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47)
“…….”
경기장을 보고 있던 고렌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 올라간 엘프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까.
‘동급 상대로는 절대 지지 않을 3급 최강의 전사…….’
그렇기에 적당한 3급 기사를 올리자는 두일란의 의견에 반대하며 직접 추천한 것이다. 감히 세계수에 손을 댄 연놈들을 살려 보내지 않기 위해서.
까드득.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고렌조가 이를 갈며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로 원래 계획했던 대로 암살하는 것. 예상보다 훨씬 강한 실력이기는 하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처럼 세계수를 신봉하고 따르는 엘프는 수도 없이 많으니까.
‘한 명으로 안 되면 열 명을 보내면 되는 일이지.’
일명 인해전술이다. 아무리 그래 봤자 3급의 경지인 만큼 숫자로 상대하면 당해 낼 수 없으리라.
그때, 그가 속으로 그런 계획을 꾸미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같이 관람 중이던 갈라드리엘이 나지막하게 감탄을 터뜨렸다.
“저건…… 믿을 수가 없군요.”
“확실히 굉장한 실력이긴 하군.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반응할 정도는 아닐 텐데?”
갈라드리엘은 겨우 100살 남짓한 나이에 2급에 오른 천재 중의 천재. 그런 그가 아무리 그래도 3급 나부랭이를 상대로 놀랄 거라고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100년 내로 1급이 될 수도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인재 아닌가.
그러나 갈라드리엘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저도 만약 결투에 나갔다면 저 정도는 가능했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저보다 더 빠르게 끝낼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얼마나 순식간에 상대를 이겼느냐가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제란 건가?”
“순간이지만 저도 저 인간의 움직임을 놓쳤다는 거죠.”
갈라드리엘이 꿀꺽 침을 삼켰다.
“동급의 실력자 중에서는 저런 경우가 몇 번 있긴 했어도 아래급 상대로는 결단코 그런 경우가 없었습니다. 한데 저 인간은 겨우 3급에 다다른 자가 아닙니까.”
“……실력을 숨겼을 수도 있다는 건가?”
“그렇지는 않겠죠. 최근 10년 사이에 인간이 경지를 숨기는 방법이라도 발명한 것이 아니라면요. 다만……”
조금 망설이는 듯하던 갈라드리엘이 경기장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뭔가 특별한 기술이 있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한순간 내부의 잠력을 폭발시킨다든지……. 도저히 3급의 경지로 낼 수 있는 힘이 아니니까요.”
실력은 뛰어나지만, 관록이 적은 그로서 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어찌 됐든 엘프족 역사에서 손꼽는 검술 천재의 의견. 그 신빙성은 상당했다.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아니라는 거군.’
그렇다면 일은 더 쉬워진다. 벌써부터 고렌조의 머릿속으론 저 인간을 공략할 방법이 마구 떠오르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효과적일 것들을 몇 가지 추려 내며, 고렌조가 남몰래 씨익 웃었다.
* * *
“내가 빨리 끝내고 온다 했지?”
멍한 표정으로 건네 오는 외투를 받으며 피식 웃었다. 그제야 아리나가 제정신을 차린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언제 그렇게 강해진 거예요? 심문관 상대로 빌빌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빌빌댄 적은 없지.”
“한 대 겨우 막은 걸로 잘난 체했던 건 사실이잖아요. 뭐 태도만 당당하면 다인 줄 알아요?”
“…….”
확실히 그때 실력은 조금 부족하긴 했다. 이 세계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으니까. 솔직히 개인적으론 그 상황에 제정신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기 마땅했다고 본다.
나는 다시 외투를 걸치며 말했다.
“어릴 때 얘기는 그만하자. 누구나 흑역사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법이잖아.”
“겨우 3년밖에 안 지났는데요.”
“그 3년을 얼마나 밀도 있게 보냈느냐가 중요한 거지. 네가 생각해도 몰라볼 정도로 강해지지 않았냐? 이게 다 그만큼 노력했으니 가능한 거야.”
“……그건 또 그렇죠.”
차마 거기까지는 반박 못 하겠던지 아리나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이제 정말 다 끝난 거예요? 이래 놓고 사실 이건 1회전이었다든가 하는 건 아니죠?”
“그런 건 불가능하지. 쟤네가 뭐 아르곤이랑 완전히 척이라도 지려는 게 아니면. 다만…….”
“다만 뭐요?”
나는 장로들이 앉아 있는 객석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경기가 끝이란 거지 이번 일이 끝났다고 보기엔 뭐하긴 하다.”
“……그게 무슨 의미예요?”
“너는 알 거 없어.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내 말에 아리나가 입술을 삐죽였다.
“만날 뭐 알아서 해결한대. 지금 이게 리안 님 임무가 아니라 제 임무인 건 아시죠?”
“그래서 불만이야?”
“불만은요. 고맙다고 인사하려 그러죠.”
그러더니 금세 방긋 웃으며 허리를 90도로 숙인다.
“저는 이번 임무에서 리안 님만 믿고 갈게요. 어차피 제가 할 일도 없는 것 같고.”
할 일이 없다라……. 글쎄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씨익 웃어 버렸다.
태평한 건 좋지만, 쟤도 아무 일 없지는 않을 텐데. 오히려 내 예상대로라면 녀석도 고생 꽤나 할 거다.
하지만 굳이 그런 얘기들을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는 게 맞겠지만. 바로 어느새 두일란이 내 곁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놀랍군. 내심 자네가 부상 입은 뒤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제가 자신도 없는 일에 나서는 건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서요.”
나는 아리나에게 향해 있던 몸을 되돌리며 말했다.
“이러면 저희는 이제 여기 남아서 임무를 마쳐도 되는 거겠지요?”
“물론. 아직도 불만을 가진 자들은 남아 있을 테지만…… 그 정돈 내가 달래 보지. 어차피 이 결투는 천년도 넘은 관행인 만큼 그들도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을 거다. 처음부터 반대했으면 모를까.”
두일란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똑바로 마주 봤다.
“그보다 이만 그전에 했던 말의 의미에 대해서 묻고 싶군.”
“여러분들만으로는 세계수를 회복시킬 수 없을 거라는 얘기 말입니까?”
“그래.”
“굳이 설명드릴 것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의 의미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동쪽을 바라봤다. 안드라스의 코드가 떠 있는 방향이다.
“어차피 5장로님에게 맡겨 놓았을 조사가 슬슬 마무리되지 않았겠습니까? 같이 가서 확인해 보시지요.”
“……내가 그에 대해 설명한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장로님도 불쑥 찾아온 저희 신상을 전부 파악하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와 비슷한 선상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내 태연한 대답에 두일란이 한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눈에는 경계인지 감탄인지 모를 감정이 섞여 들어가 있었다. 나도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태연히 마주 봤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두일란은 보기 드물게 피식 웃더니 등을 돌리며 말했다.
“그리 말하니 나도 뭐라 할 말이 없군. 다음 주제는 안드라스에게 가서 확인한 뒤로 미루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리나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 * *
안드라스의 집이라고 다른 집들과 무슨 차별점이 있지는 않았다. 굳이 찾으려 한다면 내부에 안 어울리는 실험용 플라스크들이 있다는 정도? 그것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갑자기 들어온 우리를 보고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말했다.
“시합이 취소라도 된 겁니까? 여기 있으면 안 될 얼굴들이 몇 보이는군요.”
“시합은 정상적으로 진행됐다. 다만 조금 빨리 끝났을 뿐이지.”
“……시합이 벌써 끝났다고요?”
그제야 조금 당황했는지 안드라스가 멍청한 목소릴 냈다. 두일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자는 굳이 말해 줄 필요 없겠지? 이들이 여기 있는 걸 보면 결과야 확연할 테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대체 어떻게 이긴 건지는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제 분석대로라면 분명 패하는 건 저 인간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건 자네가 무력 쪽으로 안목이 없어서라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나도 같은 생각이었으니 뭐라 하기가 그렇군.”
두일란이 그렇게 말하며 안드라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시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해선 나중에 7장로에게 따로 물어보면 될 거다. 지금은 그것보다 세계수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고 싶군. 조사 결과는 나왔나?”
안드라스는 여전히 납득이 힘든지 끊임없이 나를 힐끗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근처에 있던 플라스크를 들어 올렸다.
“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수의 수명이 다한 것은 아니더군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공급되는 영양분이 부족하단 것이겠군.”
“맞습니다. 그래서 차악의 상황이라 볼 수 있죠.”
안드라스가 플라스크 세 개를 늘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들은 각각 땅에 포함된 영양분만 넣은 것, 순수한 마력만 넣은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가지 모두 일정한 비율로 섞은 것입니다. 혹시 차이점이 보이십니까?”
나는 그 말에 플라스크 안에 든 세계수 속살들을 바라보았다.
어느 것 하나 차이 없이 같은 모양으로 썩어 있는 채였다. 혹시나 엘프들 눈에는 다르게 느껴질까 싶었는데, 그들이 보기에도 똑같았나 보다. 두일란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모두 똑같아 보이는군.”
“바로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안드라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예상했던 대로 무언가 더 필요하다는 것은 알아냈습니다만,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미 수백 종류의 물질들로 실험을 마쳤는데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안드라스는 그 사실에 꽤 실망한 듯했지만, 정작 나는 그에게 조금 놀라고 있었다.
나와 아리나가 이 마을에 온 게 아직 며칠 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새 이미 수백 가지 종류의 실험을 마쳤다는 것은 안드라스가 진작부터 이런 상황을 대비해 왔다는 소리가 된다.
과연 모두가 반대하는 세계수 진료를 밀어붙인 인물답다고 해야 하나. 그 고생을 혼자서 잘도 했다 싶다.
그때, 안드라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직 남은 물질이 십여 개 정도 있긴 하나, 전부 확률이 낮은 것들입니다. 아니, 가능성이 제로라고 해도 무리는 없겠지요. 솔직히 세계수를 까 보자고 한 입장에서 면목 없습니다만, 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론 이것들이 알려진 물질의 전부니까요.”
“그렇다고 하는군.”
두일란이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눈빛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고 담담하다.
“여기까진 자네 말대로긴 한데, 해결 방법까지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믿어도 되겠나?”
그 말에 안드라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1 장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들도 해결하지 못하는 걸 인간들이 어떻게 푼다고…….”
“그대에게 물은 것이 아니다. 저들에게 물은 것이지.”
두일란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는 듯이.
나는 그 표정을 마주 보며 피식 웃어 버렸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바로 그 세계수에게 부족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장본인이니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