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43)
용건을 마친 후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저것 챙길 것도 있고, 아직 집안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 했으니까.
도착하니 때마침 저녁.
하나하나 일일이 찾아가기라도 해야 하나 조금 걱정했는데, 나 없는 동안 식사는 모여서 한다는 규칙이라도 생겼나 보다. 밖에서 코드를 보니 모두 식당에 모여 있었다.
나는 잠깐 심호흡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리안?”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건 타냐였다. 내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건지 놀라서 눈이 댕그랗다. 어제 새벽엔 조용히 혼자 들어왔으니 모르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나는 그쪽을 향해 잠시 어깨를 으쓱이고 당당하게 말했다.
“전부 오랜만이에요. 잘들 지내셨어요?”
“잘 지냈다기보단 별일 없이 지내기는 했는데…….”
라이놀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잘 지낸 거야? 소문이 워낙 많이 들어와서 대충 소식 알긴 하는데.”
애초에 단테가 나라는 걸 알고 있던 만큼 내가 어디서 뭘 하다 온 건지 대충 듣긴 했나 보다. 아직 바포메트에 관한 얘기까지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쪽은 아르곤에서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 둬서 그런가. 아무리 소문 퍼지는 게 느린 벨리아 대륙이래도 알려지는 게 조금 늦다. 워낙 큰 사건이라 어차피 못 막을 텐데 헛고생들은.
“저도 뭐 나름 보람차게 지내긴 했어요. 최근 악몽을 좀 꾸기는 하지만.”
“악몽? 노숙하면서도 잘 자는 네가?”
“그럴 만한 일이 조금 있어서.”
대충 둘러댄 후 준비해 온 선물을 하나씩 돌렸다. 아리나에게 줬던 것과 같은 찻잎이다.
다들 자주 접해 보지 못한 거라 그런지 생각보다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미르와 서율의 반응이 격렬했다. 고향 생각이 난다나.
어쨌든 예상보다 탓하는 분위기는 아니라 다행이다.
나도 이제 어엿한 어른 취급 받는 나이가 된 만큼, 다른 사람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웃기긴 하겠지만.
타냐의 힐끗거리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티타임을 가지고 있을 때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는 미리 말씀드리고 갈게요. 아무래도 당분간 어딜 좀 다녀와야 할 거 같아요.”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평온한 얼굴로 차를 음미하고 있던 다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나 역시 차를 한 모금 넘긴 뒤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도 원래 그럴 예정은 없었는데, 키탄교 관련된 걸로 할 일이 생겨서요.”
“……혹시 그거 성녀 관련된 일이야?”
어떻게 대답할까 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딱히 아리나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아니니까. 다린은 신전과 관련되고 싶지 않은지 다행히 뭔가 더 물어 오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어른들의 사정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나이대 들이라 그런가. 성녀 후보가 누군지 농담 삼아 한 번쯤 물어볼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계속해서 힐끗대는 타냐의 시선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도움은 필요 없냐는 라이놀과 서율에게 마음만 받겠다 답하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혹시 시간 괜찮다면 나와 대화 좀 나눌 수 있겠나?”
나가려던 발길을 멈추고 목소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리카르도가 덤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조금 놀란 듯한 기색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3급에 오른 걸 눈치채서 그런가?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저런 반응이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발전 속도기는 하지. 어쩌면 그 비결에 대해서 물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황녀 바라기인 만큼 타냐에 관한 얘기를 하려는 걸 수도 있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응접실로 갈까요?”
“그쪽이 가장 편하긴 하더군.”
리카르도가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응접실은 식당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도착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안쪽 소파에 앉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3급에 오른 비법이라도 물어보려는 거면 딱히 드릴 수 있는 말 없어요. 저만 가지고 있는 특성이 많이 영향을 끼친지라.”
“그 방법도 궁금하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대화를 나누자 한 건 아니네.”
“그럼 타냐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황녀님에 관한 것은 자네가 알아서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그 문제로 더 이상 뭐라 얘기할 생각이 없어.”
예상했던 두 가지가 모두 빗나갔다.
그제야 나는 조금 당황스러운 눈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봤다. 타냐랑 3급 얘기가 아니면 나랑 할 대화가 없을 텐데?
리카르도는 그런 내 시선을 받더니, 응접실 들어올 때부터 짓고 있던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자네, 혹시 자리를 비운 사이 검술을 배운 적 있나?”
“……검술이요?”
“그래. 검술.”
짐작도 못 하고 있던 질문이라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 짐작하고 있었다 해도 금방 대답할 순 없었을 거다.
배우려고 시도한 건 맞는데, 내가 그걸 익히는 데 성공했다는 건 아니니까.
어물쩍 넘어가려 해도 저 시선을 보니 그러긴 그른 것 같다. 결국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용히 내뱉었다.
“정확히는 가르침을 받은 건 맞습니다만…….”
“만?”
“제가 익히는 데 실패했습니다.”
“……실패해?”
리카르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만났을 당시부터 포함해서 저렇게 놀라는 건 처음 본다.
사람 실패하는 게 그렇게까지 신기할 일인가.
내가 퉁명스레 보든 말든 리카르도는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제가 뭔가 착각하고 있다고요?”
“그래. 자네가 익힌 검술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게 실패한 결과물이라면 나는 내일 당장 검을 내려놓을 걸세.”
“…….”
표현이 꽤 과격하다. 적어도 평생 검과 함께한 장본인이 하기에는 말이다. 나는 황당한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아니, 제가 검 쓰는 모습을 보신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무슨 품평을 해요?”
“내 경지쯤 되면 상대가 검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 얼추 판단이 가능하다고만 해 두지. 스승이 왜 알려 주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는 실패한 게 아니야.”
“그럼 제가 성공한 거란 말입니까?”
“그건 또 애매하군.”
“…….”
이건 뭐 밀당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살짝 신경질 부리려는 찰나, 리카르도가 먼저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익히는 것 자체는 성공했지만, 아직 숙련도가 부족하다 표현하는 편이 맞겠네. 어쩌면 그래서 자네 스승이 자네에게 얘기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 자만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말이야.”
“……저희 스승님이 절대 그렇게 섬세한 성격은 아니신데요.”
“그러면 나도 이유는 모르겠고.”
리카르도가 그런 건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솔직히 아직까지 내가 성공했다고 생각은 안 하지만, 내심 저 말을 믿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진짜 아이언 검술 익혀 보려고 고생은 오질나게도 했으니까. 얘기하는 당사자가 제국에서 가장 강했던 기사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생기기도 하고.
“하지만 저는 스승님이 했던 일 같은 건 전혀 흉내도 못 내는데요.”
“자네 스승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네만…….”
리카르도는 덤덤한 얼굴로 나를 직시했다.
“만약 기회가 온다면 자네도 얼마든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 걸세. 숙련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야.”
“…….”
정말 그러면 좋기야 하겠다. 지금의 나로서는 대체 공간을 벤다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 짐작도 안 가지만.
그 뒤로 나는 리카르도의 ‘스승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충 얼버무린 후, 난감해지기 전에 얼른 응접실을 나갔다.
* * *
“……이게 대체 뭐예요? 왜 배가 육지에 서 있는 거죠?”
레이튼 밖 외곽. 아리나가 스바를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통 이해가 안 가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 하다. 아직 하늘 날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일단 타 봐. 시간 지체할 생각 없으니까.”
“시간 지체할 생각 없다는 분이 대체 배는 왜 여기까지 끌고 온 건데요? 무슨 돈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내가 사람들을 시켜 바다에서 끌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비슷한 짓 하던 독재자가 몇 있기는 했지. 권력 과시용으로.
“일단 타 보면 알 거야.”
“……대체 뭘 안다는 건지.”
아리나가 의심스레 중얼거리면서도 순순히 사다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쳐다보지 말라는 듯 나를 힐끗거린다. 나는 그에 어깨를 으쓱이며 점프했다.
툭.
곧이어 내 몸은 이미 갑판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배의 높이를 단숨에 뛰어 버린 거다.
이제 아래에 위치한 아리나를 향해 말했다.
“빨리 안 올라오면 먼저 출발한다.”
아리나는 황당한 눈으로 내 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궁시렁거리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키탄 신도가 아니라 해도 성녀 후보 상대로 존중이 없다는 둥, 오랫동안 어디 갔다 오더니 머리를 다친 거 아닌가 하는 둥, 주로 나를 향한 비난들이다.
저거 곧 배가 하늘을 날면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하네.
내심 그런 기대를 하며 있으니까 어느새 아리나가 갑판에 도착했다.
“올라오래서 올라왔는데, 이제 뭐 어쩔 건데요? 같이 노라도 저으면 되나요?”
“아쉽게도 이 배에는 노가 없어. 바다를 항해하는 게 아니거든.”
“배가 바다를 항해하지 않으면 어딜 항해해요? 다리라도 달려서 육지를 걸어 다니기라도 하나요?”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 했다 생각하는지 표정이 살짝 퉁명스럽다. 나는 다시 한번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하늘.”
“……네?”
“하늘로 간다고.”
아리나가 잠깐 침묵하더니 안쓰럽단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혹시 치료가 필요하신 거면 말씀을 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리안 님 상대로 바가지라도 씌우겠어요?”
“머리 다친 거 아니야. 진짜 이 배는 하늘을 난다고.”
“얼마 전 단테라는 사람이 그런 배를 끌고 다닌다는 헛소문이 돈 건 아는데요, 소문도 어느 정도 사람이 믿을 만한 걸 내야지 그런 소릴 하면 도대체 누가…… 어어?”
아리나가 말을 하다 말고 몸을 휘청였다. 그냥 보여 주는 편이 빠르겠다 판단한 내가 곧바로 스바를 띄워 버렸기 때문이다. 녀석은 황망한 얼굴을 하고 아래쪽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나는 그 모습을 일별하고 슬쩍 웃었다.
타는 사람마다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데, 이상하게 질리지가 않는단 말이야.
장난은 이 정도로 충분한 거 같아서 아리나를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스바.”
―네. 목적지는 정하셨습니까?
“응.”
나는 말을 마치며 북쪽을 바라보았다.
“겔리안 연합으로 가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