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145화 (145/225)

너의 코드가 보여 (145)

“……그러니까, 저 여자가 바로 키탄의 성녀 후보란 말이군.”

엘프에겐 어울리지 않는 콧수염. 아마 4 장로인 고렌조일 거다. 저런 외형은 저밖에 없는 데다, 코드도 그렇게 말해 주고 있으니까. 그가 의심스런 눈으로 아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키탄교로부터 성녀 후보가 온다는 연락 같은 건 받은 적 없소만.”

“아마 아직 미처 연락할 생각을 못 한 걸 겁니다. 말을 타고 쉴 새 없이 달려도 두 달은 걸리는 거리니까요.”

“……지금 수정구로 하는 연락보다 그대들이 더 빨랐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오?”

“아무리 그래도 저희가 수정구보다 빠를 리야 있겠습니까. 행정 처리가 덜 된 거겠지요. 원래 이런 일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절차가 복잡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신전에 연락하고 여기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걸렸기에 그리 자신하는 거요?”

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아마 삼 일 정도 걸린 거 같군요.”

“……아마?”

“실제 운행 시간만 따지면 이틀이 걸렸는데, 출발을 조금 늦은 시간에 해서 애매하게 하루를 거쳤다 보니 그리 말씀드린 겁니다.”

“……결국 말로도 두 달은 걸릴 거리를 단 이틀 만에 주파했다는 거군.”

고렌조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금 그걸 믿으라는 건가?”

“안 믿으셔도 별로 상관은 없습니다만.”

나는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일부러 소형화시키지 않은 스바가 둥둥 떠 있었다.

“적어도 저렇게 하늘을 나는 배를 본 적도 없으실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요.”

이번에 대답한 건 뭔가 패기 넘치게 생긴 남자였다.

엘프들은 외모로 나이 파악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아마 장로 중에 제일 어린 갈라드리엘일 거다. 굳이 코드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백 살 넘게 먹은 노인이 저렇게 생기 넘치는 표정을 하는 건 말도 안 되니까. 150살을 젊다고 표현하는 것도 뭐하긴 하지만.

그는 천진한 눈을 하고 말을 이었다.

“적어도 저는 처음 봅니다. 이곳은 밖의 소식이 조금 늦는 편이거든요. 혹시 저도 밖에 나간다면 그런 배를 하나 구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유적지에서 나온 대륙에 하나뿐인 보물인 데다가, 저도 원주인에게 대여받은 것뿐이니까요.”

“저런, 아쉽게 되었군요.”

말뿐이 아닌지 표정이 시무룩하다. 아마 뛰어난 재능으로 젊은 나이에 장로 자리까지 올랐지만, 반대로 세상 경험은 전무하다는 설정이었을 거다.

150살이나 먹은 노인이어도 저렇게 아이 같은 반응을 하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란 소리다.

나는 그를 일별하고 가장 멀리 앉아 있는 중년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4 장로 고렌조나 7 장로 갈라드리엘. 그들은 장로들 중에서 가장 말 많은 자들이긴 하나, 정작 가진 실권은 가장 적은 인물들이다.

고렌조는 꼰대 같은 소리로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고, 갈라드리엘은 장로직에 오른 지 5년이 채 안 된 신입이어서다.

실세는 저 중년인, 제1 장로 두일란이다. 그 혼자 가진 영향력이 다른 장로 셋과 맞먹을 정도니까. 사실상 그가 장로회를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지.

그 두일란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마주 봤다.

“내게 묻고 싶은 것이라도 있나?”

“제가 묻고 싶은 게 있다기보다는 장로님이 저희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성녀 후보란 말이 사실인가에 대해서 말이군.”

“그렇습니다.”

하늘을 나는 배고 뭐고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갑자기 나타난 우리의 신원보증 아니겠는가. 한데 지금까지 물어보는 엘프가 하나 없다.

나머지야 스바를 보고 놀라서라 쳐도, 두일란은 그런 인물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당돌하게 물어오는 나를 덤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을 필요가 없으니 묻지 않는 것이다.”

“물을 필요가 없다니요?”

“이미 정체 확인이 끝났다는 거지.”

“그럼 혹시 제가 누군지도 아십니까?”

내 말에 두일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튼의 성자라 불리는 리안이겠지. 저쪽의 신관은 키탄교의 아리나겠고.”

옆에서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아리나가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나야 꽤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설마 본인 이름까지 알고 있을 거라곤 예상 못 한 거겠지.

하지만 다른 장로들은 그런 모습이 익숙한지 표정의 변화가 없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먼 곳의 식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은 그대론가 보네. 제약도 많고 탈도 많은 기술이지만, 이럴 땐 만능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한 번 떠볼 만한 가치는 있었네. 저 능력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대응이 달라질 테니까.

“물론 저 신관이 정말 성녀 후보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추후 수정구를 통해 확인 작업을 마칠 것이다. 하나, 지금 당장은 그럴 필요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뿐이지.”

천 살 가까이 먹은 양반이 유연하기도 하지.

나는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저희도 무작정 신뢰해 달라 요청할 생각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이번엔 정말 중요한 안건을 물을 차례군요.”

지적으로 보이는 안경 쓴 남자. 분명 엘프들 이성 담당인 5 장로 안드라스일 거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신관이 진짜 키탄의 성녀 후보라고 칩시다. 하지만 그 인간들의 주신이 우리 엘프들에게 당신들을 왜 보낸단 말입니까?”

날카로운 질문이다.

현재 인간과 이종족들의 사이가 그닥 좋지 않기는 하나, 사실 그건 언제나 그래 왔던 일이다.

오히려 지금은 대륙 역사상 가장 차별이나 배척이 적은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야 악의 제국을 해치우기 위해 종족 구분 없이 한 번 다 같이 뭉쳤었으니까.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지.

그러나 역시 문제는 그 정도론 충분치 않다는 거다.

옆에서 뒤지든 말든 알아서 해결하라 하는 걸 동맹이라고 부를 순 없지 않나.

반 불구 상태의 제국 상대론 그 정도로 충분했을지 몰라도, 앞으로 일어날 일에선 어림도 없다.

절대적이며 적극적인 협력. 인간과 이종족들 사이에는 그런 게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연합의 수장 격인 엘프들의 호감을 이끌어 낸다는 건 그에 다가가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지.

나는 안드라스의 날카로운 안광을 마주 봤다.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도움, 말입니까?”

예상치 못한 말이었던 듯 안드라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되물었다.

“저희는 딱히 인간종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없습니다만.”

“글쎄요. 지금 당장 시급한 문제가 하나 있을 텐데요.”

빙긋 웃으며 회의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의자에 있는 장로들과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는 위치다.

“예를 들면…… 그래, 세계수가 죽어 가고 있다든지요.”

“뭣……!”

고렌조가 기겁한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종의 기밀 사항을 네놈이 대체 어떻게 아는 것이냐!”

형식상으로나마 하던 존댓말도 사라져 버렸다. 원래 성격이 저렇긴 하지만. 아마 우리 등장 방법이 하도 특이해서 여태 조심하고 있던 것뿐이었겠지.

나는 그를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키탄 님의 명으로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분이 그 정도 일도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지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만.”

두일란이 놀람 하나 없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는 눈빛만으로 고렌조를 진정시키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확실히 세계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기는 하지. 허나…….”

두일란의 눈초리가 약간 서늘하게 변했다.

“그대들이 거기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지는 상상이 가지 않는군. 우리가 수백 년 동안 정확한 원인도 밝히지 못한 문제를 말이야.”

“아, 원인이라면 간단합니다.”

“……간단해?”

“예. 당장 증명도 가능하지요.”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안드라스가 흥미 돋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증명한다는 말입니까? 저희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세계수를 갈라서 안을 보는 것뿐이었습니다만.”

“뭐, 저라고 그리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설마.”

고렌조가 뭔가를 예감한 듯 경악한 얼굴로 나에게 삿대질했다.

하여간 세계수 관련해서는 머리가 잘 돌아간단 말이야. 누가 세계수탕스 아니랄까 봐.

“맞습니다.”

나는 그런 고렌조의 시선을 마주 보면서 딱딱한 재질의 물건 하나를 꺼내 옆에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들어오기 직전에 세계수를 살짝 열어 본 참이죠. 이건 그 속살입니다.”

두일란과 안드라스를 포함한 경악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세상 태평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 * *

“……이거 진짜예요?”

절그럭.

아리나가 두 손에 묶인 수갑을 들어 올리며 황망히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는 지금 막 감옥에 수감된 참이다. 죄목은 세계수 훼손.

아마 이번에 새로 막 만들어 낸 법규일 거다. 원래는 굳이 법제화하지 않더라도 엘프가 세계수에 상처 입히는 일이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인간으로 치면 면전에서 상대 부모님한테 죽빵 날리는 거랑 다름없다니까요? 아니, 엘프들 하는 거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 심할걸요?”

“나도 어차피 쟤들 설득하려면 다른 방법 없다고 했잖아. 쟤네 부모님 죽빵을 날려서라도 충치가 생겼다는 걸 보여 줘야 우리 말을 듣는 척이라도 했을 거라고.”

“좀 더 온건적으로 나갈 수도 있었잖아요.”

“어떻게? 그쪽 부모님 이가 썩은 것 같으니 제가 얼굴 한 방 날려서 확인시켜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그건 또 아니고요.”

아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감옥 벽에 등을 기댔다.

“그보다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역시 마을에서 쫓겨나고 저는 성녀 후보직 박탈당하는 거예요?”

“그건 너무 희망찬 처사 아닐까.”

“……그러면요?”

나는 거치적거리는 수갑을 힐끗 보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말대로 쟤네한테는 세계수가 부모보다 더한 존재잖아. 외교적 문제고 뭐고 훼까닥 돌아 버려서 사형선고 날릴 수도 있지. 뭐 따지고 보면 우리는 밀입국자인 데다 정체도 불분명하니 나중에 성녀 후보인 거 몰랐다 변명할 수도 있고.”

“그리 잘 아시면서 잘도 이런 일을 벌이셨네요…….”

아리나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안 님이 그렇게 순교자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키탄 님이 동행을 잘못 선택했나 싶기도 하고.”

“순교는 무슨. 내가 그런 짓 할 사람으로 보여?”

“그럼요?”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랬던 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그냥 편히 쉬고 있어라.”

“무슨 생각은 만날 있대.”

아리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걸 못 들은 체하며 감옥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리나도 딱히 더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멀리서 또각또각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엘프 간수였다. 그는 철장 앞까지 다가오고는 경멸하는 눈으로 우리를 훑어봤다.

철컹.

“밖으로 나와라. 두일란 님이 부르신다.”

나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기 썩 좋은 공간은 아니었던지 아리나가 먼저 빠르게 밖으로 나섰다.

“혹시 두일란 님 뵈러 간다 해 놓고 이대로 사형장에 끌려간다든가 하는 건 아니죠?”

“천박하게 말 걸지 마라 인간 계집. 지금 당장 네놈들을 베어 버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참이니까.”

아리나가 입을 떡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 내가 천박해요? 하고 묻는 듯한 눈빛이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아리나는 그런 나를 흘겨보더니 간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형장 끌고 가는 거 아니면 이것 먼저 좀 풀어 줘요. 높은 분 뵈러 가는데 이런 거 달고 갈 수는 없잖아.”

간수는 정말 싫다는 듯 아리나의 손에 묶인 수갑을 노려봤다. 그래도 미리 명령이 내려와 있었는지 생각보다 순순히 열쇠를 이용해 녀석의 자물쇠를 풀어 줬다.

깡!

아리나 수갑이 땅에 떨어지고, 간수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를 보며 손사래 쳤다.

“저는 됐습니다. 그냥 혼자 풀면 되니까.”

“……아무래도 그 수갑이 뭔지 모르는 모양이군. 네놈이 3급 기사인 건 알고 있다만, 그건 착용자의 마력을 차단하는…….”

끼기긱.

간수가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다. 내가 조심스런 손길로 수갑을 살짝 구부려 풀어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그만 두일란 님을 만나 뵈러 가 보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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