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50)
라무세스는 그게 대체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계속해서 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뜸 들이고 나서야 우리를 세계수로 안내했다. 답답해진 아리나가 입술을 삐죽일 때쯤이었다.
“이랬는데 별거 아니면 그냥 성녀 포기하고 돌아갈까 봐요.”
“너는 성녀 자리 너무 우습게 보고 있는 거 아니냐.”
역시 다른 후보를 뽑는 게 나을 거 같은데.
하늘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세계수의 입구입니다.”
라무세스가 뻥 구멍이 뚫려 있는 나무의 밑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구멍 난 부분이 아니라,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어찌나 큰지 고개를 90도까지 꺾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최상층까지 올라가 보긴 했지만, 역시 아래에서 보는 건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엘프가 아닌 나조차도 웅장한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였으니까. 별거 아니면 돌아간다던 아리나는 벌써부터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위에서 봤을 때도 크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그게 이 정도였어요?”
“역시 혼자선 가지치기 못 하겠지?”
“가지치기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라무세스가 나와 아리나 사이의 대화를 끊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저희끼리 농담 같은 거지요. 그보다 세계수는 저 구멍을 통해 타는 겁니까?”
“아, 예. 그뿐만이 아니라 세계수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저 안에서 처리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라무세스는 환하게 웃더니 식당 웨이터 같은 포즈를 취했다.
“그럼 바로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죠.”
반쯤 넋이 나간 듯한 아리나를 데리고 곧바로 구멍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내부를 둘러봤다.
“이건…….”
“마치 또 다른 세상 같지요?”
……내가 말하려 했는데.
설정 속 이미지를 실제로 보았다는 감동을 만끽할 새도 없이, 라무세스가 계속해서 재잘대기 시작했다.
“누구든 여기 처음 들어오면 그런 반응을 보이곤 하지요. 저도 올 때마다 놀라곤 하니까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계수는 무려 이미 수명이 만 년을 넘은…….”
무슨 가이드가 박물관 역사 설명이라도 하는 것 같네.
나는 라무세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놀라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조금…… 아니, 굉장히 놀랍긴 하다. 이 세계 속의 이세계에 들어온 기분이라 해야 하나.
분명 들어온 건 나무의 구멍이었는데, 이 안에도 나무들이 즐비해 있다. 그것도 어느 도시에서든 관광지가 될 법한 큼지막한 나무들이.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마치 식물이 움직이지 못하는 건 편견이라는 것처럼 잎사귀를 흔들어대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곁에서 새하얀 빛들이 떨어져 나왔다.
아마 같은 무게의 드래곤 하트보다 비싸다는 세계수 가루일 거다. 심장이 멈춘 사람도 살린다는 최상급 하이포션의 핵심 재료가 되는 거.
그 빛 가루를 조심히 주워 모으고 있는 엘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뒤쪽에서 투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나?”
아직도 세계수 연혁을 읊어대고 있는 라무세스는 아니었다. 그는 내 앞에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나한테 하는 얘기 같아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번 일행 중 한 분이시군요. 이름이…….”
“발쿤이다. 별로 네놈에게 알려 주고 싶은 이름은 아니다만.”
사교성이 대단한 친구네.
어쨌든 자신을 발쿤이라 소개한 남자는 엘프답지 않게 험악한 인상으로 나를 노려봤다.
“세계수는 다른 이름으로 만물의 어머니라고도 불리지. 우리 엘프뿐만이 아니라, 너희 인간들도 쓰는 명칭일 거다.”
“세계수를 직접 본 소수의 인간들만 부르는 이름이지요.”
“그 세계수를 직접 본 인간들이라는 게 중요하지.”
발쿤은 아무렇게나 자라난 수염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세계수의 자식이 아닌 너희 종족조차도 직접 보고 나면 경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너는 그런 세계수를 보고 뭘 했지?”
“살짝 긁어 줬지요. 그 덕분에 지금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 거고요.”
“양해를 구할 수도 있었을 거다. 인간들은 주인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집안을 부수는 관습이라도 있나?”
“본인들끼리도 수백 년을 끌어 온 문젠데 외부 인간 하나가 설득 시도했으면 아주 잘도 먹혔겠습니다.”
발쿤은 아무 말 없이 다시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 시선에 그냥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세계수의 8천 년 전 역사를 읊고 있던 라무세스가 그제야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진정하십시오, 발쿤 경. 이분의 말씀 중에 틀린 것이 하나 없지 않습니까. 심정은 이해하나, 지금은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나름 다정한 목소리였는데, 발쿤에게는 닿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같은 엘프인 라무세스 조차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참을 째려보더니, 이내 쯧, 혀를 차면서 자리를 떴다.
라무세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리긴 했지만, 출발도 전부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군요. 저 친구가 원래 저리 무례하지는 않은데…….”
“별로 신경 안 쓰이니 됐습니다. 그보다 슬슬 출발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세계수의 남은 8천 년 역사까지 다 들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무세스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는 편이 더 낫긴 하겠군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다고는 하나, 세계수를 빨리 회복시키는 건 저희가 더 원하는 일이니까요.”
“물론 저도 이 웅장하고 위대한 세계수의 내력에 대해 듣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마음은 이해합니다. 일단 다음으로 미루지요.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까요. 그만 가 보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이건 뭐 엘프 버전 라키안도 아니고. 미리 단련시켜 두지 않았으면 수명이 10년은 줄 뻔했네. 누가 세계수 덕후들 아니랄까 봐.
아무튼, 그렇게 한 나무 앞에 도달하고 라무세스가 걸음을 멈춘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어디선가 생겨난 새하얀 빛이 폭음과 함께 우리 일행 근처를 덮쳤다. 갑작스레 일어난 사태에 모두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단 한 명만 빼고.
“방어 태세!”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듯한 발쿤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제야 해야 할 일을 기억해 냈는지 일행들이 주위를 경계했다. 그러나 근처에 있는 건 엘프 꼬마 몇뿐이었다.
어느새 내 곁까지 다가온 라무세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명령을 내렸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십시오.”
그 말에 엘프 하나가 꼬마들을 향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그는 조금 기가 죽은 듯한 녀석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곧이어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그게…… 아침에 저장해 둔 메모라이즈 마법을 실수로 발동했다는 모양입니다. 친구들과 밖에서 놀 때 쓰려 했다고…….”
라무세스가 험악하게 인상을 굳혔다.
“아무리 애들이라 해도 세계수 근처에서 마법은 절대 금지라는 걸 잊었단 말입니까? 지금 당장 장로회에 가서…….”
“한 번쯤 넘어가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저희는 맡은 임무가 우선인 데다, 당사자도 아직 뭣 모르는 애들이니까요.”
“마을에서 유명한 악동들입니다. 정말 뭣도 모르는 애들이라고 하기엔 저 중 가장 나이 많은 녀석이 무려 예순다섯…….”
“그럼에도 엘프들 사이에선 아이 수준이겠지요.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라무세스는 꼬마들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원래는 용서 못 할 죄이지만 일단은 넘어가지요. 저희는 중요한 임무도 있으니까요.”
“정말 상냥하시군요.”
“별거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꼬마들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그때까지 이쪽 눈치를 보고 있던 녀석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간다.
라무세스는 그 뒷모습을 끝까지 노려보다가 혀를 차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계수를 타기 위해선 몇 가지 준비들이 필요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그 준비라는 것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지 라무세스가 일행을 전부 데리고 자리를 떴다.
나는 그들 뒷모습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때, 돌아가는 상황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아리나가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아까 그거, 혹시 리안 님이 시킨 거 아니에요? 분명 어디서 본 꼬마들이던데.”
“맞아.”
순순히 수긍하자, 아리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안 그래도 밉상 찍힌 마당에 그런 짓은 또 왜 했대요? 다시 감옥에 갇히고 싶기라도 한 거예요?”
“확인할 게 조금 있었거든.”
“그게 저희 자유를 걸 만큼 중요한 거였나 보죠?”
“당연하지.”
나는 일행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대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가 또 어디 있겠어?”
* * *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무 근처에서 뭔가 열심히 움직이던 라무세스가 땀을 훔치며 가까이 다가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만 출발해 볼까요?”
“준비는 모두 마친 겁니까?”
“네. 완벽하게요.”
아리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가 보기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데요.”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요. 조금 있으면 말이 달라질 겁니다.”
라무세스는 피식거리며 우리를 나무 근처로 이끌었다. 그리고 넌지시 물었다.
“혹시 저희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숲의 정체에 대해 아십니까?”
“숲이 그냥 숲이지 무슨 정체랄 것도 있나요?”
아리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 말이 뭔가 엘프들만의 감성을 자극했는지, 라무세스가 하하하 웃었다.
“맞습니다. 숲은 그냥 숲이지요. 하지만 이곳은 다른 숲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혹시 그게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면적이 넓다는 걸 제외하고요.”
“음……. 글쎄요. 엘프들이 산다는 거?”
“그것도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긴 합니다만…… 저희 숲의 이름은 ‘엘프들의 숲’이 아니라, ‘세계수의 숲’입니다. 마을 이름은 엘프들의 마을인데도요. 그 이유가 뭘까요?”
“……설마?”
뭔가를 예감했는지 아리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냥 조용히 선생님의 강의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맞습니다.”
라무세스가 환히 웃으며 두 팔을 쫙 벌렸다.
“저희 숲의 나무들은 모두 세계수와 연결되어 있지요. 무려 수백억 그루가 넘는 나무들이 전부 말입니다!”
그 순간, 뿌리 하나가 우리 주변의 땅을 뚫고 튀어나왔다.
쿠구구궁!
그 광경에 놀란 아리나가 헛발질해 넘어질 뻔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뒷덜미를 집어 자세를 바로잡아 줬다.
내심 기대하고 있던 반응이었는지 라무세스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들어올 때와 같은 웨이터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특등석으로 모시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