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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55화 (155/225)

너의 코드가 보여 (155)

90도로 예의가 주입된 녀석을 힐끗거리고 다시 한 번 검을 털었다. 우수수 피가 떨어지는 걸 응시하는데, 보니까 칼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 옆구리에서 흐르는 거지.

“괜찮아요?!”

멍한 얼굴로 상황을 따라오고 있던 아리나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이번에야말로 신성력으로…….”

“됐어.”

손사래 쳐 녀석을 제지하고 몸속의 용의 피를 순환시켰다. 꽤 크게 나 있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어 간다.

아리나는 그런 내 모습을 싱숭생숭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거면 신관이 대체 왜 필요하죠?”

“신관 기술이 치료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 버프도 있고.”

“또요?”

“그리고 또…… 버프도 있지.”

“버프밖에 없잖아.”

아리나가 살짝 침울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밖에, 라고 하기엔 버프의 성능이 꽤 뛰어나다. 문제는 기사들이 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평가 절하되어 있다는 거지.

본인 힘이 아닌 걸 이용하는 건 명예롭지 못하다던가?

물론 나는 지킬 명예 따윈 모르는 장사치였기에 그대로 따를 생각은 없었다. 이번엔 내 힘만으로 충분했으니 내버려 뒀지만, 언젠가는 써먹을 일이 있겠지.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아리나를 대충 달랜 뒤, 흠뻑 젖은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

솔직히 예상외였다. 설마 라무세스가 방어를 도외시하고 공격을 선택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적어도 내가 이제껏 겪어 온 훈련이나 몬스터에게선 볼 수 없었던 행동 방식이다.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표방한다고 했지만, 역시 진짜 싸움은 다르단 건가.

생각해 보면 이때까지 내가 싸워 온 녀석들은 위로든 아래로든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뿐이었지. 양학하든가 당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는 소리다.

슬슬 비슷한 경지의 사람들과 싸워 보고 싶기는 한데, 그게 또 마음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 나와 맞먹으려면 2급은 돼야 할 텐데, 그런 놈들이 어디 흔한 것도 아니니까.

대륙급 사건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이상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지 않으려나. 싸우는 건 당연히 더 무리일 테고.

나는 잠시 한숨을 내쉰 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부분은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여기 상황부터 정리해야지.

“뭐 어쨌든 아까 했던 게 내 추론이긴 한데, 말했듯이 확신은 또 못하겠거든. 본인 입으로 직접 밝혀 줄 수 있나?”

내 말에 발쿤이 긴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추측 그대로다. 모임의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어느 순간 도를 넘어 버릴까 걱정하신 1 장로님께서 나를 심어 넣으셨지.”

“그런 것치곤 별로 제대로 대응은 못 한 거 같은데.”

사실 제일 헷갈렸던 부분이 이거다.

얘네 하는 짓 보면 미리 지령까지 내렸을 게 분명한데, 정작 나를 보호하려는 조치가 딱히 보이지 않았단 거.

1 장로 설정상 그럴 엘프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토사구팽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게임이랑 달라진 부분이 많기도 하고.

발쿤은 폴드 상태가 된 라무세스를 가리키더니 여전히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가 일행 모두를 감시하는 탓에 장로님께 연락할 틈이 나지 않았다. 나중에 경계가 느슨해졌을 때 지원을 부르려 했지.”

“나중이 언젠데?”

“구체적으로 정하지는 않았다. 반년 정도를 생각하기는 했지만.”

“…….”

이쪽도 느긋한 장수종다운 반응이라 해야 하나. 애초에 계획이 최소 1년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한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일단 적은 아닌 거 같아서 다시 말을 높였다.

“돌아가면 증언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뭐 더하고 뺄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물론이다.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이지.”

그러면 됐고.

아무튼 귀찮은 문제 하나는 덜었다. 원래 일 벌이는 것보다 사후처리가 더 골치 아픈 법이니까.

세계수 관련해서 시비 걸어 왔던 건 그냥 넘어가 줘야지. 아무리 봐도 그건 진심이었어.

나는 그에게 형식적 인사를 한 뒤, 잘려 나간 여왕의 머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곧바로 더듬이를 더듬어 투구를 벗겨 냈다.

그와 동시에 개미의 모습을 하고 있던 시체가 전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리나가 멍하니 그쪽을 바라봤다.

“……그건 또 뭔 짓을 한 거예요?”

“외형을 바꿔 주는 유물이야. 지성종 아닌 상대로 써 보는 건 처음인데, 다행히도 잘 먹혔네.”

“……그런 게 있다는 얘기도 처음 듣지만, 그런 일은 또 왜 저지른 건데요? 설마 여왕개미, 못 죽인 거예요?”

못 죽였다고나 할까, 안 죽였다고나 할까. 나도 조금 헷갈린다.

대답을 고르고 있으려니, 구멍 한 곳에서 명실상부한 여왕개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 없겠다 싶어서 그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녀석이 더듬이를 흔들며 내게 머리를 비벼댔다. 흡사 애교부리는 강아지 꼴이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내가 라무세스를 쓰러뜨릴 때 보다 더 당황하고 황당한 시선 두 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못 죽인 거 맞아.”

나는 그런 그들을 향해 피식 웃으며 여왕개미를 쓰다듬었다.

“내가 어쩌다 보니 얘랑 친구 좀 먹게 됐거든.”

* * *

원래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아리나는 생각보다 잔소리가 많은 편이었다.

그럼 상처는 대체 어떻게 입은 거냐 묻기에 그냥 자해한 거라 답하니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져선 30분 넘게 따발총을 쏘아댄 거다.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인 걸 알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내 정신 라이프는 이미 제로다.

“따라해 봐요. 부모님께 물려받은 몸을 절대 자진해서 상처 입히지 않겠습니다.”

“나 고안데.”

“하늘에라도 있을 거 아니에요.”

이건 패드립인지 아닌지 애매하네. 하늘이 아니라 지구에 계시긴 한데.

그보다 왜 얘가 동아시아권에서 통하는 격언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동방에 다녀왔다던 주교한테 들었나?

그러고 있자니, 아리나가 눈을 치켜뜨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정말 안 따라 할 거예요?”

“저는 앞으로 부모님께 물려받은 몸을 절대 자진해서 상처 입히지 않겠습니다.”

“약속은요?”

“그건 못 하겠는데.”

언제 또 필요한 경우가 생길지 모르니까.

선을 넘는 거라 생각했는지 다행히 폭력 사태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아리나는 나를 찌릿 노려보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다음부턴 조심 좀 하시라고요. 아무리 재생시킬 수 있다 해도 고통이 없는 건 아닐 거 아니야.”

“…….”

내가 뭐 딱히 조심한다고 건강히 지낼 팔자는 아니라 생각하지만…… 일단 알겠다 했다.

한마디 말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뭐 그게 그리 어렵나 싶어서.

그렇게 달래서 보내 놓으니, 어느새 스바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려 왔다.

곧바로 일행들과 함께 세계수 꼭대기에 내리자, 건물 안에서 장로들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밖으로 나왔다.

그중 막내인 7 장로 갈라드리엘이 가장 먼저 다가와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겁니까?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문제가 생겨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런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리고 명백하게 굳어 있는 고렌조 장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을 전부 마쳤으니 돌아온 거지요.”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듯 주변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그렇게 한참 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 장로회에서 말이 가장 많은 갈라드리엘이었다.

“하하, 아무리 본인들과 직접 관련된 사안이 아니라 해도 농담이 과하시군요. 세계수는 저희에게 정말 민감한 문제니, 조금만 진지하게 임해 주셨으면…….”

“7 장로님. 저는 이런 일로 장난을 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번에 장난을 친 자는 그쪽 장로들 중에 있죠.”

“그건 무슨 뜻이지?”

내 목소리에 담긴 엄중함을 읽은 듯, 두일란이 심각한 얼굴로 물어왔다.

나는 그런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가락으론 그 옆에 있던 고렌조를 가리켰다.

“저는 저기 4 장로를 상대로 재판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죄목은?”

이유가 아니라 죄목을 묻는다. 이미 전후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는 소리다.

나는 이미 죽은 거 아닌가 싶은 얼굴의 고렌조에게 시선을 돌리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최고형인 반란입니다.”

* * *

예전 내심 겔리안은 초등생들 학급 잔치라고 한탄한 적이 있지만, 사실 그런 연합의 시스템에도 장점은 있었다.

바로 부족의 자율성에 맡기기 때문에 일 처리가 비교적 빠르단 거다.

굳이 윗선까지 보고하고 허락받고 하는 절차가 없어졌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 느긋한 엘프들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거짓말! 거짓말입니다! 제가 대체 왜 그런 일을 꾸민단 말입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군. 대체 왜 그런 일을 꾸몄는지.”

끌려가며 발악하는 고렌조에게 두일란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증거도 충분하고, 증언도 확실하지. 아무리 세계수를 상처 입힌 게 원망스러웠다 해도 은혜와 원한을 헷갈려선 안 되는 일이야.”

그 말에 고렌조가 절망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제발. 차라리 죽여 주십쇼. 세계수에서의 추방이라니, 그건 너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나한테 간청할 일이 아닌 거 같군.”

두일란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갑자기 나는 왜 끼워 넣지? 처벌을 원한 건 맞지만, 딱히 간섭하고 싶던 건 아닌데.

알아서 하라고 고개 저으려는 순간, 무언가 기어와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내가, 내가 잘못했네. 전부 인정하고 사과하지. 그러니 제발 나를 죽여 줄 수 없겠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래를 바라봤다.

솔직히 썩 통쾌한 기분이 들진 않는다.

어차피 대충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배신감이 들지도 않았고, 직접 얼굴을 본 적도 몇 번 안 되다 보니 뭔가 거리감도 있었고.

그렇다고 용서할 마음이 드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세계수 근처에 다신 올 수 없다는 게 그 정도로 무서운 겁니까? 명색이 장로였던 자가 자존심까지 전부 버릴 정도로?”

“……용서해 달라는 게 아니네. 자네도 사형이면 충분할 것 아닌가.”

“죄송하지만, 제가 피 보는 걸 그리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고 그만 데려가라는 의미로 간수에게 고갯짓했다. 곧이어 저주를 퍼붓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끝까지 그쪽을 외면했다.

굳이 정신 건강에 해로운 장면을 볼 필요는 없으니까.

“……솔직히 그대가 이걸로 넘어갈 줄은 몰랐다. 우리에겐 가장 큰 형벌이 맞지만, 인간들 기준으로 봤을 땐 연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이종족 문화에는 나름 정통한 편이라서요. 오히려 보여 주기 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해야겠지요.”

내 말에 두일란이 드물게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딱히 감사 인사 받을 일은 한 적이 없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니까.”

그건 그렇긴 해.

입 밖으론 꺼내지 않았는데, 두일란은 그런 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약소하마나 보상을 준비했는데. 혹시 사양할 생각이라면…….”

그런 건 내 사전에 없는 단어였다.

“당연히 받겠습니다.”

“그런가.”

두일란은 살짝 웃더니 품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뭐라 설명을 시작한 거 같은데, 아무래도 확신은 못 하겠다.

내 정신은 이미 그 물건에 꽂혀 파업 중인 상태였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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