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53)
“……여왕을 이겼다고?”
라무세스가 멍하니 되물었다. 귀로 분명하게 들었음에도 그 내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는 그가 부정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예. 저도 믿기지 않지만, 확실하게 이긴 것 같습니다.”
확실하다면서 같습니다는 또 뭔가. 라무세스는 인상을 찌푸리고 구멍 가까이 다가갔다. 그 광경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정말로 여왕을 베었군.”
목이 떨어진 채 쓰러져 있는 거대한 개미의 형체. 아까 보았던 여왕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예상과 다른 건 하나 더 있었다.
‘본인도 무사하진 못했던 건가.’
한 만 보쯤 양보해서 3급이 2급짜리 괴수를 이겼다 치자.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쳐도 시간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싶었는데, 아마 잠력을 한 번에 쏟아붓는 기술이라도 익힌 모양이었다.
저 아래의 리안은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몸만 겨우 지탱하고 있는 채였다.
‘결투에서도 같은 기술을 썼나?’
이제야 그 압도적이었던 힘이 조금 이해가 가는 기분이다.
한 번 사용한 걸로 죽음 직전인 상태에 이를 지경이라면, 어렵사리나마 납득은 가능했다. 적어도 생으로 이길 수 있었다는 것보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땐 저렇게까지 안 갔던 걸로 봐서 어느 정도 조절도 가능한 것이겠지.
그는 내심 납득하고 뒤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성녀님께는 사과를 드려야만 하겠습니다.”
“……정말로 리안 님이 이긴 건가요?”
“믿기 힘들지만 그런 것 같군요.”
그 소식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아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라무세스를 흘겨봤다.
“그런데 정작 그쪽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건 제 착각일까요?”
“착각이 맞을 겁니다. 너무 놀란 제 표정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계신 거지요.”
“그렇다기엔 뭔가 찝찝한 거 같은 얼굴인데…….”
“찝찝한 기분인 것도 사실입니다. 대체 무슨 기술을 써야 위 급을 이길 수 있는지 고민 중이었으니까요.”
라무세스는 끝까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를 한동안 위아래로 훑어보던 아리나가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뭐, 이젠 아무래도 좋아요. 그보다 설마 이번에도 내려가는 걸 말리지는 않겠죠?”
“당연합니다. 하나, 거기엔 저희도 동행을 해야만 하겠군요.”
그 말에 아리나가 다시 시선을 라무세스에게 고정했다. 그녀는 이미 일행들에 대한 신뢰를 상당 부분 잃은 상태였다.
“그건 왜죠? 에스코트라면 필요 없어요. 아래에 가면 리안 님이 지켜 주실 테니까.”
“바로 그분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게 문제인 겁니다.”
아리나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설마 어디 다치시기라도 한 거예요?”
“직접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라무세스가 순순히 자리를 비키며 말했다. 아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아래의 상황을 본 즉시 구멍 안으로 몸을 던졌다.
설마 그리 머뭇대는 기색도 없이 뛰어내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라무세스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엘프 하나가 조용히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어와 목적어 전부 빠진 질문이었지만, 라무세스는 용케 알아듣고 대답했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겠습니다. 계획과 달라진 것이 너무 많으니까요.”
“설마 저대로 내버려 두자는 말씀입니까?”
“그런 식으로 들렸습니까?”
라무세스가 담담하게 물었다. 반문하던 엘프는 금세 찔끔해서 살짝 몸을 뺐다.
“아, 아닙니다. 조장께서 전부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당장은 내려가서 상황파악을 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라무세스는 상대를 잠시 흘겨보고 말을 이었다.
“결정은 그 이후에 내려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 * *
“리안 님!”
쿠우우웅!
안 그래도 깊은 동굴인데, 사람이 위에서 직격으로 떨어지자 그 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울려 퍼진다.
그렇게 착지한 아리나는 곧바로 두르고 있던 신성마법을 해제하고 앞으로 내달렸다.
“벌써 죽은 건 아니죠?!”
“……왜 네가 제일 먼저 내려오냐?”
리안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다친 사람이 있는데 신관이 제일 먼저 오지 누가 먼저 와요?”
“아니, 당연히 호위부터 내려오는 게…….”
“잔말 말고 몸이나 대 봐요. 부상자가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아리나가 살짝 짜증 섞인 어조로 대답하며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치료를 해 주기 위함이었지만, 정작 환자는 오히려 난감한 얼굴을 하고 슬쩍 몸을 뺐다.
“야, 됐어. 진짜로 다친 거 아니니까.”
“진짜로 다친 게 아니긴요! 그럼 이 상처는 다 뭔데요?”
“그……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짜로 다친 건 맞는데, 정말로 다친 건 아니거든?”
그 말에 아리나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해. 피가 너무 빠져나가서 제정신이 아닌가 봐. 아직 내 신성력으론 혈액 재생까지는 무린데…….”
“…….”
본인이 말했지만, 그렇게 들릴 만도 하다. 리안은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생각보다는 멀쩡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구멍 위에서 멀뚱히 구경하고 있던 일행들이 내려왔다. 정령으로 속도를 조절했는지 아리나 때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뿐한 착지.
리안은 퉁명스런 어조로 반문했다.
“이게 지금 멀쩡한 상태로 보이나 보죠?”
“그렇진 않습니다만…….”
라무세스가 친근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적어도 입을 열어 대화를 나눌 수준은 되지 않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단 괜찮은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다친 게 입은 아니라서요. 몸은 거의 죽기 직전 상태 맞습니다.”
“한데 왜 치료는 안 하시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겁니다. 부정 탄 유물을 사용했거든요.”
그때쯤엔 아리나도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언제 신성력이 안 먹혔냐고 반문하는 대신, 일단 조용히 침묵하며 주변 공기를 먼저 읽는 걸 택했다.
라무세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부정 탄 유물이요?”
“이겁니다.”
리안은 대답하며 품에서 새빨간 돌멩이 하나를 꺼냈다.
“살생석이란 유물입니다. 이제는 꽤 유명해진 물건이니 들어 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몇 해 전 아르곤에서 대학살을 일으켰던 패왕검 테오도르의 물건 말이군요.”
설명할 필요는 덜었네.
리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피를 먹이면 마력으로 변환시켜 사용자에게 전달해 준다는 저주받은 유물이지요. 또 다른 효능에 대해선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문 것 같긴 합니다만…….”
“……혹시 그 또 다른 효능이라는 게 잠력을 폭발시킨다든가 하는 겁니까?”
“잠력보단 생명력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긴 하겠지만…… 어쨌든 비슷하긴 하네요.”
“흠.”
거기까진 생각대로다. 기술이 아닌 유물의 힘이었다는 것은 예상외였지만…… 오히려 그쪽이 더 납득은 간다.
유물은 기상천외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 반면, 아무리 생명을 건다 할지라도 위 급을 이기게 해 주는 기술에 대해선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라무세스는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그렇군요. 그럼 회복이 아예 불가능하신 겁니까?”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몸 하나 튼튼한 게 자랑이라서요. 그냥 몸에 좋은 거 먹고 푹 쉬면 금방 나을 겁니다.”
그 말에 잠시 망설이던 라무세스가 뒤쪽으로 살짝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엘프들이 순식간에 앞으로 나서 리안을 둘러쌌다.
호위 목적은 아니었다. 검의 방향이 안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아리나가 눈초리를 치켜뜨고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혹시 제가 성녀님을 가로막을 때 했던 말, 아직 기억하십니까?”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리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먼저 대답해 줬다.
“기억해요. 만약 제가 죽으면 그걸 핑계로 아르곤과 칼페온이 연합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그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말하는 거죠?”
“맞습니다.”
라무세스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하지는 않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확실히 확률은 극히 적을지 모르지만, 저는 실제로도 그 최악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만큼은 피하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설명해 봐요.”
“성녀님 목숨만큼은 정말로 살려 보내려 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세계수를 벤 무뢰한과 같은 동료라 해도요.”
그 말에 아리나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조소 지었다.
“어째서 저는 그 말이 별로 놀랍지가 않죠?”
“글쎄요. 놀라지 않으셨다는 것 치곤 모으고 있는 신성력이 꽤 흔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정곡을 찔린 아리나의 어깨가 잠시 움찔거렸다. 라무세스는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원래 계획은 1년 뒤 흙을 파헤치고 성녀님이 없는 틈을 타 저놈을 기습해 해치우는 거였습니다. 이번에도 기회를 봐 둘까 싶었는데, 그렇게 뜸 들이기엔 저자의 위험성이 상상 이상으로 높아 보이더군요.”
아리나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리안을 회복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내보낸 신성력은 아무 의미 없이 다시 튕겨져 나올 뿐이었다. 정말로 부정이라도 탄 것처럼.
아리나의 안색이 점점 굳어져 가는 걸 보던 라무세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조금의 리스크는 감수하더라도 당장 해치우는 게 낫겠다 판단했지요. 한데 그보다 더 나은 방법도 하나 떠오르는군요. 혹시 들어 볼 마음이 드십니까?”
“……개수작 부리는 것만 아니라면요.”
“본인이 직접 그 무뢰한의 목숨을 빼앗는 겁니다. 그럼 성녀님의 목숨은 보장해드리지요.”
“개수작.”
아리나는 더 이상 무의미한 행위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히지도 않는 회복 마법에 기운을 쏟느니, 몇 안 되는 공격 마법이라도 쓰는 편이 더 나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제가 목숨 하나 보전해 보자고 ‘아, 알겠습니다.’ 라 하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보죠? 잊었나 본데, 저도 나름 성녀 후보거든요?”
“보통 사람들 인식과는 달리 성녀가 인성과는 큰 관계 없다는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말, 진짜로 기분 더럽네요. 내 인성이 덜되기라도 했다는 것 같잖아.”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세계수 뿌리나 빠세요.”
라무세스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무슨 의민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감히 세계수를 들먹였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아리나는 그 틈에 여전히 누운 채 눈만 끔뻑이고 있는 리안을 일별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없어도 움직여야 할 거예요. 도망치려면 지금밖에 기회 없으니까.”
“너는 어쩌게?”
“저도 이거 날리고 바로 도망칠 거예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설마 제가 리안 님 대신에 죽어 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럴 거 같으니까 문제지. 리안은 뚱한 얼굴로 고개만 돌려 아리나를 바라봤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둘 모두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런 건 그냥 꿈에서만 꾸시고, 지금은 본인 도망칠 것만…….”
“그만 됐다.”
상대가 도통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아리나는 답답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되긴 뭐가 돼……요?”
그리고 말끝을 흐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멀쩡한 몰골의 리안이 옷을 털며 일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멍한 표정의 아리나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미 다 회복했다는 소리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