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44)
엘프는 보통 세계수의 자식들이라 불린다.
나이가 수백을 넘긴 엘프 대부분은 실제로 세계수의 나뭇잎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엘프는 식물의 속성, 인간의 습성을 모두 띠는 식물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광합성도 가능하고 식물의 감정 호르몬도 읽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리 틀린 얘기도 아니리라.
문제는 현재에 와서 그 세계수가 출산의 기능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거다.
바로 벨리아 대륙의 풍토가 세계수와 잘 맞지 않은 탓인데, 자연히 후대에 이를수록 세계수의 나뭇잎에서 탄생하는 비율보다 유성생식으로 태어나는 엘프들의 수가 크게 늘었다.
단순히 나이 차이만 나더라도 세대갈등이 일어나는 판인데, 두고 있는 부모가 아예 다른 종이라서야 말할 것도 없다.
덕분에 엘프들의 사회는 최근 세계수에게서 태어난 노인세대와 엘프 부모를 둔 청년세대의 충돌로 큰 몸살을 앓는 중이었다.
“100살도 안 먹은 어린놈들이 대체 뭘 알겠습니까?”
엘프 종족의 수도 엘리시움.
그곳의 세계수 가장 높은 곳에 붙어 있는 집안에서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제4 장로 고렌조 의원이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500년 전 해방 전쟁도 못 겪어 본 얼라들이란 말입니다. 듣자 하니 그놈들이 최근에는 차라는 것까지 우려먹는다 하더군요. 제 조상이 세계수라는 건 벌써 잊어버린 건지…….”
“그 말은 자칫하면 차별 발언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당장 철회해 주시죠.”
제7 장로. 150살이라는 엘프들치곤 상당히 젊은 나이로 직위에 오른 갈라드리엘이 발끈한 얼굴로 반박했다.
“저희가 채식을 하느냐 육식을 하느냐는 단지 개인 기호의 문제일 뿐이지, 의무의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반은 세계수로부터 이루어졌기 때문에 식물을 먹어선 안 된다는 논리라면, 나머지 절반은 육체로 이루어진 저희는 육식도 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 아닙니까?”
“아, 그러고 보니 7장로는 세계수와 아무 관계가 없지. 그렇다면 이해가 힘들 수도 있소. 이 자연스런 유대를 느낄 방법이 없을 테니까.”
“뭐요?!”
“자자, 진정들 하시게.”
하얗게 센 머리를 한 제2 장로 렐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분위기 수습에 나섰다.
“우리가 대책을 마련하자고 모인 거지, 싸우자고 모인 건 아니지 않나. 우선 문제를 착각해서는 안 되는 일일세. 이보게, 자네도 한마디 해 보지.”
“그 말은 지당히 옳습니다만…….”
5 장로, 안드라스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미간을 짓눌렀다.
“이렇게 모인다고 뭔가 얘기할 거리가 있느냐가 문제지요. 세계수를 되살리겠다는 의도는 좋은데, 이번이 벌써 342회째에 달하는 세계수 재건 회의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뭔가 뾰족한 대책이 하나라도 나온 적 있습니까? 이제는 이런 무의미한 회의도 그만둬야 하는 시점이 온 것은 아닐지…….”
“자네! 그럼 지금 세계수가 죽도록 내버려 두기라도 하자는 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일단 마땅한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만이라도…….”
“그러니까 그 대책을 찾자고 이렇게 모이는 것 아닌가!”
“이렇게 모여 봤자 그 대책이 뿅 하고 튀어나올 일은 없다고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이 정말!”
엘프 중에서 가장 현명한 자들만 모인다는 장로회가 개판이 되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주먹만 안 들었지 시장판에서나 들릴 법한 고성이 오가며 난리판이 되어 버린 거다.
도무지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정작 그 사태를 진정시켜야 할 제1 장로. 두일란은 덤덤한 얼굴로 그걸 지켜볼 뿐이었다.
‘다들 답답할 만도 하지.’
회의 개최를 지지하는 쪽이든, 더 이상의 회의는 무의미하다 주장하는 쪽이든. 그 어느 누구도 세계수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의견에는 반대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설령 세계수에게서 직접 태어나지 않았다 해도 모든 엘프들은 그에게 부모를 대하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저렇게 싸우고 있는 건 본인들 무능력에 관한 한탄이지, 정말로 상대를 탓하기 위한 건 아니라는 소리다.
소요가 조금 진정되고 나서야 두일란이 차분하게 나섰다.
“어느 소리든 맞는 의견이다. 하나, 일견 이 회의가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다른 방도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
1 장로가 입을 열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수백 년 넘게 그들을 이끌어 온 두일란의 세월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장로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얘기하기도 힘들다. 적어도 다른 엘프들에게 세계수를 살리려 노력하고 있다는 의지 정도는 보여 줄 수 있으니까.”
“……계속해서 의지만 보여 주고 있다는 게 문제 아닙니까. 마땅한 해결 방안 없이요.”
7 장로, 갈라드리엘이 눈치를 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퉁퉁거렸다. 4 장로 고렌조가 기겁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150살밖에 안 먹은 어린놈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같은 장로 자리에 있다고 1 장로님이 물로 보이나?”
“제가 뭐 틀린 말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놈의 나이 부심이나 좀 그만 부리시지요. 타종족들이 보면 웃습니다.”
“그만.”
또다시 끝 모를 싸움의 기미가 보이자 두일란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입을 다문 7 장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 같은 젊은이들의 눈으로 볼 때 이런 것이 쓸모없는 허례허식처럼 느껴진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하나, 그 허례허식조차도 결국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지도부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건 단순히 무의미한 것만으로 취급할 수 없는 법이야. 설마 세계수는 결국 죽어 버릴 겁니다, 이런 식으로 공표라도 하자는 것은 아니겠지?”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엘프 사회는 반쯤 붕괴하고 말 거다.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개인주의가 발달한 그들을 묶어 두고 있던 건 세계수라는 공통분모 하나뿐이었으니까.
7 장로 갈라드리엘이 한 걸음 물러난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이 무의미하다는 회의에 의미가 부여됐다고 여겨도 되겠군. 내 말에 동의하나?”
“……예.”
“그럼 이제는 회의 내용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지.”
단숨에 분위기를 가져온 두일란이 이번엔 5 장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각지의 토양에 관한 조사 결과는 나왔나?”
“예. 전 대륙 대부분 산과 숲은 전부 포함됐을 겁니다.”
안드라스가 벗었던 안경을 다시 착용하며 말을 이었다.
“그 어디에도 지금 세계수가 있는 이 땅보다 조건이 좋은 곳은 없었다고만 말해 두지요. 애초에 자리 잡을 때부터 그런 장소를 탐색해 정했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입니다만.”
“마력이 흐르는 영맥도 포함한 조사겠지?”
“당연합니다. 가장 중요한 걸 빠트릴 순 없죠.”
“이번에도 원인을 알아낼 순 없었다는 소리군.”
“예.”
툭. 안드라스가 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 수백 장을 꺼내 놓으며 대답했다.
“사실 여건만 보면 세계수가 도대체 왜 시들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아무리 세계수가 영양분을 많이 잡아먹는다곤 하나, 이곳은 대륙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니까요. 저희가 아는 상식대로라면 세계수 네다섯 그루는 더 있어도 잘 자라야 정상이지요.”
“그렇다는 것은?”
“저희가 모르는 상식이 있다는 겁니다.”
안드라스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미간을 찡그렸다.
“영양분이나 마력과는 전혀 다른 에너지가 공급돼야 하는 걸 수도, 혹은 단순히 세계수의 수명이 다한 걸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세계수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위치를 옮겨 심은 것도 500년 전이 처음이고요.”
세계수는 전 대륙에 하나뿐인 나무다. 엘프들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고. 그렇게 신성시까지 되는 세계수를 연구한다는 건 그만큼 많은 제약과 조건이 붙을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허가를 내 주신다면 제가 조사에 들어가 볼 수는 있습니다만…….”
“미친 소리!”
4 장로, 고렌조 의원이 책상을 탁 치며 들고일어났다. 안드라스는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감히 세계수 속을 열어 보자는 정신 나간 발언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육식이 출신이래도 그렇지…….”
육식이. 세계수가 아니라 육욕 덕분에 탄생했다는 젊은 세대들을 향한 멸칭이다.
7 장로 갈라드리엘이 발끈해 소리치려 했지만, 두일란이 입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4 장로. 회의 자리다. 발언을 조심하라.”
두일란이 싸늘한 눈으로 고렌조를 훑어봤다. 그에 찔끔한 고렌조가 곧바로 사과했다. 정작 그 대상은 갈라드리엘이나 안드라스가 아닌 두일란을 향해서였지만.
“육식이니 뭐니 어떻게 생각하시든 아무 상관없습니다만…….”
안드라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결국 누군가 하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할 게 아니라면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안 된다!”
“그럼 그만 들어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솔직히 700살이면 슬슬 삶이 지겨워질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이놈이 근데!”
가까스로 본의에 돌아온 것도 의미가 없게 회의는 다시 싸움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두일란도 이번에는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차피 억지로 끝낸다고 건실한 대화가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아서다.
‘오늘도 수확은 없는 건가.’
거의 수백 년을 끌어 온 일인 만큼 간단하게 결론이 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래 놓고도 여태까지 진전이란 게 없다는 거다.
‘변환점을 줘야 할 때가 오긴 했다.’
사실 두일란은 내심 5 장로, 안드라스의 말에 상당 부분 동의하고 있는 상태였다. 바로 세계수 안을 파헤쳐 봐야 한다는 의견 말이다. 어차피 이제 남은 방법은 사실상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런데도 지금까지 제자리걸음인 이유는 간단했다.
‘반발이 너무 거세.’
단순히 4 장로 같은 나이든 엘프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갈라드리엘 같은 젊은 나이의 엘프들도 세계수를 갈라 보자고 하면 ‘그건 좀…….’ 하고 빼는 것이다.
안드라스가 특이한 거지, 늙은 세대들과 사사건건 충돌하는 젊은 엘프들마저도 그런 과격한 일엔 동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다.
‘세계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확연한 근거라도 내놓지 못하는 한 이 문제가 여기서 더 진전될 가능성은 없겠지.’
그리고 그를 증명하기 위해선 세계수를 갈라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명확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세계수 가르는 걸 반대하기 때문에 안을 볼 수 없는 건데, 안을 보려면 세계수를 갈라야 한다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결국 두일란이 답답한 마음을 겉으로 티 내지 않고 회의를 파하려 할 때였다.
“잠깐만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6 장로가 하늘색 머리카락을 팔랑거리며 끼어들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한 홍일점의 말에 다른 장로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발언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펠리나, 무슨 일이라도 있나?”
“지금 이 자리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어요.”
그 말에 고렌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엘프가 올라오고 있다고? 여기는 장로들 말고는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저는 엘프가 올라오고 있다고 얘기하지 않았어요.”
펠리나가 멍한 시선을 밖으로 향했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지.”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세상에 누가 세계수 꼭대기까지 날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는 허튼 소리 내뱉는 걸 싫어해요.”
그 말을 끝으로 펠리나가 눈을 감아 버렸다. 더는 입을 열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별로 드문 일도 아니라 고렌조는 혀를 살짝 차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번에는 6 장로가 뭔가를 착각한 것 같군요. 높이는 둘째 치고, 여기 경비가 얼마나 삼엄한지 알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글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다가오고 있는 건 사실이군.”
두일란까지 그렇게 말하자 고렌조가 손사래를 쳤다.
“1 장로님도 오래 사시니 유머 감각이 느셨군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다 하시고.”
“못 믿겠으면 창밖을 봐라.”
“……뭐 1 장로님 말씀이니 한 번 어울려는 드리겠습니다만, 밖에 대체 있긴 뭐가 있다는 건지…….”
그렇게 말하며 고렌조가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깥에 뭔가 떠 있을 거라는 상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야 세계수 꼭대기까지 직선으로 다가올 수 있는 지성체 같은 건 대륙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오랜만에 들어 보는 두일란의 농담. 단순히 그리 생각했을 뿐이다.
“…….”
그렇기에 고렌조는 창밖을 보았을 때 정말로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바다에 떠 있어도 놀랄 만한 크기의 배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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