 거지 습성 정도는 완벽히 파악하고 있어. 걔 따라다니던 다른 애들은 진작 포기하고 놀러 다니잖아.”
“뭐, 그건 그렇긴 한데요…….”
아리나는 고개를 들고 중얼거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조금 가르쳐 주는 거 어때요? 정령술.”
“그게 뭐 말처럼 쉬운 줄 아냐.”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보다 훌륭한 선생님이 될 자신은 있다.
정령술을 독학으로 익힌 것도 맞고, 정령왕의 약속 덕분에 야매로 큰 것도 사실이지만, 내게는 게임 내 스킬에 대한 모든 정보가 있으니까.
검술처럼 이론만 알아선 사용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언젠가 여유가 나면 조금 익혀 둬야겠다 생각도 했었다.
문제는 지금 내가 누굴 가르칠 경황이 없다는 거지.
“어차피 우린 얼마 안 지나 돌아가야 할 처지잖아. 그런 나한테 얼핏 배우느니 그냥 여기서 느긋하게 익히는 게 더 나아. 애초에 엘프들만큼 정령술 뛰어난 종족이 없기도 하고.”
내 말에 아리나가 싱긋 미소 지었다.
“요컨대 책임감 때문이라는 거네요.”
“……그게 왜 그렇게 되냐?”
“그게 책임감이 아니면 뭐겠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냥 대충 뭐 가르쳐 주는 척하고 떨궈 버리면 그만인데.”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히죽거리는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보다 세계수 회복 실험은 잘 진행되고 있대?”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네가 허구한 날 안드라스 장로 집에 가서 경과 물어보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아리나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건 또 언제 보셨대요? 혹시 저 감시해요?”
“엘프들이 느긋하긴 해도 소문은 빨라. 릴리아가 왔을 때 가르쳐 주던데.”
“……생각해 보니 그분한테 그냥 정령술 가르쳐 주라 했던 거 잘못 얘기한 거 같아요. 혹시 여유 난다고 해도 절대 가르쳐 주지 마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리나를 바라봤다.
역시 몸속에 흐르고 있는 엘프의 피 때문인가.
처음 그 소식 들었을 땐 언제쯤 돌아가나 계산하기 위해선 줄 알았는데, 그냥 순수하게 세계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랬나 보다.
“혹시 여기 더 있고 싶으면 얘기해. 신전에는 네가 임무를 마저 수행하고 있다고 둘러댈 테니까.”
“……돌아갈 때는요?”
“내가 잠시 짬 내서 데리러 오지 뭐.”
아리나가 잠시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됐어요. 평온한 건 좋은데, 저 혼자 있다 보면 지루할 거 같아요.”
휴양을 즐기라 한 게 아니라 세계수 때문에 한 얘기인데……. 뭐 됐나. 아직 본인도 왜 세계수에 끌리는지 헷갈리는 모양이니까.
일단 그 문제는 제쳐놓고 다시 한 번 언제쯤 실험이 끝나는지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똑똑.
현관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가가 문을 여니 우리를 두 번이나 안내해 줬던 엘프 간수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장로회에서 마을 전체에 소집령을 내렸습니다.”
간수는 긴장으로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세계수를 회복시키려는 모양입니다.”
* * *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마을에 이렇게나 많은 엘프가 살고 있었나 싶다.
잠깐잠깐 나왔을 땐 서넛 보는 게 다였는데, 여기 모인 인원은 거의 천에 가까워 보인다.
아리나도 놀랐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이 사람들 대체 다 어디 있다 나왔대요? 가끔은 여기가 마을은 맞나 했었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사실 나도 조금 신기한 기분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조용해서 천 명 넘게 살고 있다는 것도 설정 오륜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을 줄이야. 이 세계 오고 나서 설정 그대로라 놀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무튼, 엘프들이 이렇게 모인 걸 보는 것도 나름 장관이다.
나는 대놓고 그들을 한 번씩 주욱 훑어봤다. 혹시 게임 내 등장하는 인물들도 있나 싶어서.
잠시 실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히려 이쪽으로는 천 쌍이 넘는 시선이 꽂혀 있어 금세 신경을 꺼 버렸다.
지들도 보는데 내가 못 볼 건 또 없으니까.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때,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멍한 인상의 하늘색 머리 여자가 서 있었다. 장로회의 홍일점인 6 장로다.
얘가 나한테 말 걸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나는 당황한 심정을 티 내지 않고 말했다.
“펠리나 장로님이시군요. 장로회의 사람은 단상 위에 있어야 하는 걸로 압니다만…….”
“권고사항일 뿐이에요. 혹시 제가 불편하신가요?”
네. 엄청나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여쭤봤을 뿐이죠.”
“그러면 그냥 편히 있을게요.”
그러더니 슬쩍 옆에 와서 서 버린다.
정직하게 말하는 게 정답이었나? 나는 네가 굉장히 불편해요, 하고.
“…….”
솔직히 별로 상대하고 싶은 인물은 아니었다.
인성 밥 말아먹은 흑막이라든가 사실 엄청나게 깐깐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든가 해서는 아니고, 그녀가 바로 대륙에 몇 안 되는 예언자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미래를 들을 수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 싶겠지만, 문제는 이 세계의 미래는 정해진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도 ‘예언’이라는 행위가 가능한 건 말하는 순간 그 예지가 거의 확정에 가깝게 바뀌어서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듣는 내 미래가 그리 희망찰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옆에 경계하는 기색으로 서 있는 아리나를 툭툭 쳤다. 은근슬쩍 거리를 벌리면 되겠다 싶어서.
그리고 그 계획은 머지않아 들켜 버리고 말았다.
펠리나가 내 쪽을 힐끗 보더니 담담히 입을 열었다.
“역시 제가 불편하신 거로군요.”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 불편한 동행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어째서인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예언자는 거북하기 때문입니다.”
내 말에 멍하던 인상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제가 예언자라는 걸 알고 계셨군요.”
“…….”
역시라니. 괜히 더 거북하게 만드네.
솔직히 대답하는 것도 어디까지인지 생각 좀 해 봐야겠다.
“혹시 그 뒤로 예지를 읊어 갈 예정이시면 그만두시지요. 저는 별로 듣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요.”
“이상하네요. 보통은 억만금을 주면서라도 저한테 예언을 듣고 싶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저는 그런 타입이 아닌가 보죠. 그 원하는 사람들한테 억만금 받고 가르쳐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재밌는 분이시네요.”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할 얘긴 아닌데.
나는 어느새 거리를 띄운 아리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무튼, 무엇을 보았던 간에 저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관심도 없고요.”
“관심도 없다라……. 그게 당신의 ‘게임’과 관련된 내용이라 해도요?”
순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한 얘기는 나를 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그쪽이 그렇게 불편해하지 않을 정도까지요. 저는 잠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거지, 그 본질까지 깨달을 수는 없어요.”
잠시 말없이 펠리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렇게 응시하는 내 눈길에도 멍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한참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역시 됐습니다. 예언은 필요 없어요.”
이번에는 정말 의외였는지 펠리나의 표정에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어째서죠? 혹시 좋은 쪽이 아닐 거 같아서 그런가요?”
“그것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이유요?”
“네.”
“그게 뭐죠?”
나는 살짝 속살이 파져 있는 세계수를 바라보며 답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제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면 납득하기 어렵거든요.”
“……본인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라.”
“네. 생고생해서 뭔가 이뤄 놨더니, 누가 옆에서 이미 정해져 있던 미래라 지껄이면 허무하지 않습니까.”
“…….”
펠리나는 안 그래도 멍한 얼굴에 입까지 살짝 벌린 채 나를 쳐다봤다.
저러면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표정이 생기니 오히려 더 생기가 도는 느낌이다.
그렇게 잠시 말없이 서 있던 그녀는, 곧이어 정신을 차린 듯 조용히 말했다.
“그런 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관점이라 조금 신박하군요. 덕분에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럼 그만 단상 위로 올라가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슬슬 세계수 회복시키려는 거 같은데.”
“잠시만요. 아직 할 얘기가 하나 남았어요. 원래 예정에는 없었던 말이지만…….”
그러면 그냥 하지 말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어쨌든 그녀 딴에는 호의로 다가온 거였을 테니까.
“무엇입니까?”
내 물음에, 펠리나는 살짝 웃음 지으며 말했다.
“당분간 저희 동생 좀 잘 부탁드릴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