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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42화 (142/225)

너의 코드가 보여 (142)

걔가 지금 여기 올 여유가 없을 텐데?

분명 성녀 후보가 여기 있다며 성기사가 도착한 게 일주일이 채 안 됐다고 들었다.

본인도 아직 정신없을 테지만, 신전에서는 거의 이성을 잃기 직전일 거다. 성녀보다는 성녀가 속해 있던 신전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 훨씬 많으니까.

내가 아리나랑 개인적 친분이 조금 있긴 하나, 녀석의 개인적 감정으로 사사로이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소리다.

설마 그냥 기간만 당겨진 것이 아니라 성녀 후보 자체가 바뀌어 버린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세워 뒀던 계획이 전부 물거품이 된다. 그것들 중에는 아리나가 성녀라는 전제 조건이 붙은 것이 꽤 되니까.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작게 심호흡했다.

그래. 여기서 이것저것 따질 거 없이 일단 가서 한번 떠보자. 성녀라는 건 기밀 사항인 만큼 알려 줄 수 없겠지만, 대충 눈치라도 살피면 되는 거 아닌가. 그쪽에는 나름 자신도 있고.

직원에게 수고했다며 골드를 하나 쥐여 주고 아래층 응접실로 내려갔다. 혹시나 직원이 착각한 거 아닌가 싶어 밖에서 코드를 보니 정말로 안에는 아리나의 것이 둥둥 떠 있었다.

영악한 게 이럴 때만 미련하게 굴기는.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라고 인사하는 게 맞으려나?”

“아무렇게나 해. 그런 거 언제 신경 썼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아리나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신경 안 썼는데, 이제는 신경 좀 쓰려고요. 아는 사람 중 하나가 시간 감각이 없는 건지 자꾸 말도 없이 사라지고 그래서 제가 상기 좀 시켜 줘야겠더라고요.”

“…….”

아니, 웃는 게 아닌가?

표정은 웃는 게 맞는데, 말에는 콕콕 가시가 박혀 있다. 뭔가 사과부터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긴데.

나는 혼원력을 이용해 찬장의 찻잔을 가져왔다. 그리고 리베라에게 부탁해 안에다 따듯한 물을 채웠다.

“미안해. 이거 아르곤에서 가져온 찻잎인데 좀 마셔 볼래? 선물용으로 한 통 가져왔어. 채식 싫어하는 건 알지만, 이건 좀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참고로 최고급품이야.”

내 말에 아리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한테 주려고 가져왔다고요?”

“응.”

“……아, 진짜. 그렇게 바로 사과해 버리면 제가 화도 제대로 못 내겠잖아요.”

아리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렇게 투덜거리더니 건네받은 잔을 조심스레 넘겼다.

“음……. 좋아요. 사실 차라는 건 처음 먹어 보지만, 왠지 앞으로 자주 먹을 것 같은 기분이네요. 제 입맛에 맞는 식물 찾기가 쉬운 게 아닌데.”

그렇겠지. 엘프의 채식 불가 속성은 직접 입으로 섭취하지 않을 때는 꽤 완화되니까.

순혈 엘프 중에서도 차를 즐기는 경우가 더러 있는 만큼, 혼혈인 쟤한테는 거부감이 그보다 훨씬 덜할 거다. 실제로 게임 내에서 즐겨 먹기도 했었고.

어쨌든 준비해 두길 잘했다. 그냥 지나가다 눈에 띄어서 샀던 건데, 이제 열 통만 더 처리하면 되겠네.

아리나는 차가 정말로 마음에 들은 듯 금세 잔을 비워 버렸다. 그리곤 잠시 눈을 감고 음미하더니, 이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럼 일단은 이걸로 봐줄게요. 사실 리안 님이 저한테 그런 거 보고할 의무가 없기도 하고. 그런데 아르곤에는 왜 갔다 온 건데요?”

“그냥 상회 일이 조금 있었어. 기밀 사항이라 자세히는 말 못 해 줘.”

“기밀. 그러면 어쩔 수 없죠.”

기분 탓인가, 기밀이라는 단어에 뭔가 힘이 실린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지금 성녀 후보에 관해 의식하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리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킨 뒤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 신전에서 성녀 후보 나왔다며? 그거 혹시 누군지 알아?”

“아, 그거 저예요.”

“아, 그거 너구…… 뭐?”

옆집 복돌이가 새끼라도 깠다는 어투라 알아듣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뭐지. 단순히 떠보려는 의도였는데.

“……네가 성녀라고?”

“정확히는 후보요. 놀릴 생각은 마세요. 저도 별로 안 어울리는 거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거 그렇게 막 알려 줘도 되는 거냐?”

“뭐 어때요. 저희 사인데.”

저희가 어떤 사인데요.

내가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아리나가 배시시 웃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어차피 신전에 전부 허락 맡고 온 거니까. 여태 회의 들어간 것도 전부 그 일 때문이죠?”

“그렇긴 한데…….”

“그럼 제가 고민거리 하나 줄여 준 거네요. 감사 인사 해도 좋아요. 이왕이면 전에 갔던 디저트 가게에서요.”

“배달은 시켜 줄게.”

순간 그때 헤어지며 했던 말이 떠올라 살짝 퉁명스레 답했다. 아직도 진심이었는지 농담이었는지 헷갈리는 그 발언 말이다.

혹시 일부러 상기시키려고 꺼낸 얘긴가?

의심의 눈으로 쳐다봤지만,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선 어떠한 기색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같은 표정이라 해야 하나.

그래. 일단 이 화제는 넘어가자. 솔직히 어느 쪽이든 대응하기 곤란하기도 하고.

“성녀 후보라면 이제 임무 받고 떠나는 거지? 아마 그걸 완벽히 마치고 나서야 정식 성녀로 임명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믿는 신도 없으시다는 분이 그런 건 또 꽤 자세히 아시네요.”

“신한테는 별로 관심 없지만, 신전에는 관심이 많으니까. 어찌 됐든 대륙의 중심 세력 중 하나잖아. 그 영향력을 부정할 수는 없지.”

“신전을 그렇게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또 있나 싶기는 하지만…….”

아리나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맞아요. 어제 키탄 님에게 정식 임무 하달받았어요. 저희 신전에서는 시련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하기는 하지만요.”

“그런가…….”

분명 원작대로라면 성기사 몇 이끌고 엘프들의 숲으로 갈 거다. 그리고 아마 그 임무는 바뀌지 않았겠지. 키탄이 아리나를 성녀로 뽑은 데에는 대륙에 극히 드문 엘프 혼혈이라는 점도 있으니까. 인간종과 이종족의 화합을 꾀하는 거다.

원래 스토리보다 2년이나 빠르다 보니 조금 걱정되긴 하는데, 뭐 알아서 잘하겠지. 몰래 한스라도 붙여 두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저 임무라는 거 자체가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에 가까워서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냥 가서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하면 끝이다.

태평히 생각하며 물었다.

“그래서 출발은 언젠데? 얼마 안 남아서 인사라도 하러 온 거야?”

“출발이 얼마 안 남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인사만 하려고 온 거는 또 아니고.”

“그럼 뭐 하려고 왔는데?”

아리나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하고 대답했다.

“그냥 얼굴 한 번 보려고 왔을 수도 있죠. 그보다 임무가 뭔지는 안 물어봐요? 궁금해해 줄 수도 있잖아.”

“어차피 기밀 사항이라 대답 못 해 줄 거 아니야. 외부인한테 유출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외부인이 아닐 수도 있죠.”

“……그게 무슨 소리야?”

순간 어떤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외부인이 아니라는 건 신전 관계자거나 임무 관계자인 경우뿐인데.

아리나는 어느새 다시 타 온 차를 들이켜더니 여상하게 말했다.

“리안 님이 임무에 참가할 수도 있다는 소리예요. 물론 신전 사람도 아니니까 마음에 안 들면 거부할 수는 있지만요.”

“……성녀의 임무에는 신전 사람이거나 그 신의 신도가 아니면 참여 불가능한 걸로 아는데.”

“어디에나 예외 조항은 있죠.”

……설마. 내가 알기로 그런 조항은 딱 한 가지뿐이다.

“맞아요.”

아리나는 그런 내 예상을 확인시켜 주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탄 님께서 리안 님을 직접 지명하셨어요. 엘프들의 숲으로 가서 세계수를 되살려 달라고요.”

* * *

생각이 복잡하다. 마음이 아니라.

신들 중 일부가 나의 존재에 대해서 눈치채고 있을 거라는 건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그동안 워낙 여기저기 쏘다니며 이것저것 벌이기는 했으니까. 특히 바포메트 해치우는 걸 그 관음쟁이 녀석들이 놓쳤을 리가 없다.

문제는 그 정도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주신 키탄이 나를 콕 집어 지명했다는 거지.

성녀에 관련된 임무에 외부인을 끌어들이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상황이다. 그 난이도가 엘프들 만나고 인사하는 것에서 갑자기 세계수를 되살려야 하는 것으로 급상승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안 그래도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게 혹시 신들이 아닌가 조금 의심하고 있던 판인데, 이런 일까지 일어나니 더 이상할 수밖에.

“…….”

침대에서 일어나 바깥을 바라봤다.

밤새 한숨도 못 잤는데, 벌써 해가 중천이다. 그래도 컨디션은 멀쩡하다. 며칠은 꼬박 새워야 조금의 영향이라도 받을 만큼 튼튼한 신체니까.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 하고 미뤄 두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차피 계획 중엔 세계수 되살리는 것도 있었으니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순순히 알겠습니다, 하자니 뭔가 호구 당하는 느낌 들기도 하고.

당연히 신전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으니 어느 정도 보상은 챙겨 주겠지만, 사실 내가 지금 그런 게 아쉬운 입장은 아니지 않나. 그냥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라고 무시해도 된다는 소리다.

“후우…….”

복잡한 것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새삼 머리가 아파 왔다.

자잘한 고민은 지구에 살 때 더 많이 하긴 했는데, 여긴 고민 하나하나가 인생이 걸린 문제다 보니 그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거리가 나오고. 나는 그 중간에 우두커니 서서 상념에 빠졌다. 순간 오랜만에 다시 지구 생각이 나서.

별로 징징거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아직도 때때로 지구의 풍경이 떠오르긴 한다. 특히 남겨 두고 온 가족이나 친구들 모습이.

적어도 돌아갈 희망이라도 있는지 정도는 확인해 놓고 싶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그 힌트를 갖고 있는 건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신 정도밖에 없겠지.

없는 동안 오히려 얼굴이 더 알려졌는지 주위에서 쏠리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신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찾는 건 아리나가 아니라 주교다. 성녀가 될 예정이긴 해도 아직 후보일 뿐인 녀석에게 무슨 권한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니까.

미리 언질이라도 받아 둔 건지 입구를 지키던 성기사들이 나를 보자마자 길을 튼다. 살짝 고개 숙여 화답하고 곧바로 주교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교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파에서 인자한 얼굴의 주교가 방긋 웃으며 나를 맞이해 줬다. 나는 내식대로 인사를 건네며 권유받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정말 오랜만이긴 하군. 항상 감사의 인사를 제대로 못 건넨 것 같아 마음에 걸리던 차인데, 이왕 만난 김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겠소.”

그러더니 성호를 긋는 게 아니라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종교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존중한다는 의미다. 나는 그 부담스러운 인사에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감사 인사는 질릴 정도로 많이 들었으니 그만하셔도 됩니다. 아니, 오히려 그만해 주십쇼.”

“당사자가 그러니 그래야겠군. 나이 먹고 주책 떤다는 소리 안 들으려면 말이야.”

주교가 너스레를 떨더니 말을 이었다.

“그보다, 설마 이 노인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역시 그 임무 때문이요?”

“그렇습니다. 빨리 답변 드리는 게 피차 편할 것 같아서요.”

“그렇긴 하지. 우리도 일단 거절을 받아야 대체 인력을 빨리 편성할 수 있으니 말이요.”

아무래도 주교는 내가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하긴, 현실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내가 도움을 줄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키탄교와 그리 좋은 인연으로만 묶인 것도 아니고, 내가 가진 자본이나 위상도 그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굳이 신전에 굽실거릴 입장은 아니라는 소리지.

하지만 그건 현실적인 문제만 봤을 때고.

나는 고개를 저어 주교의 말을 부정했다.

“주교님은 제가 거절할 거라 생각하신 모양인데, 저는 그 임무를 제가 맡겠다는 얘기를 하러 찾아온 겁니다. 물론 조건은 붙지만요.”

“……조건? 그게 무엇이오?”

“이번 임무가 무사히 끝난다면 본청의 교황님을 뵐 수 있게 해 주십쇼.”

“교황님을?”

이건 예상 밖이었는지 주교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물론 성녀님의 임무를 도운 자에게 그 정도야 어렵진 않지만…… 혹시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교황님에게 말이오?”

“아니요.”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키탄 님에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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