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57)
부르기 무섭게 허공에서 작은 정령 하나가 눈을 비비며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자고 있던 모양이다.
하긴, 하루의 90프로는 저런 상태니 이상할 것도 없나. 자연체든 뭐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생명들은 다 저러는 법이지.
리베라에게 잠시 사과를 건넨 뒤, 작은 병을 눈앞에 꺼내 놓았다. 녀석이 그걸 보고 하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령왕의 약속이라는 거야. 뭔지 알겠어?”
―……?
혹시나 본능적으로 깨닫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건 없나 보다.
나는 리베라가 다시 잠들기 전에 재빨리 설명을 시작했다.
물건의 유래, 섭취 시 주의사항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얘기하다 보니 생각보다 말이 길어졌지만, 대충 요약하자면 먹었을 때 강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내가 알기로 딱히 부작용 생길 만한 건 없지만, 그래도 혹시 불안하다면 안 먹어도 상관없어.”
내 말을 전부 들은 리베라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살포시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어 왔다.
그게 마치 나를 신뢰한다는 증표라도 된 거 같아 살짝 감동했다.
얘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날 힐링시켜 주는 존재 아닐까.
“…….”
뭔가 딸 바보 아빠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인데.
나는 청승 떠는 걸 멈추고 그 손바닥 위에 ‘정령왕의 약속’을 올려놓았다.
“이미 한 번 얘기했지만, 뭐 먹는 데 딱히 특별한 방법은 없어. 그런데 씹으면 효과가 좀 떨어지니 그냥 목구멍으로 넘기면 돼.”
리베라는 다시 한 번 주의 주는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금색 광채를 꺼내 잠시 바라보다가, 한입에 삼켜 버렸다.
꿀꺽.
먹은 건 쟤인데, 정작 침을 삼킨 건 나였다.
분명 문제없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준 건데도 뭔가 조마조마한 기분이라 해야 하나.
나는 별사탕 먹는 아이처럼 입안을 우물거리고 있는 리베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효과 좀 있는 거 같아?”
―…….
리베라가 재촉하지 말라는 듯 새초롬하게 나를 흘겨본다.
나는 재차 사과하고 녀석이 정령왕의 약속을 완전히 삼킬 때까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조용히 지켜봤다.
그리고 꿀꺽, 드디어 내 것이 아닌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이번에야말로 조심스런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괜찮아?”
―……?
리베라는 뭐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짝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쾌재가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아무 반작용도 없이 흡수했다는 건, 그만큼 정령왕의 약속과 상성이 잘 맞았다는 증거와도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확인 방법은 하나뿐이다. 직접 능력을 써 보고 실험해 보는 것.
리베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밖으로 나섰다.
* * *
찾은 것은 넓은 공터였다.
마을 구석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비교적 나무가 적은 편이라 실험하기 딱 알맞아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숲인 만큼 불 속성 연습은 일단 미뤄 둬야 하겠지만.
그보다 걸리는 건 따로 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외곽이라 해도 일단 마을 내부인지라 지나다니는 엘프들이 몇 있었다.
그 대부분은 호기심으로 한 번 힐끗거리고 말아 별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계속해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쪽이다.
그중 나무 뒤에 익숙한 무리가 있는 걸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너넨 대체 왜 엘프답지 않게 그리 부지런히 나돌아다니는 거냐?”
곧바로 나뭇가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설마 들키지 않았다 생각하고 있는 건가.
나는 녀석들에게 다시 말했다.
“혹시 또 하늘을 날아 보고 싶니?”
그리고 잠시 차분하게 기다리자, 그제야 나무 뒤에서 작은 형체가 몇 개가 우물쭈물거리는 기색으로 나섰다. 얼마 전 그 꼬맹이들이다.
그중 대장 역할을 하던 여자아이가 대표로 내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엘프가 숲에서 숨은 걸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텐데…….”
“내가 그런 것도 눈치 못 채겠냐.”
굳이 코드까지 들먹일 것 없이 경지 차이가 너무 난다.
아무리 엘프가 숲에서 은신 속성을 부여받는다지만, 5급 갓 들어선 녀석들이 숨은 것까지 놓칠 정도면 그만 수련 접어야지. 쪽팔려서 얼굴 들고 다닐 수가 없을 거다.
“그보다 왜 내가 밖으로 나설 때마다 너희가 보이는지 설명 좀 해 봐라. 혹시 너네 나 따라다니냐?”
“따, 따라다니긴! 여긴 우리 마을이거든? 우리가 어디 있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과하게 반응하는 거 보니 따라다닌 거 맞는 것 같은데.
이유야…… 처음 보는 인간이 신기하다든가 그런 거겠지 뭐.
다시 세계수의 복수를 하려는 건 아닐 거다.
그쪽은 안드라스가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한 것 같으니까.
나는 귀찮은 얼굴을 하고 녀석들에게 손사래 쳤다.
“그래. 너희가 어디 있든 별로 신경 안 쓸 테니 그냥 여기 근처에 다가오지만 말아라. 지금부터 연습 좀 하려고 하는데, 자칫하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
꼬맹이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습? 무슨 연습을 여기서 하는데? 검술 훈련장은 따로 있어.”
“정령술 연습.”
담담하게 말하자, 곧바로 주변에서 풉, 하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정령술? 인간이? 너희 들었어? 진짜 내가 근 30년 동안 들은 말 중에 제일 웃긴다.”
“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웃지는 마. 그러다 정령술로 화산이라도 폭발시키면 어떡하려고. 큭큭.”
“…….”
어째서일까. 지구에서 꼬맹이 상대로 저런 비웃음을 들었으면 분명 열 받았을 텐데, 정작 지금은 아무 느낌이 없다.
쟤들 속 나이를 알고 있어서 그런가. 내심 노망났나 하는 생각이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녀석들을 그냥 무시해 버린 채 문양을 쓰다듬었다.
동시에 리베라가 밝은 표정으로 나왔다가, 주위의 낯선 얼굴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를 본 낯선 얼굴들에 순간 경악의 감정이 떠올랐다.
“뭐, 뭐야. 저 인간 진짜로 정령을 불렀는데? 진짜 정령사였던 거야?”
“지, 지, 지, 진정해. 어차피 최하급일 거야. 워, 원래 인간들은 그 정도가 한계잖아!”
그 정도라고 무시하기엔 본인들도 끽해야 하급이랑 계약한 게 다인 거 같은데……. 그보다 너나 좀 진정해라.
어수선 떨어대는 녀석들을 일별한 뒤 다시 리베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원래는 불을 제외한 땅, 물, 바람을 전부 하나씩 실험해 보려고 했지만, 상황이 이래서야 그건 좀 힘들어 보인다.
오늘은 일단 제일 안전한 물만 연습해 보고 돌아갈까.
나는 그렇게 마음먹고 허공에 물방울이 떠오르는 걸 상상했다. 부피는 원래 가능했던 것보다 30배는 더 큼지막한 걸로.
뽀르륵.
생각과 동시에 수분이 뭉치는 소리가 일어났다.
살짝 고개를 들자, 딱 원했던 크기의 물방울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한데……. 이거 하급이니 뭐니 하는 수준이 아니라 한 번에 중, 상급까지 격상해 버린 거 같다.
대체 얼마나 상성이 맞았던 거야.
보통 아무리 ‘정령왕의 약속’이래도 한두 경지 상승시켜 주는 게 다인데, 리베라는 한 4, 5단계는 건너뛰어 버린 모양이다.
나는 이 기쁨을 같이 나눌 사람을 찾다가, 바로 발견해 버렸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꼬마들이다.
잠시 고민하다 크기를 수십 배 줄인 물방울을 수백 개 만들어 녀석들 위에 띄웠다.
쟤네 몸집이나 엘프들의 약한 체력을 고려했을 때, 떨어지는 압력만으로 실질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장난 좀 치는데 다치게 할 필요는 없지.
아무튼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내고. 여전히 정신 줄을 놓은 듯한 꼬마들을 향해 만들어 둔 물방울들을 전부 흘려버렸다.
쏴아아아!
별안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녀석들이 그제야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꼬마들을 향해 씨익 웃어 주며 말했다.
“어때, 아직도 인간이 정령술 쓴다고 놀려 볼래?”
* * *
……너무 분위기를 타 버린 건가. 판단을 조금 잘못한 거 같다.
“대체 어떻게 인간이 그 정도로 정령술을 익힐 수 있던 거예요?! 저도, 저도 가르쳐 주세요!”
“야! 릴리아 너는 너희 부모님한테 가서 배워! 둘 다 중급이랑 계약한 실력자들이잖아!”
“시끄러. 우리 엄마, 아빠도 저런 건 못한단 말이야!”
나는 왜 장난질이냐는 비난 대신, 꼬맹이들에 둘러싸여 열렬한 호응과 관심을 받고 있다.
이런 건 별로 예상 못 했는데……. 기대하지도 않았고.
일단 얘네 감기 걸리겠다 싶어서 바람을 불러 물기를 전부 날려 버렸다. 그러자 녀석들이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뜬다.
“지금 누가 정령 쓴 거야? 나탈리, 너야?”
“나, 나 아니야. 나는 릴리아 네가 쓴 줄 알았는데…….”
“나도 아닌데. 여기서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게 너랑 나뿐인데 그럼 누구란 말이야?”
“몰라……. 애초에 나는 이렇게 강한 바람 부를 능력 안 돼.”
“그러면…….”
그다음 시선이 나에게 향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설마 이중 계약?”
순간, 내가 물방울을 만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한 경악의 감정들이 느껴졌다.
젠장. 변명거리부터 준비해 놨어야 하는 건데. 이번에도 분위기 타다가 또 잊어버렸네.
나는 일단 순순히 수긍하기로 했다.
“맞아. 어쩌다 보니 운 좋게 계약하게 됐지.”
몇 마리란 소리는 안 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멋대로 바람과 물 두 가지라 단정 지은 듯 달려들어 말했다.
“저, 태어나서 이중 계약자는 처음 봐요! 정령들은 보통 다른 속성이랑 사이가 안 좋아서 잘 안 받아 준다 들었는데……. 친화력이 굉장한가 봐!”
친화력이 좋다니. 평생 처음 들어 보는 소리다. 애초에 진짜로 다른 정령과 계약한 게 아니기도 하고.
그보다 얘는 계속 반말하더니 왜 갑자기 존댓말인지 모르겠네.
나는 계속해서 재잘대는 녀석들을 잠시 진정시키고 말했다.
“너희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그렇게 부탁해도 알려 줄 수 있는 거 없다. 그냥 나 혼자 익힌 게 다거든.”
내 말에 릴리아라 불렸던 대장 꼬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아무 도움도 없이 정령 둘과 계약하고 그 수준에 이르렀단 말이에요?”
“그래. 그러니까,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기술 같은 건…….”
“대단해!”
“…….”
어째선지 눈이 더 초롱초롱해진 거 같은데. 재빨리 덧붙였다.
“원래는 이 수준 아니었어. 이번에 1 장로님께 정령왕의 약속을 받아서 이렇게 된 거지.”
“이번이라는 건…… 역시 세계수 사건을 말하는 거죠?”
“그래.”
이 정도면 더 귀찮게 안 달라붙겠지. 그런 심정으로 몸을 돌렸는데, 뒤쪽에서 또다시 감동한 음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해.”
“……또 뭐가.”
“본인을 위한 보상을 바랄 수도 있었는데, 정령한테 양보했다는 소리잖아요!”
아니, 그냥 주는 대로 받은 것뿐인데. 어차피 엘프 마을에서 딱히 다른 걸 바라는 것도 없었고.
너희는 사실 빈털터리야.
그 말을 최대한 순화해서 설명해 줬지만, 녀석들은 듣는 시늉도 안 했다.
결국 나는 쫓아오는 목소릴 한 귀로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느긋한 엘프 성격상 저러다 말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