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48)
“…….”
방 안에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그것을 깨 버린 건 나지막한 헛웃음 소리였다.
“그쪽이 세계수에게 부족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안드라스가 기가 차다는 듯이 물어왔다. 그에 나는 덤덤한 얼굴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알아들으셨군요. 말씀하신 그대롭니다.”
“당신이 무슨 이계의 존재라도 된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순간 맞는 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이쪽에 속했어도 영혼은 지구산이 맞으니까.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한 에너지는 이 세계에 확실히 존재하는 물질이니까요.”
“……이 세계에 존재한다라, 수백 년 동안 수천 명의 학자들이 밝혀내지 못한 물질을 본인은 알고 있다 하는 겁니까?”
“이번에도 제대로 알아들으셨습니다. 정확히는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다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플라스크가 늘어진 테이블 앞 소파에 앉았다.
“굳이 이렇게 입으로 떠들 것 없이 바로 확인시켜드릴 수도 있고요.”
“…….”
안드라스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리로는 불가능하다 단정 지었는데, 아무래도 내 태도가 너무 당당하다 보니 조금 헷갈리는 모양이다.
그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두일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지고 있다는 건 소지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건가?”
과연 1 장로라 해야 하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보통은 당연히 물질적인 것을 생각할 텐데.
“소지라고 보기에는 어렵겠군요. 제가 가진 기운의 일종이니까요.”
“설마 마력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 거고.”
“물론입니다. 애초에 마력은 이미 실험해 봤다고 5 장로님께서도 말씀하셨으니까요.”
내 말에 안드라스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마력 말고 다른 기운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처음 들어 봅니다만.”
“그러니까 저희만 해결할 수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나 아는 사실이면 굳이 이렇게 나서지도 않았겠지요.”
웃으며 반문하자 안드라스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역시 침묵하고 있던 두일란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떠들 것 없이 저 인간 말대로 바로 실험해 보면 되는 거 아니겠나?”
“……1 장로님은 저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믿고 말고를 따질 것도 없지. 적어도 이 생산성 없는 대화를 끝마칠 수는 있을 테니까.”
그러더니 두일란이 빈 플라스크에 세계수 속살을 넣어 내게 건넸다.
“혹시 따로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면 지금 얘기해도 좋다.”
“제가 분명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바로 확인시켜드릴 수 있다고.”
씨익 웃으며 건네받은 플라스크를 들어 올렸다. 완벽한 실험 조건을 위해선지 내부는 마법으로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인 채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어쨌든 다른 말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점에서는 좋다고 볼 수 있나. 괜히 이것저것 해명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뜸 들일 거 없이 곧바로 내부에서 힘을 끌어 올렸다. 이제는 완전히 능숙해진 조종능력 덕분에 기운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세계수의 속살로 스며들어 간다.
파사사삭.
“저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던 안드라스가 경악성을 토했다. 내가 손을 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시들어 가던 부분이 금세 회복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황망히 말을 이었다.
“대체 저게 무슨 힘으로…….”
“저는 혼원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완전히 파릇파릇해진 세계수 속살이 든 플라스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달리 근원의 힘이라고도 하지요. 지금은 저 말곤 쓰는 사람이 없는 단어긴 합니다만.”
“……그 혼원인지 근원인지 하는 힘이 세계수에게 부족했던 에너지라 이 말입니까?”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못 믿으면 뭐 어쩔 거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세계수가 회복하는 걸 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인지 안드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뒤를 두일란이 이었다.
“나도 꽤 오랜 세월을 살아오고는 있지만, 세상에 그런 기운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 보는군. 혹시 괜찮다면 설명을 요구해도 되겠나?”
“죄송하지만 그건 좀 어렵습니다. 이게 나름 제 밑천이기도 해서요.”
그리고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닐 거다. 지금 엘프들에게 급한 것은 혼원력이 가지는 효능보다 얻을 수 있는 경로일 테니까.
그 예상대로였는지 두일란은 두 번 물어보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중요한 사실을 몇 가지나 알려 준 자를 상대로 강요할 수는 없지. 정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 중 하나니까. 우리는 세계수를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 정도야 간단하게 말씀드릴 수 있지요.”
“그럼 부탁해도 되겠나?”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덤덤히 말했다.
“혼원력이 포함된 땅은 금지 중 하나인 개미굴에 있습니다.”
내 말이 끝나고 나온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처음 들어 보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인간 쪽과 이미 알고 있었는지 경악한 표정을 짓는 엘프 쪽.
그 둘 모두를 바라보면서 피식 웃어 버렸다.
나는 얻을 수 있는 경로를 알려 준다고 했지, 얻기 쉬울 거라고 얘기한 적은 없다.
* * *
“개미굴이란 게 대체 뭔데요? 설마 진짜 개미들이 사는 집을 뜻하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안드라스의 집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그동안 궁금한 걸 꾹 참고 있었는지 아리나가 나에게 곧장 물어왔다. 나는 녀석을 한 번 힐끗거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진짜 개미들이 사는 집 맞아. 다만 크기가 보통 놈들보다 조금 더 클 뿐이지.”
“……그 조금이 어느 정도인데요?”
“네 몸집의 열 배 정도?”
본인보다 열 배 큰 개미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지 아리나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이내 바르르 몸서리친다.
“조금이 아니잖아요! 왜 그런 게 있다는 걸 저는 처음 들어 보는 거죠?”
“왜냐면 놈들은 여기 엘프들의 땅에만 있고, 엘프들은 외부에 배타적인 종족이니까. 네 생각보다 대륙엔 이런 경우가 꽤 많을 거야.”
“그런데 리안 님은 어떻게 그런 걸 전부 아시는 건데요?”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지?”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요?”
“맞아.”
언제나처럼 대충 둘러대고 계속해서 걸었다. 뒤에서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려오더니 금세 옆으로 따라붙는다.
“좋아요. 리안 님이 그걸 알고 있었다는 건 그냥 그렇다 쳐요. 근데 왜 저희까지 거기를 따라가야 하는데요?”
“너는 안 따라와도 되는데.”
“그래도 명색이 제 임문데 어떻게 그래요? 리안 님 가면 저도 가는 거지.”
생각보다 책임감 정도는 가지고 있나 보다. 지금쯤이면 본인 임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을까 했는데.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세상에서 그 혼원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나뿐이잖아. 요컨대 그게 함유된 땅을 찾을 수 있는 것도 나뿐이란 거지. 어때, 이해하기 쉽지?”
“……이해는 되는데요.”
아리나는 아직 뭔가 불만인 듯 말을 흐렸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녀석을 바라봤다.
솔직히 쟤가 이러는 이유가 짐작이 안 간다.
본인은 모른다 해도 나름 하프엘프인 만큼 세계수에게 아무 감정 못 느끼지는 않을 텐데?
사실 저 녀석이 먼저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엘프들이 세계수 관련해서 이성을 잃어버리는 건 흔한 경우니까. 괜히 내가 세계수탕스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설정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텐데…… 이것도 게임과 달라진 것 중 하난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었다.
“너 혹시 저 나무 보면서 뭐 느껴지는 거 없어?”
“무슨 나무……. 아, 세계수요?”
“응. 막 가서 껴안고 싶다든가…….”
아리나가 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리안 님은 나무를 보면 그러신가 봐요? 일단 취향은 존중해드릴게요.”
“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네가 그렇지 않냐고 묻는 거야. 껴안는단 표현이 조금 그러면 가서 가지치기를 해 주고 싶다든가 하는 생각은 안 들어?”
아리나는 여전히 나를 미친놈처럼 쳐다보다가 내 얼굴이 진지한 것을 확인하고 마지못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그렇긴 해요. 가지치기는 모르겠지만, 뭔가 보고 있으면 포근한 기분이라 해야 하나?”
“그치? 막 회복시켜 주고 싶고 상처 입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렇지?”
“……네. 그보다 왜 그렇게 신난 건데요?”
별로 신나지는 않았는데. 혹시나 얘가 하프엘프라는 설정 자체가 바뀌어 버린 건 아닌지 조금 걱정했을 뿐이다.
“그냥 궁금하니까 그러지. 생각보다 너랑 엘프랑 공통점이 많잖아. 예를 들어 똑같이 육식을 선호한다든가.”
“고기 좋아하는 거 하나로 공통점이 많다고 치면 거인과 엘프는 동일 종족이라 봐도 무방할걸요.”
“……넌 어떻게 한마디를 안 지냐?”
“직업이 입으로 벌어먹는 거라서요.”
신관이 언제부터 입으로 벌어먹는 직업이 됐지? 나는 떠오른 의문을 뒤로하고 다시 녀석에게 물었다.
“아무튼, 세계수에 뭔가 특별한 감정을 느끼기는 한다는 거지? 그런데 왜 결투 때부터 계속해서 불만만 많아 보이냐? 전부 세계수 살리려고 이러는 거잖아.”
“……혹시 옆에서 계속 찡찡대니까 불편하셨어요?”
“따지려는 게 아니라 단순히 물어보는 거야. 무슨 이유라도 있나 싶어서.”
내 말에 아리나는 잠시 망설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안 님이 걱정되니까 그랬죠.”
“내가?”
“네.”
예상 못 한 말은 아니다. 실제로 아리나가 계속해 왔던 얘기는 내 안전에 관해서였으니까. 문제는 그 이유지.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미적대던 주제를 끌고 왔다.
“너 반년 전쯤에 했던 말, 혹시 기억해?”
“반년 전이요?”
“디저트 가게에서 거짓말이라 했던 거.”
잠깐이라도 흠칫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리나는 주저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제가 리안 님 좋아하는 게 거짓말일까 그걸 거짓말이라 했던 게 거짓말일까 했던 그거요?”
“……그래, 그거.”
“얼마나 오래된 일이라고요. 당연히 기억하죠. 근데 그건 갑자기 왜요?”
나는 녀석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너, 정말로 나 좋아하는…….”
“나무 얘기하다 갑자기요?”
아리나가 내 말을 끊고 답했다. 얼굴에는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네가 아직 뭘 잘 몰라서 그래. 지금 설명해 줄 순 없지만, 원래대로라면 내가 싫다고 해도 세계수 구하라며 억지로 밀어붙이는 게 정상이란 말이야.”
거기서 벗어나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뿐이다. 바로 세계수. 그러니까, 상대를 본인 부모만큼이나 좋아하거나 본인 부모보다 좋아할 때 말이다.
아리나는 여전히 내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듯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그런 정상이 다 있대요? 애초에 제 임무에 리안 님이 끌려온 것뿐인데.”
“이성보단 감정에 관련된 문제니까. 내가 세계수 베었다고 할 때 안에 있던 엘프들 표정 봤지? 지금은 1 장로와 5 장로가 저렇게 돕고 있어도 그 당시에는 그 둘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잖아.”
“그 엘프랑 제가 무슨 관계인가 싶기는 한데…….”
아리나가 한숨을 내쉬더니 곧이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제가 식물 좀 좋아하기는 하는데, 나무가 사람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싸이코는 아니니까요.”
“……그래?”
나는 조금 안심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원래 설정보다 세계수에 대한 애정이 조금 떨어졌을 뿐인가 보다.
뭐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굳이 게임과 바뀌지 않았다고 해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마당에 새로 심은 오렌지 나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세계수보다 훨씬 더 정이 붙었다든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걷고 있자니 뒤에 있던 아리나가 다시 내 옆까지 따라붙었다.
“그런데 왜 질문을 하다 말아요?”
“무슨 질문을 하다 말아?”
“처음에 물었던 건 반년 전 얘기잖아요.”
아, 그거.
“이제 됐어. 대답은 들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냥 놀리려고 한 말이잖아.”
“……지금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요?”
혹시 세계수를 정말로 좋아하는데도 나를 말렸다면 모르겠는데, 그런 건 아니라 했으니까.
그렇게 친절히 설명을 해 주려는 찰나.
콰아아아앙!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마법이, 순식간에 나와 아리나를 강타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