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149화 (149/225)

너의 코드가 보여 (149)

“꺄아악!”

안 어울리게 소녀 같은 비명을 내지른 아리나가 곧장 내 뒤로 몸을 숨겼다. 매우 바람직한 신관의 자세다. 물론 지금 할 건 아니긴 하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그 뒷덜미를 잡아 옆으로 옮겼다. 손아귀 안에서 버둥거리던 녀석이 착지하자마자 찌릿 하고 나를 노려봤다.

“왜 이러세요! 저 다치면 리안 님 치료도 못 해드리는 거 몰라요?”

“진정하고 주변이나 대충 살펴봐라. 어디 한 군데 흠집 난 곳이라도 있나.”

“그런 소리에 빛까지 났는데 당연히…….”

아리나가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멈춰 버렸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황망히 중얼거린다.

“……진짜 없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긴 엘프 마을 한복판이잖아. 그런 곳에서 기습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비웃고 있는 꼬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쟤네들이 장난친 거야. 세계수 왜 상처 냈냐고 지들 딴에 항의하는 거지.”

실제로 있는 마법에서 위력은 없애고 소리와 이펙트만 키운 거다. 꽤 고차원적인 장난이라 해야 하나. 그래도 이 정도면 귀엽게 봐줄 만하다. 아리나만 조금 쪽팔렸을 뿐이지, 다친 사람은 없으니까.

아리나가 꼬마들을 보더니 혀를 찼다.

“인간애들은 끽해야 돌팔매질로 끝나는데, 엘프쯤 되면 애들이 마법을 쓰네요.”

“물리적 타격은 없으니 오히려 더 온건적이라 볼 수도 있지. 그런데 쟤네가 애들은 아니다.”

내 말에 아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봐도 애들이잖아요? 끽해야 10살 남짓 돼 보이는데.”

얘가 이곳이 어딘지 잊어버렸구나.

설명해 주는 것보단 보여 주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여전히 웃고 있는 꼬마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우리가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었는지 녀석들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꼬마가 다시 실실거리자 다 같이 태연한 안색을 되찾고 뭐 어쩌란 거냐는 식으로 나를 흘겨봤다.

본인들 마을이라고 건들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 당돌한 모습에 나는 씨익 웃으면서 몸속의 기운을 방출시켰다. 그 즉시 꼬마들의 몸이 떠올라 우리 쪽으로 천천히 날아오기 시작한다.

툭.

곧이어 착지가 끝나고.

내 앞에는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의 꼬마 넷이 덜덜 떨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외형은 10살 애들 맞다 보니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 들긴 한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더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한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발뺌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녀석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그중 대장인 듯한 여자아이가 앞으로 나섰다.

“감히 세계수님을 상처 입혀 놓고 우리 마을을 당당히 돌아다니다니! 아무리 인간이래도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이 꼬맹이가 지금 뭐래요? 뻔뻔?”

아리나가 기가 찬 듯이 말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반말을…….”

“넌 몇 살이길래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데?”

반문이 돌아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아리나가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제야 이곳이 엘프 마을이란 걸 떠올렸나 보다.

아리나는 갑자기 소심해진 모습으로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너, 너는 몇 살이신데요?”

“올해로 예순다섯 되는데.”

본인의 예상을 초월했는지 아리나가 입을 떡 벌린다. 아마 쟤 외조부가 그 정도 나이 아닐까.

“나는 대답했으니까 너도 대답해 봐. 인간은 몇 살이나 돼야 머리에 피가 마르는데?”

“……상대를 존중하는 데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먼저 나이를 따지고 든 건 너잖아?”

“그, 그건…… 그냥 말이 헛나와서…….”

그러더니 가만히 고개 돌린다.

엘프 여자아이…… 아니, 할머니는 그런 아리나를 보고 흥 웃더니 새초롬하게 팔짱을 끼었다.

“하여간 인간들은 이게 문제야. 뭐든 항상 자기들 기준으로만 생각한다니까? 그러니 우리한텐 부모님만큼이나 소중한 세계수도 막 상처 입히고 그러지.”

딱히 인간 기준으로 생각해서 세계수 벤 건 아닌데. 뭐, 됐나. 그다지 논쟁하고 싶은 주제도 아니고.

의기양양한 얼굴의 녀석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엘프들 기준으로도 쉰 살이 넘으면 본인이 저지른 일에는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여기 틀린 점이 있나?”

상대는 내가 생각보다 그들의 관습을 잘 이해하고 있자 당황한 듯했다.

“뭐, 뭐야. 그런 건 또 누가 알려 준 거야?”

“책에서 봤어. 인간들은 세월을 문자 형태로 기록해 오거든. 너희들은 그냥 말로 전하지? 오래 사는 종족이니까 그걸로 충분하긴 하겠네.”

“……책? 그 나무를 찢어발겨 만든 종이뭉치 말하는 거지?”

무슨 책 묘사를 저리 흉악하게 하지.

“하여간 누가 인간들 아니랄까 봐. 어떻게 그런 야만적인 물건을 쓸 수가 있어? 너흰 감정이란 것도 없는 거니?”

“너희들도 동물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 정도는 쓰잖아? 그리고 본인들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는 말은 네가 먼저 했던 거 같은데.”

나는 몇 마디 말로 상대를 침묵시킨 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보다 마침 잘됐다. 너희가 해 줘야 할 일이 하나 있거든.”

너무도 당연하단 듯 말하자 뜨끔한 표정을 하고 있던 녀석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흘겨봤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우리가 그걸 왜 들어줄 거라 생각하는 건데?”

“나는 너희 문화를 존중하고 너희 마을에선 너희 규칙을 따를 생각이니까?”

“그게 대체 뭐 어쨌다고…….”

중얼거리다가 흠칫한다. 내가 무슨 뜻으로 이런 얘길 하는지 깨달았나 보다.

“맞아.”

피식 웃어 줬다. 표정은 최대한 비열해 보이도록 꾸미면서.

“엘프 기준으로 보면 나는 쉰 살도 안 먹은 갓난아기인 셈이지. 너희 장난에 보복해도 아무런 처벌도 안 받는다는 소리야.”

아까 끌려왔던 기억을 떠올리는지 꼬마의 얼굴을 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몸을 벌벌 떨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물었다.

“혹시 엘프 역사상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아오른 인물로 이름을 남기고 싶니?”

대답은 필요 없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부 고개를 내젓기 바빴으니까.

나는 옆에서 어이없단 듯 응시하는 아리나를 보며 내심 생각했다.

예상하고 있던 문제가 어쩌면 계획보다 더 쉽게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 * *

질질 끌릴 거라 생각했던 출정 날짜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잡혔다. 일단 해결방법이 보이자 오히려 엘프들이 나보다 훨씬 몸 달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성은 자원자로만 했는데도 3급이 무려 열 명.

바포메트 때가 스케일이 너무 커서 그렇지, 사실 이 정도면 약소 부족 전력에 달한다. 아무리 엘프가 상위종족 중 하나래도 쉽게 내보낼 수 없는 숫자란 소리다.

아무튼 한동안 같이할 면면들을 살피고 있자니, 그중 하나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장로님에게 말씀은 전달받았습니다. 이번 여정에 큰 도움을 주실 분들이라고요.”

생각보다 정중한 태도에 나도 자세를 바로 했다.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은 다할 생각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희의 임무이기도 하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인간들의 주신 키탄 님의 명령을 듣고 오신 거였죠. 잠시 깜빡했군요.”

아마 나나 아리나나 독실한 신자의 모습과는 만 광년쯤 떨어져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이다.

그때, 산뜻한 미소를 짓고 있던 금발 미남이 내게 악수를 건넸다.

“제가 사죄드리겠습니다. 임무에 대해 워낙 생각할 게 많다 보니 정신이 조금 나가 버렸나 보군요. 보잘것없지만 이번 일행을 인도하게 된 라무세스라고 합니다.”

“리안입니다. 많이 들어 보셨겠지만요.”

주로 세계수를 상처 입힌 흉악범으로.

내 말에 함축된 의미를 읽어 냈는지 라무세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말씀은 몇 번 들었지만, 역시 직접 인사하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그리고 사실 저는 리안 님에게 감사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엘프라면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가 주위 눈치를 보며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사실 저는 두일란 님 쪽 사람입니다. 원래 이런 말씀은 드리면 안 되는데…….”

“1 장로님 말씀이십니까?”

“네. 저희가 따로 라인이 있고 그런 종족은 아닙니다만, 이번 일은 예외로 치고 두일란 님이 직접 나서셨지요.”

나 역시 목소릴 줄이고 물었다.

“이번 임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아, 너무 걱정은 마시지요. 아직은 그냥 조금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아직은이라…….”

의미심장한 단어를 조용히 중얼거리자, 라무세스가 다른 엘프들의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혹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엘프 중에서는 세계수를 신앙시하는 경우가 꽤 많은 편입니다.”

“그건 직접 겪은 제가 제일 잘 알지요. 하지만 이미 해결된 문제 아닙니까?”

내 말에 라무세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 정도론 해결이 안 됐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1 장로님께서 그 일에 대해 저희를 철저히 입단속 시켰다는 거,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예상보다 반향이 적어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끽해야 엘프 기준에서 꼬마인 애들이 장난 한 번 쳐 온 게 시비의 전부였으니까.

“어느 정도 짐작은 했습니다. 다만, 확신까지는 아니었죠.”

“그게 다 그 치들 때문입니다. 괜히 마을 분위기 뒤숭숭해지지 않게 애초부터 차단을 시켜 버리신 거지요.”

라무세스는 혀를 쯧쯧 차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번에 제가 들어오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괜히 리안 님께 그 문제로 시비 거는 인물이라도 있을까 봐요. 그러니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바로 말씀해 주시지요. 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지켜보다가,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래도 웬만한 일은 제가 알아서 상대해 보겠습니다. 최소한 며칠은 같이할 일행들인데 그 사이에서 고자질쟁이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

“물론 그러셔도 됩니다. 하나, 도를 지나쳤단 생각이 들면 언제든 부담 없이 말씀해 주시지요. 어디까지나 저희 종족이 처리해야 할 문제니까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무세스가 담담히 대답하는 나를 보고 흐뭇하게 웃더니, 아리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이야기는 당연히 성녀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신의 가장 충실한 종께 시비를 거는 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있다면 제게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걱정 마세요. 저는 리안 님처럼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말씀드릴 거니까요. 어차피 아직 후보라서 우습게 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어째선지 약간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아리나가 새침스런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본인도 잘못했다 생각한 듯 조금 미안해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보다 그 개미굴에는 어떤 방법으로 가는 거죠? 역시 리안 님 배를 타고 가나요?”

“물론 그 방법도 한 번쯤 도전해 보고 싶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저희 방식을 권유 드리고 싶군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험이니까요.”

“엘프들의 방식이요?”

“네.”

라무세스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힘차게 마을의 중앙을 가리켰다.

“바로 세계수를 타고 가는 겁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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