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52)
쿠구구궁!
텐트를 치고 있던 엘프도, 열심히 삽질을 하고 있던 엘프도 모두 뒤를 돌아봤다.
갑자기 생겨난 거대한 싱크홀.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엔 성녀 후보가 당황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라무세스는 재빨리 일행들을 추슬러 다가갔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아리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무래도 여왕개미를 찾은 것 같아요.”
“……여왕개미를요?”
라무세스가 잠시 당황했다.
지금 입구도 못 찾고 있는 상황에 갑자기 무슨 여왕 타령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리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은 자기 거니 건들지 말라면서 들어갔거든요. 아마 맞을 거예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이 위에서 여왕개미가 있는 곳을 어떻게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착각은 아닐 거예요. 예전에도 몇 번 저러고는 했으니까.”
“…….”
라무세스는 잠시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정리하다가, 이어 발걸음을 돌려 싱크홀 쪽으로 접근했다.
굳이 여기서 떠들 것 없이 직접 확인해 보면 될 거라 여긴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그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음…….”
라무세스는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 아래엔 보통보다 몇 배는 더 큰 덩치의 개미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느껴지는 엄청난 기운. 분명 여왕이 확실했다.
그때, 어느새 싱크홀까지 다가온 아리나가 그와 대치하고 있는 형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왕은 리안 님이 해치운다 했으니 여러분은 근처에 다가오는 병정개미들만 해치우면…….”
“죄송하지만 성녀님, 저희는 내려가지 않을 겁니다.”
라무세스가 말을 끊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리나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건 어째서죠?”
“일단 예상했던 것보다 여왕의 경지가 훨씬 높습니다. 저 정도면 2급 중에서도 상위권에 달하겠군요. 지금 전력으로 해치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리안 님이……!”
“안타깝지만, 본인이 선택한 길입니다. 그 과정이 너무 서투르긴 했지만요.”
이제까지 친근하게 굴었던 건 전부 가짜였다는 듯, 라무세스는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그를 본 아리나가 이를 꽉 깨물었다.
“리안 님이 저렇게 돌아가시면 세계수를 살릴 수 없을 텐데요.”
“그 혼원인지 근원인지 하는 기운이 포함된 흙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것도 해결 방법은 있습니다.”
“……그게 뭐죠?”
라무세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저분께서 약 1년의 시간을 벌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저것 실험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얘기지요. 그럼 단지 이 흙 저 흙 파다가 세계수 속살을 넣어 보면 되는 일입니다.”
정말로 내버려 둘 심산이다. 아리나는 라무세스의 대답을 듣고 그렇게 판단 내렸다. 그녀는 이미 남 일이라는 듯 응시하고 있는 엘프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좋아요. 내려갈 생각이 없다면 그냥 마음대로들 하세요. 저 혼자라도 갈 테니까.”
“죄송하지만, 그 역시 허락해 드릴 수 없군요.”
그 말에 아리나가 눈을 치켜떴다.
“제가 그쪽의 허락까지 맡아야 하는 사람으로 보이나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 본인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신분도 아니지 않습니까?”
“성녀 얘기를 들먹이려는 거면 소용없어요. 아직 후보일 뿐이니까 제약 생기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요.”
“명목상 후보일 뿐이죠. 사실 확정된 것과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희에겐 성녀님을 보호해야 할 사명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엘프들에게 그런 의무가 있을 리 없다. 아직 정식으로 초청받은 것도 아니고, 인간들의 주신 키탄은 말 그대로 인간들의 신일 뿐이니까.
라무세스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귀교에서 성녀님을 희생양으로 보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까요.”
“……키탄교에서 대체 왜 그런 일을 꾸미겠어요?”
“전쟁의 불씨로 쓰려는 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제국도 무너졌으니 이종족들의 연합이 눈에 거슬릴 수도 있지요. 그럴 때 엘프들에게 보낸 성녀 후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좋은 구실이 될 겁니다.”
아리나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터무니없는 소리 마세요! 칼페온이든 아르곤이든 지금 다시 전쟁을 치를 여력이 있을 리가…….”
“저도 설마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저는 어디까지나 저희 종족에게 최악이 되는 경우를 대비해야 하는 입장이라서요.”
라무세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아리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고로, 성녀님께서는 여기서 가만히 저분의 명복을 빌어 줄 준비만 끝마쳐 주시면 되겠습니다.”
* * *
역시 내려올 녀석은 없나?
나는 하늘로 높게 뚫린 구멍을 바라보며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기는 하다. 사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내버려 두는 편이 저 녀석들에게 더 이득이기는 하니까.
게다가 애초에 난 저들과 같은 종족도 아니지 않은가. 굳이 동료를 구해야 한다며 난리 칠 필요도 없다는 소리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일찌감치 기대를 끊고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MON-2-19-3]
굳이 코드를 보지 않더라도 저게 여왕이라는 건 확연했다.
개미 주제에 5층 건물에 맞먹을 정도로 커다란 덩치.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일꾼과 병정. 마지막으로 뽈록 튀어나온 배까지.
저 모습을 보고도 알아채지 못한다면 눈을 뽑아 버려야지. 아니면 뇌 세척을 하든가.
나는 여왕을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혹시 나랑 일대일로 맞붙을 생각은 없나? 그래도 네 자식들인데 허무하게 희생시키고 싶진 않을 거 아니야.”
―기리리릭!
개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재주는 없지만, 아마도 거절의 표신가 보다. 여왕이 으르렁거리자마자 병정들이 돌진해 왔으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에 맞섰다.
“너희도 제대로 된 부모를 만나지는 못했구나.”
쿠과과광!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대한 개미들로 이루어진 파도가 나를 덮쳤다. 하나하나가 작은 건물에 맞먹는 크기의 괴물들이 수백. 나의 몸은 금세 그 안으로 파묻혀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걱.
나는 대수롭지 않게 검을 휘둘러 그를 전부 해체해 버렸다. 드문드문 3급도 섞여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끽해야 4급.
사실 내가 혼원력으로 방어만 두르고 있어도 해를 입힐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끽해야 기운 조금 뺄 수 있다는 점이 다일까. 그것도 숨 몇 번 고르면 회복할 수 있는 정도다.
“이대로 여기 있는 네 자식들 다 죽은 다음에 시작할래? 나는 그래도 멀쩡할 자신 있는데.”
여왕은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내가 이리도 손쉽게 자식들을 해치울지 몰랐나 보다.
뭐 이것도 결국 짐작일 뿐이지만. 개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재주가 없듯, 개미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는 재주도 없으니까.
그래도 아마 내 추측이 맞을 거다.
녀석은 곧바로 남은 일꾼들을 본인 뒤쪽의 구멍으로 물려 버렸다.
“……마냥 소모품처럼만 여기는 건 또 아닌가 보네. 부럽다 야. 나는 일행들한테 바로 버림받았는데.”
겉으로는 태연스레 말하면서 속으로는 있는 기운을 죄다 끌어모았다.
이제 여왕이 직접 나설 것이 확실했고, 녀석의 경지는 나로서도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상황은 내 예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끼르르륵…….
여왕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아까 전 사라졌던 일꾼들이 무언가 반짝이는 것들을 물고 나타난 것이다.
금붙이나 패물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값비싸게 거래되는 물건들이었다.
나는 드물게 당황한 심정이 되어 말했다.
“……지금 설마 나랑 협상 시도하는 거냐?”
―끼릭. 끼릭.
고개를 끄덕인다. 설마 했던 짐작이 사실인가 보다.
“아니, 지능이 상당하단 건 설정에 써 넣어서 알았지만, 이런 건 또 예상 못 했는데…….”
―끼릭?
이번에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했다는 제스처다.
그 모습에 그만 김이 빠져 버려서 한숨을 내쉬며 무기를 수납했다.
“별로 알아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니까 됐어. 그보다 저것들은 필요 없으니까 그냥 넣어 둬라. 상회 창고 중 제일 작은 곳에 가도 저거 백 배는 있겠다.”
―끼릭?
“혹시 그럼 원하는 게 뭐냐는 뜻이냐?”
―끼릭.
“그…… 사실 흙만 조금 퍼 가면 되는데. 괜히 폐 끼친 거 같아서 미안하다 진짜.”
―끼리릭.
“서로 오해가 원만히 풀려서 다행이라고? 너 굉장히 마음이 넓은 녀석이구나.”
―끼르르륵.
나는 개미들의 여왕과 극적인 타결을 이룬 뒤, 혼원력이 포함된 땅을 일부분 퍼내 스바에 넣어 뒀다.
그리고 잠시 위에 뚫린 구멍을 바라보다가 녀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혹시 괜찮다면 한 가지 더 부탁해도 될까?”
―끼릭끼릭.
아까완 달리 더듬이만 끄덕거린다.
나는 그런 여왕을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잠시 죽어 줬으면 좋겠어.”
* * *
“……아까부터 아래가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벌어지는 상황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엘프 하나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지금쯤이면 온갖 굉음이 퍼지고도 남았을 타이밍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딱 한 번 전투 소리가 들린 것 빼고는 완전히 잠잠해졌습니다.”
“이미 죽은 거겠지.”
다른 엘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있던 엘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자가 우리 종족 3급 최강의 전사를 단 한순간에 이겼다는 건 잊었나? 아무리 2급이 상대래도 이렇게 빨리 죽었을 리 없어.”
그 말에 일행들 모두가 하나같이 납득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드는 건 둘째 치고, 실력 하나만큼은 내심 인정하고 있던 탓이다.
금세라도 공격할 기색의 아리나를 가로막고 있던 라무세스도 순순히 수긍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요. 그런데 뭘 멀뚱히 보고 있는 거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멍청하게 돌아온 대답에 라무세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가서 아래를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닙니까. 이런 것까지 제가 일일이 지시를 내려야 하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바로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때까지의 서글서글하던 인상은 완전히 없어진 모양새였지만, 엘프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재빨리 구멍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아래를 내려다본 그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듯이 경악성을 토해 냈다.
“저건……!”
“무슨 일입니까?”
물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엘프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구멍 아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라무세스는 살짝 짜증 어린 어조로 다시 한번 재촉했다.
“제가 지금 무슨 일이냐 물었습니다.”
“그게…….”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 듯한 엘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황망한 목소리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인간이…… 아무래도 여왕을 이기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