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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51화 (151/225)

너의 코드가 보여 (151)

그렇게 올라온 곳은 확실히 특등석이라 할 만했다. 바로 뿌리의 맨 끝 부분이었으니까.

우릴 아니꼽게 바라보던 시선에 질투의 감정이 섞인 걸 보면 그냥 말로만 대우해 준 것도 아닐 거다.

어쨌든 밑에 위치한 일행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라무세스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계수 뿌리를 이용한 이동 방식은 저희 엘프들도 자주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굳이 설정까지 들먹일 거 없이 표정만 봐도 알겠다.

“저희 종족의 정말 중대사한 일을 처리할 때나 겨우 허가받을 수 있는 게 대부분이죠. 저도 올해 300살이 됩니다만, 타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로군요.”

아무렇지 않게 본인을 조선시대 사람이라고 소개하네.

국민학교 상대도 어색한 마당에 옆에 있는 건 증증증 조부쯤 된다니. 자연스레 나가는 말이 조심스러워졌다.

“이걸 타고 바로 개미굴까지 가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방법으로는 숲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외곽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만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대충 얼마나 걸린다고 보면 되겠습니까?”

“아마…… 3시간이면 도착하겠지요.”

스바를 타고 갔을 때 보다 1시간 정도 늦나.

뭐, 연료도 아끼고 새로운 경험도 한다 넘기면 별로 나쁘진 않다. 어차피 혼원력을 조금 채워 둬야 하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앞쪽에 앉자 라무세스가 입맛을 다셨다. 내 반응이 예상보다 시시했던 모양이다. 그는 곧바로 리액션이 풍부한 상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하늘을 나는 배를 가지고 계신 분께는 이게 그리 와닿지 않았나 보군요. 그에 반해 성녀님께선 뭔가 느끼시는 게 있나 봅니다.”

“……그러네요.”

뿌리를 쓰다듬고 있던 아리나가 멍한 얼굴로 대꾸했다.

“생각보다 친근한 느낌이라 해야 하나, 그리운 느낌이라 해야 하나……. 뭐라 말로 표현하긴 힘든데, 오묘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에요. 이상하게도 정작 신기하단 감정은 안 드는데…….”

그 말에 라무세스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하시면서 표현을 정확하게 해 주셨군요. 그건 저희 엘프가 세계수에게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혹시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세계수를 처음 봤을 때부터 비슷한 감정을 느끼긴 했어요. ……이 정도로 강렬하게는 아니었지만.”

아리나가 여전히 약간 멍한 상태로 대답하자, 라무세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쩌면 신과 가장 가까운 직위에 오르실 분이니 세계수님께도 친근감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다른 종족의 사람 중에 그러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

대체 신이랑 세계수랑 무슨 관계라고 세트로 엮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아리나가 원래 세계수에게 큰 감정을 느끼지 않았던 건 사실인 것 같다. 그전에는 저런 표정으로 멍하니 있지는 않았으니까.

예상과 다른 점은…… 애정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실감이 안 났던 거일 뿐인가?

이 부분은 게임에서도 설명을 안 했던 만큼 나로서도 정확히 짚기 애매했다.

진짜 본인 말처럼 사람보다 식물을 중시하는 싸이코가 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안 그래도 이상한 특성 덕지덕지 붙여 놓고 거기에 세계수탕스까지 추가해 버리면 나만 피곤해지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둘의 대화를 살짝 엿듣고 있자니, 어느새 뿌리가 땅 밑으로 들어와 이동을 시작했다.

방법은 쭈욱 전진하다 막혀 있는 곳이 나오면 다른 뿌리로 옮겨 또다시 이어 가는 식이었다.

의외로 속도 자체는 빨라서 스바와 맞먹을 만했는데, 아무래도 돌아가는 거리가 있다 보니 차이가 나나 보다.

그렇게 2시간 정도가 흐르고.

“……멀미 나서 죽을 것 같아요.”

지상에 올라오자마자 아리나가 헛구역질했다. 가까이 다가가 그 등을 쳐 주며 말했다.

“내 배 타고 오는 게 더 나을 뻔했지?”

“그건 아니……. 아, 등 좀 치지 마세요. 진짜 토할 것 같잖아.”

하라고 쳐 준 건데.

하긴, 다 보는 앞에서 오바이트하는 것도 모양새가 별로긴 한가. 일단은 성녀기도 하고.

어쨌든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것 같기에 순순히 손을 뗐다.

“너도 나름 신경 쓰긴 하는구나.”

“뭐를요?”

“성녀 체면.”

내 말뜻을 못 알아들었는지 아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이내 눈살을 찌푸린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제가 뭐 아직 되지도 않은 직위 신경을 쓴다고.”

“그럼 뭔데?”

“그야 당연히 리…….”

말이 잠시 멈춘다.

“……리 숲에 더러운 걸 끼얹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죠. 뭔가 죄짓는 것 같단 말이야.”

“…….”

이상하다. 왜 갑자기 북조선 말투가 튀어나오지? 통역 기능에 뭔가 문제 생겼나.

이미 몇 번 오류가 났던 만큼, 그쪽이 제일 먼저 의심 갔다.

나는 코드를 열어 이것저것 확인해 보다, 이내 포기해 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설정 버튼이 안 보여서.

그 대신 나는 아리나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엘프 몇몇이 바닥에 열심히 부침개를 부치고 있었다.

“쟤들도 저러고 있는데 죄랄 게 있나.”

“……저 사람들은 왜 저러고 있대요? 엘프들인 데다 경지도 3급이나 되면서.”

“그 엘프라는 게 문제지.”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마 세계수를 직접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육체 강화를 안 했을 거야. 오히려 몸이 인간보다 훨씬 약한 만큼 멀미 느끼는 정도는 더 컸겠지.”

“아…… 그렇구나.”

아리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과 다른 반응이라 조금 당황했다. 곧장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이거 이러다가 중증까지 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새삼 깨달은 만큼 세계수에 더 흠뻑 취해 버린 것 같다.

실험 삼아 돈이 좋냐 세계수가 좋냐 물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진짜로 돈보다 세계수가 좋다고 그러면 되돌리기 힘들 거 같아서.

괜히 더 심해지기 전에 얼른 일 마치고 돌아가는 게 최선이겠다.

나는 한참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라무세스와 함께 곧바로 일행들을 추슬러 숲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여기가 바로 개미굴입니다.”

숲을 나온 지 1시간쯤 되었을까. 라무세스가 텅 빈 허허벌판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아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야 당연하지요. 개미는 보통 어디에 살죠?”

“……땅속이요?”

믿기 싫다는 듯 중얼거리는 말에 라무세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맞습니다. 땅속이지요.”

“……그럼 입구는요? 입구 정도는 어딘지 파악하고 있는 거죠?”

“저희 엘프들의 금지에 대한 대응은 간단합니다. 숲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저희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 말은?”

“지금부터 찾아봐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역시…….”

아리나가 기운이 빠진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더니 곧이어 기대하는 눈으로 라무세스를 바라본다.

“그래도 뭔가 생각해 둔 방법은 있는 거죠? 사실 이번 일이 급한 건 엘프들이 더 할 거 아니에요.”

나름대로 신빙성 있는 추리기는 하다.

실제로 느긋하기 그지없는 엘프들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결정을 내려 순식간에 인원을 파견하기도 했으니까. 라무세스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오기 전에 6 장로님에게 들어 둔 방법이 있기는 하지요.”

“6 장로님이라면……. 그 안경 쓰고 젠체하는 샌님 말씀하시는 거죠?”

저거 아직 멀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까진 나름 말 가려서 하더니, 이젠 그냥 막 나간다.

그러나 라무세스는 그 무례한 발언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안경 쓰고 젠체하는 샌님 맞습니다. 그분께서 가장 빠르면서도 안전한 방법을 소개시켜 주셨지요.”

“그게 뭔데요?”

아리나는 이제 기대를 넘어 희망 섞인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라무세스는 그에 환하게 웃으며 등에 메고 있던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바로 삽질입니다.”

* * *

“저는 당연히 검인 줄 알았죠. 누가 삽 같은 걸 등에 메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아리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삽질하고 있는 엘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국 태생으로 이종족을 처음 만나 보니 컬쳐 쇼크가 오는 모양이다.

“여기 하나하나 파면서 입구 찾다 보면 1년은 훌쩍 지날 거라고요. 대체 뭐가 빠르다는 건지…….”

“쟤네 기준에선 나름 빠른 걸걸? 나이 얘기하는 거 못 들었냐?”

내 말에 아리나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러다 빠르게 반문한다.

“아니, 그럴 거면 파견 결정은 또 왜 그렇게 빨리 내렸는데요? 그건 인간들도 하기 힘든 속도였는데.”

“저 땅 파야 하는 시간까지 감안하고 보낸 거겠지.”

“……그러니까, 애초에 1년을 예상하고 보낸 일행들이라고요?”

“저기 싸 온 짐 바리바리 풀고 있는 거 보면 그런 것 같네.”

삽질 중인 일행 옆에서 텐트를 치고 있는 엘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리나는 그곳을 한 번 응시하더니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여기 1년은 있으려는 모양이네. 씻는 것하고 생리 현상은 대체 어쩌려고 저러죠? 뭔가 대책은 있는 거겠죠?”

아무리 제국 태생이래도 이종족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긴 하다. 뭐 교육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몰랐구나. 쟤네 똥 안 싸.”

내 말에 아리나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 어떻게 생명체가 그…… 생리 현상을 안 할 수가 있어요?”

“반쯤 식물에 가까운 존재들이라고 했잖아. 아마 소변도 안 볼걸?”

이것까지는 확신 못 하겠다. 엘프가 뭘 어떻게 싸는지 그리 세세하게 서술한 적은 없으니까. 사실 이런 걸 세세하게 서술하는 쪽이 더 이상하긴 하지. 일단 토는 하는 것 같지만.

“거기다 씻는 것도 큰 문제 없을 거야. 엘프들은 대부분 못해도 하급 정령과 계약해 둔 상태니까. 그냥 물의 정령 불러서 해결하면 끝이지.”

“……뭐 그딴 종족이 다 있대요?”

그딴 종족의 피가 네 안에 못해도 절반은 섞여 있는데.

이번에도 굳이 얘기해 주지는 않았다. 아직 때도 아니고, 타이밍도 별로인 거 같으니까.

아리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뭔가 멍하니 생각하는 듯하다가, 대뜸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저는 성녀니까 그렇다 쳐도, 리안 님은 여기 가만히 계셔도 되는 거예요? 가서 같이 삽질이라도 해야 눈총 덜 받는 거 아닌가.”

“쟤네가 삽질 좀 도와준다고 갑자기 우릴 좋게 보지는 않을걸. 그리고 나도 별로 놀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럼 대체 아까부터 뭘 하고 계신 건데요?”

“잠깐 기다려 봐.”

옆으로 한참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아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외쳤다.

“혹시 더위 먹어서 그래요?”

“아니!”

나 역시 큰 목소리로 화답해 주며 허리에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곧장 땅으로 푹 박아 넣어 버렸다.

그러자 아리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건데요!”

“조금 있다 엘프들 내려오려 하면 전해 줘.”

아리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을 버티지 못한 땅이 천천히 붕괴되어 갔다.

쩌저적.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창백해진 아리나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여왕은 내 거니까 근처 떨거지들이나 좀 잘 정리해 달라고.”

그리고 곧이어 생긴 엄청난 굉음과 함께, 내 몸은 아무 저항도 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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