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54)
동굴 안이 삽시간에 침묵으로 가득 찼다. 너무 당황해서 아무도 말이 안 나오는 거다.
여기 모인 인원들은 모두 못해도 3급에 이른 최정예 전사들. 그런 그들이 가짜 외상과 진짜 외상을 구분도 못할 리 없다.
상처는 의심할 여지없이 현실이었고, 신성력이 그를 회복시키지 못하는 것도 연기가 아닌 사실이었다.
수백 년의 세월이 쌓아 온 예지에 가까운 안목.
분명 그래야 했을진대.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라무세스가 물었다.
“분명 환상 마법에 관한 대비도 끝마쳐 놓았었는데…….”
“그런 것까지 했어? 생각보다 꼼꼼하네.”
리안은 말끔해진 옷을 슥 보고 만족스레 웃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별로 소용은 없었을 거야. 애초에 나는 마법도 못 쓰는 데다, 상처도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으니까.”
“……설마 자연 회복했다 말하고 싶은 겁니까?”
“말했잖아. 몸 하나 튼튼한 게 자랑이라고.”
라무세스가 얼굴을 확 구겼다.
“무슨 몸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어야 중상의 상처를 1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회복시킬 수 있는 거죠?”
“네 상상 이상일걸. 그보다…….”
리안이 말하면서 이리저리 몸을 풀었다. 그리고 그 중간, 모두가 방심하고 있을 시점. 아무 준비 동작도 없이 옆으로 몸을 박찼다.
“내가 별로 입으로 싸우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말이야.”
서걱.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엘프 중 하나의 목이 날아가 버렸다. 백 년이 넘는 수련 끝에 다다른 3급의 최후치고는 허무한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다들 정신을 차리는 데 한참이 걸렸다는 거다.
리안의 기습이 너무 갑작스러웠기도 했지만, 그 움직임 자체가 귀신 홀린 듯 몽환적이라 넋을 쏙 빼놓았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3명이 쓰러지고 나서야 반항을 시도해 봤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러고도 뭉치지 못하고 서로 지리멸렬하기 바빴으니까.
대륙 어딜 가든 대우받는 3급 여덟의 죽음은 그리도 하찮았다.
리안은 마지막 엘프의 목을 벤 후, 다시 라무세스를 바라봤다.
“혹시 돌아가서 증언 서겠다 하면 살려 줄 수도 있는데, 어쩔래?”
“……기습은 너무 비겁한 거 아닙니까?”
“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배신에 다굴빵 놓는 게 훨씬 더 비겁하거든? 그리고 정석대로 싸우면 못 이길 거 같아서 그런 거 아니다. 괜히 쟤네 둘 지키면서 싸우기 귀찮을 거 같아서 그런 거지.”
라무세스는 리안이 가리키는 상대들을 힐끗 바라봤다.
성녀 아리나. 그녀를 지키려는 것은 이해가 간다. 애초에 그 둘은 동행으로 온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하나는 도무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발쿤은 어째서 지키려는 거죠? 그도 우리 동포 중 하나일 텐데요.”
리안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손사래 쳤다.
“동포라는 건 너네 세계수탕스 모임 말하는 거지? 그런 거면 쟤는 너희 동포 아니다. 아마 쁘락치일 거거든.”
“……쁘락치?”
“1 장로 두일란이 너희 몰래 숨겨 둔 녀석일 거라고. 네가 거짓말 한 것과 다르게 말이야.”
라무세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그리 확신하시죠? 1 장로님이 설마 만난 지 며칠도 안 된 인간에게 그런 중요 정보까지 알려 줬을 리는 없을 텐데요.”
“뭐 별로 확신까지는 아니야. 아니다 싶으면 쟤도 그냥 보내 버리려 했지.”
굳은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발쿤이 흠칫했다. 라무세스는 그런 발쿤을 일별하고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 정도는 있을 거 아닙니까.”
“여기 오기 전 세계수 안에서 있었던 일 기억해?”
“세계수 안이라면……. 아!”
라무세스가 뭔가 깨달은 듯 경탄성을 내질렀다.
“그 꼬맹이들…….”
“맞아. 눈치가 꽤 빠르네?”
“……특기할 만한 일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리안은 이를 갈며 말하는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뭐 꼬맹이들이라고 하기엔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살짝 부탁해 놨지. 너희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좀 보고 싶었거든.”
“……반응이라 하면?”
“갑작스레 공격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말이야.”
리안이 휙, 하고 검을 털어 묻어 있던 피들을 전부 날려 보냈다.
“보통은 흙을 구별할 수 있는 나를 보호하는 게 최우선이지. 특히 너희 정도 수준이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반사적으로 그렇게 행동했어야 해. 그런데 너희들은 그렇지가 않더라고.”
“…….”
“그 폭음이 울리는 순간. 너희들은 바깥쪽이 아니라 서로의 눈치를 살폈어. 마치 어느 놈이 못 참고 일을 벌였냐는 것처럼. 제대로 주변을 경계한 건 저기 저 발쿤 뿐이었지.”
솔직히 그때는 리안도 조금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열 명 중 무려 아홉 명이 쁘락치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라무세스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다시 한 번 이를 갈며 리안을 노려보았다.
“그때부터 이미 저희가 배신할 걸 예상하고 있었단 거군요. 마을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엘프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할 인간이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거죠?”
그야 당연히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지. 리안은 그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지루한 표정으로 검을 어깨에 걸쳤다.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그보다 항복할 건지 안 할 건지나 빨리 좀 알려 줄래? 시체랑 대화하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자신감이 대단하시군요. 이미 저를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뭐 사실이기도 하니까. 설마 내가 방금 너랑 같은 경지 여덟 명 썰어 버리는 것 못 봤니?”
리안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파면서 비꼬았다. 하지만 라무세스는 그 말에도 비교적 평안한 얼굴을 유지했다.
“혹시 엘프들의 등급 측정 방식은 인간들과 다르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또 무슨 말로 시간을 끌려는 건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리안은 친절히 대답해 줬다.
“알고 있어. 신체가 인간보다 훨씬 약하니까 그보다 마력이 몇 배는 더 많아야 동일 등급으로 쳐주잖아. 수련에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기도 하고.”
“역시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혹시 이런 상상은 해 본 적 없습니까?”
라무세스가 리안에게 검을 겨누면서 말했다.
“만약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엘프가 있다면…… 그 등급이 어땠을까 하는 상상 말입니다.”
“……설마 너…….”
리안이 놀란 얼굴로 그를 마주 봤다. 라무세스는 그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라무세스의 검에 엄청난 양의 마력이 모였다. 그는 그를 만족스레 바라보다가 순식간에 발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몸이 튼튼한 게 자랑인 건, 그쪽만의 얘기가 아니라는 거지요.”
콰아아앙!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 * *
쿵!
어깨에 걸치고 있던 검을 빠르게 내리쳐 공격에 맞섰다. 하마터면 방심하다 치명상 입을 뻔했다.
나는 연달아 다가오는 공격들에 일일이 대응해 나가며 생각했다.
아니, 게임 내에 저런 놈은 없었는데?
분명 나처럼 등급을 초월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 굳이 따지자면 2.5등급쯤 될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원래 이 대륙에선 상상도 못 하던 일이다. 아까 내가 해치운 3급 엘프 다섯은 혼자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건 동급 최강이니 뭐니 운운할 수준이 아니었다.
챙!
라무세스의 무기를 튕겨 내고 발을 박차 거리를 벌렸다. 추격하는 기색이 아니기에 대뜸 말을 건넸다.
“잠깐 타임. 몇 가지만 좀 물어보자.”
“입으로 싸우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 마음에 안 들면 눕힌 다음 물어봐도 되고.”
녀석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 자만심은 여전하군요. 누가 감히 세계수님에게 상처 입히는 무뢰한 아니랄까 봐……. 뭐 좋습니다. 특별히 답변해 주도록 하죠.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혹시 너 돌연변이냐?”
바로 치고 들어가 묻자, 라무세스가 살짝 벙 찐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면 사실 거인족 혼혈이라든가…….”
“기분 더러운 소리 좀 그만하시지요.”
라무세스는 이제 얼굴을 완전히 구긴 채로 대답했다.
“저희 부모님은 명실상부한 순수 엘프였습니다. 다른 종족의 피는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요.”
“그럼 대체 그 신체는 어떻게 그리 강해진 건데? 엘프에겐 불가능한 일이잖아.”
항상 받던 질문을 내가 하려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뭔가 조금 무안한 느낌이라 해야 하나.
어쨌든 기분 상해서 더 이상 얘기 안 해 주려나 싶었는데, 녀석은 얼굴을 구긴 채로도 나름 성실히 대답해 줬다.
“그냥 조금 특이 체질일 뿐입니다. 날 때부터 다른 엘프들보다 조금 강하게 태어났지요.”
“보통은 그런 걸 돌연변이라고 하거든.”
“한 번만 더 놀리는 투로 말하면 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안 되지. 나는 녀석에게 사과한 후 다시 한 번 물었다.
“혹시 앞으로 마을 밖에 나갈 예정은 없었어?”
“당연합니다.”
“어째서?”
“세계수님의 곁을 벗어나고 싶지 않으니까요.”
뭐 그런 걸 묻냐는 듯 당당한 얼굴이다.
나는 그런 녀석을 일별한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 정도 실력자에 특이사항이면 당연히 네임드로 남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밖으로 나서질 않아서였나?
아직까진 추측이긴 하지만, 어쩌면 중요한 정보가 될지도 모른다.
가끔씩 나오는 설정 충돌의 근거가 될 수도 있을뿐더러, 앞으로 나올 게임 외 등장인물에 대한 대비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해 줄 테니까.
일단 지금 당장 알아낼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남은 궁금증은 딱 하나뿐이다.
다시 라무세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질문에 굳이 전부 대답해 준 이유는 뭐냐?”
내 말에 녀석이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설마 정말로 몰랐단 말입니까? 저 때문에 긴장해서인가, 갑자기 우둔해졌군요.”
“우둔해?”
“예. 우둔합니다. 유물에겐 제한이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사용하고 있다니요!”
……유물?
이번에는 내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벙 쪄 버렸다.
“갑자기 유물은 왜 나와?”
“갑자기 왜 나오기는요. 본인이 직접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힘은 살생석이라는 유물의 기능이라고.”
……아.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생명력은 계속해서 빨려 들어가고 있겠죠. 시간을 끄는 것은 제게 더 이득이라는 말입니다.”
“미안한데, 한 가지 사과해야겠다.”
녀석을 보며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어 줬다.
무슨 목적에서였건 내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준 것은 사실이니까.
“무엇을 말이죠?”
“사실 살생석에는 무슨 생명력을 빼앗고 힘을 증폭시켜 주고 이런 기능이 없어. 그냥 피 먹으면 마력으로 전환해 주는 돌일 뿐이지.”
라무세스가 인상을 찌푸린 채 대꾸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유물의 능력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힘을 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답은 생각보다 간단해.”
말하면서 아까 녀석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검에 기운을 모았다. 라무세스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대비를 시작했다.
그래 봤자 별 소용없을 텐데.
나는 그대로 발을 박차 녀석에게 돌진했다.
“내 몸은 그냥 튼튼한 게 아니라, 사실 겁나 튼튼한 거거든.”
쿠우우웅!
그렇게 일어난 굉음과 함께, 라무세스의 몸은 그대로 절반이 접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