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46)
따라왔다 해야 할지 끌려왔다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도착한 곳은 회의장이 아니었다.
바로 세계수 아래 자리 잡은 수많은 집들 중 한 곳에 들어가게 된 거다. 소박하고 말고를 떠나서 다른 집들과 차이가 하나도 안 보이는 모습이다.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아리나가 간수에게 물었다.
“여기가 정말 그 1 장로님이라는 분이 살고 있는 집이 맞아요? 분명 높은 사람이라 들었는데…….”
“높은 분?”
간수는 코웃음을 치더니 아리나를 흘겨봤다.
“그런 건 너희같이 미개 종족들이나 따지는 일이다. 가장 높은 곳에 달려 있는 나뭇잎이라고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
“하지만 장로들이 이런저런 지휘를 내리는 건 사실 아니에요?”
“그건 그분들이 맡은 임무가 그러할 뿐이다. 딱히 사석에서까지 대우받을 이유가 없지.”
아리나는 저런 사상이 낯설었는지 뭔가 요상한 얼굴이 되었다. 인간 세상이랑 너무 달라서 인지 부조화라도 왔나 보다.
하지만 정작 나는 별생각 들지 않았다. 원래 엘프들이 저런 종족이라는 건 충분히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느 쪽 사상이든 우열을 가르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아리나가 질문하고 간수가 귀찮아하면서도 꼬박꼬박 답변해 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느새 눈앞에는 집안에서 가장 큰 방이 보였다.
문 같은 건 현관을 제외하면 하나도 없는 집이라 곧바로 안쪽이 훤히 보인다.
그때, 간수가 앞으로 나섰다.
“장로님, 말씀하신대로 죄인들을 데려왔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수고했다. 남은 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만 본 업무로 복귀하도록.”
“알겠습니다.”
간수는 망설이는 기미도 없이 순식간에 뒤돌아 나갔다. 저들 장로를 이방인 둘과 남겨 두고 떠나는데 걱정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는 모습이다.
“그래. 우리가 만든 감옥은 좀 어떻던가? 가끔 엘프들이 쓰는 곳이라 해서 감옥도 꽃밭일 거라 생각하는 인간들이 있더군.”
간수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인간 감옥과 별다를 건 없더군요. 개성은 조금 부족해 보였습니다.”
“실망시킨 것 같아 미안하군.”
두일란이 살짝 웃으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아직도 조금 딱딱한 분위기기는 하지만, 회의장에서 봤던 것보단 훨씬 풀린 느낌이다.
당장 질책하는 소리부터 나올 거라 생각했는지 아리나가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두일란은 그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볼 것 없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그대들이 수백 년 동안 끌어온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 준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저희가 문제를 해결했다고요? 아무리 봐도 문제를 만든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정확히는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만들어 줬다 해야겠군.”
두일란이 성큼성큼 다가와 소파를 향해 손짓했다. 나와 아리나는 그에 맞춰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감촉이나 재질을 보면 백 프로 동물 가죽으로 만든 것일 거다. 그러고 보니 여기 들어와서 식물로 이루어진 가구는 하나도 본 적이 없네.
과연 엘프답다고나 할까. 보통 인식과는 많이 다른 것 같기는 하다만.
그때 두일란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파내어진 세계수의 안쪽을 살펴봤다. 실제로 상당 부분 썩어 가고 있는 중이더군. 위쪽이 그 정도니 아래쪽은 말할 것도 없겠지.”
“그게 무슨 문제 해결의 단초가 되는 건데요? 세계수가 시들어 가고 있다는 건 원래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겉으로 시들해지고 있는 걸 보는 것과 실제로 안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걸 확인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이제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도 확인할 수 있을 테고 말이야.”
“그런데 왜 여태까지 그냥 내버려 뒀던 건데요?”
아리나의 말에 두일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이유는 그대들이 직접 겪지 않았나.”
“……설마 진짜 세계수에 손상을 입히고 싶지 않다는 것 때문이라고요?”
“우리 종족은 변화를 반기지 않는 경우가 많지. 세계수에 관해선 특히 더 그렇다.”
아리나는 두일란의 얘기에도 잘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아무리 그래도 인간은 몇 세대나 거칠 시간 동안 저대로 방치했다는 걸 어떻게 이해하겠나? 나도 그건 도저히 쉴드 못 쳐 주겠고.
정작 엘프인 두일란 역시 내심 같은 생각을 가진 듯했다. 그는 쓰게 웃고 있던 입가를 늘어뜨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안드라스가 바로 조사에 들어갔으니 금방 결과가 나오겠지. 더는 걱정할 것 없다.”
“……뭐, 이렇게라도 문제가 진전됐다니 다행이네요.”
아리나가 그렇게 말하고는 감탄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까 감옥에 있을 때는 너무 과격했다고 탓하더니 쟤네 하는 꼬라지를 보니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걸 이해했나 보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어깨를 으쓱여 주고 두일란에게 말했다.
“그럼 저희 처우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공식적으로는 추방이다. 어쨌든 그대들이 허락도 없이 세계수를 손상시킨 것은 맞으니까. 이것도 성녀 후보라는 직위를 감안하고 나온 처벌이라는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비공식적으로는요?”
“그대들의 임무가 끝난 거지.”
두일란이 두 손으로 깍지를 끼며 답했다.
“어차피 이번 방문의 목적은 연합과의 관계 증진이겠지? 그것 말고는 가만히 있는 우리에게 와 도움을 줄 리가 없을 테니까. 이번에 세계수의 회복이 완료되면 키탄교의 도움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발표하지. 그 정도면 분위기가 우호적으로 돌아서는 데 충분할 거다.”
나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저쪽에서 해 줄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사실상 명목뿐인 처벌로 끝나면서도 목적은 달성하는 거니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저들이 세계수를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가정했을 때의 얘기지만.
“죄송하지만, 그 제안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리안 님?”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리나가 옆에서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두일란도 다시 분위기가 조금 딱딱해졌다.
“이게 최선의 방안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나 보군. 그리고 이건 제안 같은 게 아니다. 그보단 통보에 가깝지.”
“그게 최선의 방안이라는 건 여러분들이 세계수를 회복시킬 수 있었을 때의 얘기죠.”
“……그 말은?”
“맞습니다.”
나는 두일란의 서늘한 눈길을 받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은 세계수를 회복시키는 데 실패할 겁니다. 물론 저희가 돕지 않는다면요.”
“…….”
두일란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와 아리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물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당연히 근거는 가지고 하는 말이겠지?”
“저는 그런 것보다는 결과로 보여 주는 성격이라서요.”
“근거도 없다는 소리군.”
두일란이 더 얘기할 가치가 없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만약 정말 그 말대로 된다고 할지라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 내 권한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외부인인 그대들을 추방하는 것으로 끝내는 게 최선이었으니까.”
“그럼 아무것도 없는 외부인이 아니면 되는 거 아닙니까.”
“……뭔가 또 있다는 건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두일란과 똑같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품속에서 패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 없는 눈이 잔물결을 그린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르곤 후작의 자격으로 말씀드리죠.”
나는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저는 저의 면책 특권을 걸고 귀 부족과의 결투를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 * *
당연한 얘기지만 아르곤 후작쯤 되면 가지는 권한이 정말 막강해진다.
그건 아르곤 내부뿐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마찬가진데, 대표적으로는 만약 다른 왕국에서 죄를 저질러도 그곳에서 처벌받지 않는단 것이 있다.
명목상으로는 본국으로 소환해 심판한다는 건데, 사실 그게 지켜질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초반에나 재판하는 척하다가 흐지부지되기 일쑤라는 건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요컨대 나도 패를 꺼내 놓기만 했으면 애초부터 감옥에 들어갈 일도 없었다는 소리다.
“……정말 괜찮겠어요?”
그때, 내 상념을 깨고 옆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모래로만 이루어진 경기장에서 시선을 떼고 아리나를 바라봤다.
“문제없다니까. 나도 얼마 전 3급에 올랐다고 얘기해 줬잖아.”
“바로 그 얼마 전이라는 게 문제죠! 상대는 3급에 오른 지 벌써 100년이 넘은 괴물이라잖아요! 사실상 3급보다는 2급에 가깝다고 수군대는 소리 들었단 말이에요.”
나는 그 말에 다시 시선을 돌려 경기장 중앙을 바라봤다.
확실히 강해 보이기는 한다. 아마 아르곤 3급 국가기사 중에서도 최강을 찍지 않을까?
태평한 생각을 하며 전력을 따져 보고 있자니 옆에서 다시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지금이라도 그 면책 특권인지 뭔지 발동하죠? 말이 결투지, 목숨까지 걸고 하는 거라면서요.”
“그럼 아르곤으로 소환돼야 하잖아. 여기까지 와서 수확도 없이 돌아갈 순 없지.”
면책 특권은 말이 면책 특권이지 사실 따지고 보면 불체포 특권에 가깝다. 그냥 우리나라에서 처벌할 테니까 풀어주세요, 하는 소리에 불과하니까.
뭐, 실제로 돌아간다 해도 처벌받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결국 똑같은 말인가 싶기도 하지만.
나는 차분하게 몸을 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결투만 이기면 면책 특권 발동에 아르곤으로 소환될 이유도 없어져. 옛날부터 엘프 종족에 있던 규칙 같은 거거든. 변화를 싫어한다는 게 이럴 땐 또 좋지?”
“……어디까지나 이겼을 때의 얘기잖아요.”
덤덤하던 목소리가 떨린다. 나는 그제야 흠칫해서 다시 옆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아리나가 이제껏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저 솔직히 별로 성녀 안 돼도 상관없어요. 그냥 여기서 돌아가도 된다고요.”
“……난 진짜 괜찮다니까. 그리고 설마 진짜 죽이기라도 하겠어?”
“그건 또 모르죠. 리안 님이 세계수 베어 버렸잖아.”
아니, 진짜 살짝이었는데. 그걸로도 엘프들에겐 충분히 죽일 이유가 될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살짝 한숨을 쉬면서 외투를 벗어 아리나에게 건넸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올게. 그럼 됐지?”
“빨리 끝내고 오긴 뭘 빨리 끝내고 와요? 빨리 끝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저희 그냥 돌아가요. 네?”
녀석한테 다시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경기장 중앙에서 나를 부르는 심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행동으로 보여 주면 끝일 거 같아서 그냥 말없이 경기장 안으로 향했다. 아리나도 더 이상 얘기하는 건 의미가 없다 생각했는지 아무 말 없이 조용하다. 뒤쪽에 있어서 표정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양측 모두 준비는 끝났습니까?”
나는 주변을 가득 채운 엘프들을 바라보면서 심판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날카로운 인상의 상대도 조용히 수긍했다.
“그럼 굳이 미룰 것 없이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심판이 마법으로 허공에 커다란 종을 만들었다. 아마 저게 시작 신호인가 보다. 나는 그 시점부터 시선을 그쪽에 집중했다.
그리고 대앵, 종이 울리는 순간.
탓.
내 몸은 이미 상대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나는 당황한 엘프의 표정을 보면서 곧바로 그에게 검을 휘둘러 버렸다.
콰아아앙!
그렇게 시합이 시작되고 10초도 안 지난 시점.
“…….”
경기장 위에 존재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