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40)
시간 참 빠르구나.
레이튼으로 향하는 스바의 갑판. 나는 그 위에서 거울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덧 이 세계에 온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던가?
아무 힘없는 꼬맹이를 어엿한 청년으로 만들기엔 그 정도 세월로 충분했던 모양이다.
이제 나는 어딜 봐도 애새끼란 소리는 안 들을 모습으로 성장했으니 말이다.
“아직 조금 어색하긴 한데…….”
단테로 활동한 지 오래돼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내 얼굴이라 받아들이지 못한 걸까. 어느 쪽인지 나도 확신이 안 선다. 익숙해지는 날이 오기나 할지도 모르겠고.
감상 가득 찬 생각을 하다가, 거울을 치워 버렸다. 외모 같은 것보다 중요한 게 따로 있었으니까.
바로 몸의 성능.
레이튼에서 수련한 2년 동안에도 믿기 힘들 정도의 성장세를 보였지만, 단테로 활동한 최근 1년 사이에는 정말 미쳤다고밖에 표현 못 할 속도로 발전했다.
원래 달성하기까지 최소 2년은 잡고 있던 3급에 올라 버린 건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의 새로 익힌 기술이나 숙련도까지.
아마 레이튼을 막 떠났던 나와 붙으면 한 10명은 넘게 상대할 수 있을 거다. 그것도 꽤 여유로운 수준으로.
그때. 나름 뿌듯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데, 내 상념을 깨 버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곧 레이튼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 주인은 물론 스바였다. 근처에 딱 한 번 들렀던 곳인데, 내게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잘만 온다.
이게 인공지능 자율주행의 힘인가.
“예상보다 빠르네. 몇 시간은 더 걸린다 하지 않았어?”
―그건 마력을 연료로 갔을 때 기준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마스터가 주신 근원의 힘이라면 그것보다 훨씬 빠르게 올 수 있지요.
그럼 처음부터 그걸 기준으로 얘기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따지려다가 그냥 꾹 참았다. 아무튼, 나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으니까. 내 경지의 상승도 상승이지만, 곧 도착할 레이튼의 모습이 기대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상회 사람들과 간간이 하던 연락에 의하면 꽤나 많이 바뀐 모양이던데, 대체 어떻게 변했을지 상당히 궁금했다.
뭐, 이제는 부정할 것도 없이 마음의 고향 비슷한 게 돼 버렸으니까. 어차피 정 붙이고 살아야 하는 곳인데, 발전해 있으면 나야 나쁠 거 없지.
하지만 곧이어 나올 레이튼의 전경을 고대하며 밖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저것들은 또 뭐야?”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주위를 포위한 코드들을 보며 황당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 * *
“그러니까, 지금 대륙에 이 레이튼만 한 노다지가 없다 이 말입니다!”
순살의 덴버.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를 죽인다 해서 그런 칭호가 붙은 남자가 그 앞의 애꾸눈을 쳐다봤다.
그는 원래 말 많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저 사내가 하는 얘기들은 꽤 솔깃하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돈은 많은데, 지키는 사람도 없다라……. 확실히 그 소리만 들으면 노다지 같기는 하군.”
“같은 게 아니라 확실하다니까요! 여기가 불가침 지역으로 선포돼 있어서 다른 왕국들이 섣불리 못 건드는 거지, 만약 할 수 있었으면 놈들이 먼저 군대라도 일으켰을 겁니다.”
“정말 달콤한 말만 골라서 하는 재주가 있군. 그러면 하나 묻지.”
덴버가 눈을 치켜뜨고 애꾸눈을 노려봤다.
“그렇게 꿀단지 같은 곳을 나에게 알려 준 이유가 뭐지? 네 말대로라면 이곳은 지키는 자도 없을 텐데 말이야.”
그만큼 좋은 노다지라면 혼자서 꿀꺽하면 되지 않는가.
애꾸눈은 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의 스캐빈져 그룹을 이끌고 있는 자였다. 그중에는 A급에 달하는 실력자도 몇 있는 만큼, 웬만한 도시 하나 정도는 본인들만으로 노려 볼 만할 거다.
애꾸눈이 덴버의 말에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지키는 인간이 없다는 건 도시 전체를 따졌을 때 얘깁니다. 듣기로는 자경단이라는 놈들이 질서를 지킨답시고 안에서 설치고 있다 하더군요.”
“그래서? 설마 칼 든 농부 놈들이 무서워서 나를 불렀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아무리 저희가 허접한 용병들 털어먹고 산다지만 어찌 그런 놈들한테 쫄겠습니까. 그럴 만한 놈이 있으니 덴버 경까지 불러왔지요.”
덴버는 경이라는 칭호와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만, 애꾸눈은 그를 자연스레 그리 띄워 주었다.
용병들이 기사를 상대로 자격지심 갖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그중에서도 정상에 선 S급은 그게 훨씬 심하다는 게 중론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엎드려 절 받기 수준에 불과하긴 하나, 그 정도로도 덴버의 표정이 살짝 풀렸으니 말이다.
“나를 부를 만한 녀석이 레이튼에 남아 있었던가? 전쟁이 끝났을 때 왕국에서 실력자들을 전부 추방시킨 것으로 아는데.”
“뭐, 그런 와중에도 제 몸 하난 확실하게 챙기는 인간들이 있으니까요. 혹시 노블레스라고 아십니까?”
덴버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대륙에서 제일 잘나가던 상인 집단 말이군. 레이튼 안에서 그런 이름을 대며 귀족 놀이를 하고 있다 듣기는 했다만…….”
“그 귀족 놀이하는 장사치 놈들 때문에 덴버 경까지 부르게 된 겁니다. 듣기로는 녀석들이 몰래 숨겨 놓은 3급의 실력자가 있다고 하더군요.”
“3급을?”
덴버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조금 경계하는 듯하자 애꾸눈이 황급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3급에 달한다고는 해도 용병이나 기사급에 비할 바는 아닐 겁니다. 그 노블레스 녀석들이 어렸을 때 데려다가 야매로 키운 수준에 불과하니까요.”
“확실하지는 않다는 소리군.”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비율은 7대3으로 하지. 물론 내가 7이다. 불만은 없겠지?”
“……알겠습니다.”
애꾸눈은 이를 빠드득 갈면서도 얌전히 수긍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가 끌고 온 스캐빈져들만 수백을 넘기지만, 그 숫자로도 3급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한다.
국가 단위로 전략 병기 취급을 받는 경지.
이 세계에서 3급이란 건 그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사실 S급인 덴버가 그의 말에 순순히 따라왔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다. 그놈의 도박 빚이 없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그래. 좋게 생각하자.’
3할이라도 그게 어딘가. 최근 대륙의 돈을 갈퀴로 쓸어 모으고 있는 레이튼이라면 그 정도로도 보통은 평생 꿈도 못 꿔 볼 양의 골드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애꾸눈은 애써 마음을 잡으며 다시 한번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 마음 정하셨으면 굳이 꾸물거릴 거 없이 바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저런 곳 하나 터는데 준비운동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지. 그 3급이라는 인간은 내가 처리할 테니, 너희들은 놓치는 거 없게 잘 털어 오기나 해라.”
말을 마친 덴버가 검을 꺼내 들었다. 곧바로 마력을 뿜어내 성문부터 부숴 버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무슨…….”
그렇게 들어 올린 손이 내리쳐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뇌가 명령을 입력하기도 전에 몸과의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덴버는 겨우겨우 내뱉은 한마디만을 남기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애꾸눈은 그 초현실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려 대륙에 세 명밖에 없다는 S등급 용병의 목이 갑자기 잘려 나가다니.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이란 말인가. 여태까지 이런 일에 대해선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애꾸눈이 차마 이어 가지 못한 의문은 금방 풀어졌다. 덴버의 시체 앞으로 한 금발의 남자가 검을 든 채 나타났기 때문이다.
청년이라는 말이 어울릴 연령의 사내는 귀찮다는 듯 주변을 한 번 훑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항복하는 놈들은 친절히 살려 줄게. 물론 평생 갇혀서 노역하기는 해야겠지만 말이야. 어느 쪽이든 선택은 존중하지.”
도망치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곧 약탈할 보물들을 떠올리며 히히덕거리던 스캐빈져들은, 금발의 청년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거센 압박에 절망스런 표정으로 무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 * *
설마 복귀하자마자 보는 게 스캐빈져 놈들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뭐 이 세계 오고 처음 마주쳤던 것도 녀석들이었던 만큼, 어떻게 보면 초심으로 돌아왔다고 할 수도 있으려나.
태평한 생각을 하며 성문으로 들어가고 있으려니, 앞에서 일단의 무리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마중 나왔다. 그중에서 맨 앞에 서 있던 갑옷의 사내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리안? 너, 혹시 리안이냐?”
“그래. 자이어,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행색 좋아 보인다?”
뭣보다 우리 상회에서 나온 흑철석 갑옷을 입고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자기들이 무슨 내 수하라도 되는 줄 아냐며 한사코 거부하던 녀석인데.
자이어가 갑옷으로 향한 내 시선을 읽었는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눈빛을 피했다.
“이, 이건 그런 게 아니라……. 그보다! 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건가?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은 또 뭐고?”
“그동안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네가 알 필요 없고, 뒤에 있는 저놈들은 너한테 주는 여행 선물이다.”
“……여행 선물? 사람이 어떻게 선물이 되는가?”
“그냥 사람이 아니라 밖에서 레이튼 침공하려던 놈들이거든. 슬슬 감방에 공간 좀 남을 거 같아서 채워 넣으라고 붙잡아 왔다. 고맙지?”
내 말을 황당하단 듯이 듣고 있던 자이어는 얘기가 전부 끝날 즈음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게 대체 어떻게 선물이란 말인가! 수백 명이나 관리할 인원은 또 어디에서 만들어 내라고!”
“레이튼에 놀고 있는 인간 많을 텐데 그 사람들 뽑아서 쓰면 되잖아. 필요한 임금은 저 녀석들 일 시켜서 벌면 되고. 나름 몸 쓰던 놈들이니까 생산성은 꽤 될 거다.”
“그게 말처럼 쉬워……”
“아, 그래도 3급 하나는 관리하기 힘들 거 같아서 베어 뒀다. 감사 인사는 됐어.”
계속해서 호통치려 하던 자이어의 입이 내가 한 말에 막혔다. 녀석은 잠깐 움찔거리더니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내게 물어왔다.
“……3급을 베었다고? 네가 직접 말이냐?”
“정확하게는 3급이 아니라 S등급 용병이긴 한데, 뭐 큰 차이는 없겠지.”
“나는…… 나는 믿을 수 없다. 분명 4급이었던 네가 대체 어떻게…….”
“지금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벌써 반년도 넘은 시점이잖아.”
“……보통은 4급에서 3급 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다만.”
“그건 일반인들 기준이고. 나한테는 또 다르지 않겠냐.”
원래 굳이 이런 걸로 뻐기는 성격이 아닌데 저 녀석만 보면 항상 그렇게 된다. 뭔가 놀리는 맛이 있다고 해야 하나.
예전에야 몸에 맞춰 정신 연령도 내려갔나 조금 걱정했지만, 그럼 또 뭐 어쩔 건가. 실제로 나이가 어려진 것도 맞는데.
자이어는 차마 묻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더니, 결국은 궁금증이 질투심을 이긴 듯 살며시 입을 열었다.
“그럼 설마…….”
“그래, 맞아.”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얼마 전에 3급으로 오른 참이야.”
* * *