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56)
작은 병 안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금색 광채.
굳이 코드까지 볼 필요 없이, 내 기억이 맞다면 엘프가 줄 수 있는 것 중에 저런 물체는 한 가지뿐이다.
“……정령왕의 약속?”
“알고 있었나 보군.”
두일란이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다른 종족들에게 잘 알려진 물건은 아닌데, 어디에서 들었지?”
“저도 일단 정령과 계약한 몸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게 약간 있었습니다. 애초에 그걸 알고서 주시려는 거 아닙니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라 되려 반문하자, 두일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대에게서 희미한 정령의 향기를 맡았지. 나도 처음 겪어 보는 복잡한 냄새라 확신은 못 하고 있지만…….”
그러더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나는 그에 두리뭉실하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이번에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마 두일란이 그렇게 느낀 건 리베라가 4개의 속성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정령이기 때문일 거다.
아무리 천 년 가까이 산 엘프라도 그런 존재에 대해선 상상하기 힘들겠지.
보통은 한 가지 성질을 가진 정령과만 계약할 수 있다는 게 상식이니 말이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됐다. 내가 뭐 취조하기 위해서 부른 것은 아니니까. 아무튼, 정령과 계약한 것은 맞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럼 이 물건이 도움이 될 거다. 설명이 필요하다면 말하라.”
고개를 젓고 말았다.
설정에 없는 거라면 모를까, 게임 내 등장한 적이 있는 물건인 이상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대체 어디에서 뭘 들었기에 사용 방법까지 아는 건지 모르겠군. 우리 종족 전체를 따져도 세 개밖에 안 남은 보물인데.”
“제가 생각보다 견문이 좀 되는 편이라. 그보다 실험은 제대로 진행 중인 겁니까?”
탁자에 놓인 흙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 회수해 온 혼원력이 함유된 쪽이다.
안드라스 그 녀석이 고렌조 재판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곧바로 일부분을 들고 가 버렸는데, 경과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원래 스토리에서도 저걸로 회복했으니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유독 설정과 다른 일이 꽤 있었으니까.
알고 보니 기운이 너무 적어 회복 불가능 판정이라도 나오면 나도 남은 방법이 딱히 없다.
굳이 떠올려 보자면 내가 머물며 혼원력을 주입해 주는 것뿐인데, 내 인생을 여기서 나무 수액 역할이나 하다 마칠 순 없잖아.
엘프처럼 수명이 한 천 년쯤 되면 또 모를까.
그때, 두일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회복되는 건 확인했는데, 아직 이런저런 조건들을 전부 시도해 보고 있나 보더군. 워낙 중요한 문제다 보니 신중을 기하려는 모양이야.”
“그렇군요.”
아무래도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조금 더 걸리려나 보다.
나는 탁자 위의 작은 병을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일란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때까지 저와 성녀님은 방에서 꼼짝 않고 있겠습니다. 물론 집을 대여해 주신다면 말이지만요.”
“그 정도야 우리가 당연히 제공해야 하는 일이지. 하지만 방 안에서 꼼짝 안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게 마음처럼 돼야 말이지.
나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불편해하는 엘프들이 있을 거 같아서요.”
“……무슨 의민지 알겠군.”
두일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종족이 썩 호감 가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엘프들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바로 세계수만 얽히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이지.”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 됐습니다. 이것으로 호의적인 관계만 만들 수 있다면 아무 상관없으니까요.”
고렌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는 법.
엘프들이 이렇게 나올 건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감흥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냥 거래 관계 같은 거지 뭐.
나는 키탄과 대화할 기회를 얻어서 좋고, 얘네들은 가장 골칫거리이던 세계수 문제를 해결해서 좋고.
생각해 보면 나름 이만한 윈윈이 또 없다.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며 밖으로 나서려니, 나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도 놓치고 있는 게 하나 있군.”
문고리에 손을 댄 채 고개만 돌려 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두일란이 오묘한 얼굴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제가 놓치고 있는 거요?”
“그래. 자네가 놓치고 있는 거.”
“그게 뭐죠?”
“바로 세계수가 얽히면 엘프들은 이성을 잃는다는 거지.”
……이미 말했던 이야기잖아. 굳이 반복하지 않아도 내가 제일 잘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두일란이 먼저 살짝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겠지. 그보다 당분간 사용할 집은 앞에 있는 엘프를 따라가면 안내해 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두일란은 더 말해 줄 생각 없다는 듯 다시 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거참 싱겁기는.
나는 잠시 그 뜻을 고민해 보다가, 이내 별거 아니라 생각하고 곧바로 밖으로 나섰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될 거라곤 했어도, 설마 그게 1분도 안 지난 시점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나는 안내역을 맡았다는 엘프를 바라보았다. 우리를 두일란 집까지 안내해 줬던 간수였다.
“혹시 대여해 준다는 게 감옥이었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어째선지 갑자기 존댓말이다. 분명 감히 세계수를 상처 입혔다며 미개 종족이 어쩌니 하던 녀석이 말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변화에 대해 묻는 대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엘프들은 대부분 평생 한 가지 직업에만 종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집을 안내해 준다고 나와 있는 사람이 간수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요.”
“……생각 이상으로 저희 종족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시는군요. 하나, 시간이 비는 게 저밖에 없어서 제가 나왔을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안심했다.
나는 또 두일란 본인이 이성을 잃었다는 걸 예고하고 우릴 다시 감방에 처넣으려는 건가 했네.
“그럼 다행이군요. 바로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먼저 말없이 걸었다. 어차피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닌데 굳이 대화를 섞을 필요는 없으니까.
간수는 내가 앞서나갈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허둥지둥 달라붙었다.
“머물 집을 장로님께 미리 전해 듣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대충 짐작 가는 방향은 있으니까요.”
방문객이 드문 마을이긴 해도 손님맞이용 집 몇 채 정도는 구비해 두었을 거다.
보통 인적이 드문 곳에 있다는 설정이니 그냥 코드가 제일 적은 쪽으로 가면 그만이지.
예측이 맞았는지 간수도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이랄지, 잠깐 망설이는 기색으로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 오기는 했다.
“……일전에 드렸던 무례를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봤다.
……뭐지. 얘도 고렌조 모임에 동조한 세계수탕스 중 하나인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이제 와서 처벌받을 거 같으니 미리 죄를 비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자존심 강한 엘프가 먼저 사과를 해 올 리 없으니까.
하나, 간수는 내 표정을 보더니 재빨리 고개 저었다.
“무, 무슨 생각 하시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만, 저는 세계수를 사랑하긴 해도 그 강경파 모임에 대해선 이번에 처음 들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래요? 안 어울리게.”
“……그렇게 어색해 보였습니까?”
“네.”
얼핏 봐도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사과라는 게 엄청 티 났다. 평생 동안 그렇게 어색한 어조의 사과는 정말 처음 들어 보았으니까.
간수가 큼큼 헛기침하더니 말을 이었다.
“고렌조 장로…… 이제는 전 장로님이 된 그자가 추방되는 사이 안드라스 님께서 세계수가 회복되는 광경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어쩐지 나름 큰 사건일 텐데도 모인 인파가 적더라니. 죄다 그걸 보러 간 거였나.
“그런데 그거랑 저한테 사과하는 거랑 무슨 관계인데요?”
“안드라스 님께서 시연하면서 몇 번이나 강조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세계수는 20년 안에 시들고 말았을 거라고.”
“…….”
그 말을 들은 내가 잠시 침묵하고 있으려니, 간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90도로 정중히 숙이며 인사해 왔다.
“세계수를 살려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 *
그 이후로도 마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꽤 변한 걸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엔 못마땅한 감정이 여실히 전해져 오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이젠 복잡한 감정이 담긴 것이 더 많다고 해야 하나.
아직 직접 다가오는 경우는 없었지만, 실제로 이미지가 꽤 괜찮아진 거 같기는 하다.
솔직히 그 심경의 변화가 머릿속으로 확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이제까지 계속해서 세계수 살리러 왔다고 할 땐 듣는 척도 안 하더니, 실적을 보이고 나서야 태세 전환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나는 일단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기로 했다.
고렌조 일당을 제외하곤 딱히 시비를 걸어온 적도 없을 뿐더러, 나 같아도 부모님이 갑자기 맞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했을 테니까.
거기에 애초부터 녀석들에게 별 기대가 없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 왜 잘하던 애들이 갑자기 못하면 배신감 느껴지는데, 못하던 애들이 뭐 하나 잘하면 대견해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 할까.
그런데, 두일란이 말했던 게 이런 걸 두고 한 얘긴가?
이성을 잃었다기보다는 되찾은 쪽에 가까워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썩 나쁜 기분은 아니다.
“그보다…….”
나는 방 안의 가죽 백 프로 소파에 앉아 작은 병을 바라봤다.
두말할 것도 없이, 두일란에게 받아 온 ‘정령왕의 약속’이다.
“……이 정도 부수입은 예상 못 했는데.”
솔직히 뭐라도 주겠지 기대를 하긴 했다.
우리가 해결해 주는 건 종족의 명운이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문젠데, 그 보상이 딸랑 이제 사이좋게 지내요 수준이면 조금 맥 빠지지 않나.
하지만 끽해야 세계수 가루 몇 그램 예상했지, 결단코 엘프들에게도 보물로 취급받는 물건을 받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 물건이 정말 나에게 딱 필요한 거일 거라곤 더더욱 생각 못 했고.
“…….”
정령왕의 약속은 그 이름대로 정령과 관련된 아이템이다.
원래는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야 등급 상승을 하는 정령을 곧바로 승급시켜 주는 S등급 보물.
이걸 사용하면 원래는 먼지 날려 보내기, 몸 씻기 수준으로 그치던 리베라의 힘을 실전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것도 불, 물, 땅, 바람의 4대 원소를 전부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역사상 전무했던 정령사의 탄생이라고 볼 수 있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벅차오르는 걸 느끼며, 나는 손등의 문신을 쓰다듬고 말했다.
“리베라, 잠시 나와 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